마니교와 대승불교 [4]
- 무딘스키
1. '아미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미타유스(Amitayus) 혹은 아미타바(Amitabha)에서 온 것인데, 아미타유스는 무한한 수명을 뜻하고, 아미타바는 무한한 광명을 뜻하므로 각각 무량수무량광( 無量壽無量光)으로 번역된다. 즉 무한한 생명은 자비를 가리키고 무한한 광명은 지혜를 가리킨다고 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이란 염불은 무한한 생명과 지혜를 지닌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다짐이다. 나무(南無, Namas, Namo)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 빛(광명)과 지혜에 대한 강조는 마니교의 주요 교리입니다.
"아미타불께 의지합니다"는 지금도 정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끼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예수의 기도와 유사한데 중국 경교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경교에서는 목종과 꼼뽀스끼니(매듭줄 기도)의 전신인 염주의 묵주(?)를 가지고 예수의 기도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 예수의 기도는 현재 정교회에서는 끊이지 않고 기본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과 광명에 대한 강조와 나모아미타불이 인도 원시불교에도 있어요?
2. 경전 분류의 또 다른 한가지 방법은 교리 발달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부처님이 생존한 당시의 불교를 근본 불교라 하고, 부처님 적멸(寂滅)후 약 삼백년까지를 원시 불교라 한다.
그 뒤 부파불교(部派佛敎)라 하여 많은 문제점이 뒤따랐다. 그래서 '본래 부처님 의 사상으로 되돌아가자'는 일종의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으로 대승불교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 부파불교에서는 대승불교를 불교로 인정하지 않죠?
부파불교는 설일체부라고 하여 모든것이 실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윤회도 실재라고 가르치죠.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윤회는 공이라고 가르치니 실재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윤회가 실재라면 윤회는 시작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대승불교는 결국 AD 이전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는데, 대승불교의 사실상 시조는 용수와 법화경류의 경전이라고 볼 수 밖에 없겠지요?
3. '법화경'의 한역으로서는 서진의 축법호(Dharmaraksa)가 서기 276년에 번역한 '정법화경' 10권과 요진의 구마라집(Kumarajiva)이 406년 번역한 '묘법연화경' 7권, 그리고 수나라 때 사나굴다(Jnanagupta)가 601년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 7권이 있다.
구마라즙이 번역한 28품의 순서를 범어로 된 경을 가지고 단어를 분석해 보면 그 성립 시기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대체로
가.<方便品>, <譬喩品>, <見寶塔品>이 초기에 형성되고
나. 이어 <如來壽量品>, <如來神力品>이 첨가되고
다. 비교적 후대에 결집된 것은 <常不輕菩薩品>과 <提婆達多品>이 아닌가 추측한다.
밀교의 요소가 나오는 21품이후를 후기에 결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 사실상 중국에서 흥행한 법화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니교의 모습이 보이겠지요? 법화경류가 등장하던 시기는 영지주의의 활동이 아주활발하게 진행되던시기입니다.
자, 그러면 법화경의 내용을 보시지요.
4. (법화경에 나온다는 내용)
온갖 중생 그 모두 내 자녀이거니와
향략에 깊이 탐착하여 지혜 지닌 자 없도다.
삼계는 평안하지 않아서
마치 불난 집 같으니
괴로움 가득하여 매우 두렵도다.
생로병사와 우환의 불길이 항상 타오르고 있도다.
여래는 불난 집(화택: 火宅)같은 삼계(三界)를
이미 벗어나 고요히 임야에 한가하게 머물지만
저 불길 속에 있는 중생 모두가 내 자녀이거늘
이제 여기 이리도 고난이 많아
오직 나만이 구할 수 있도다.
타이르나 이를 아니 들으니
욕망에 탐착함이 깊은 탓이니라.
=> 모든 인류가 석가모니의 자식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에서 자식의 개념이 나온단 말입니까? 이건 영지주의의 냄새가 짙게 배인 글이 아닙니까?
5. '법화경'은 웅대한 불신론(佛身論)을 전개한다. '법화경'의 '여래수량품'에서는 이 세상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야근성(伽耶近城)의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붓다가야에서 성불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팔십 세의 나이로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셨지만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명을 보이신 방편신(方便身)일뿐, 실은 무한한 과거에 성불하신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수명은 무량하다는 것이다. 즉 '법화경'은 역사적, 인격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불법을 펴기 위한 방편신(方便身)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다는 신앙의 요체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 영원하신 분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즉 성육신의 개념이 법화경에도 등장합니다.
석가모니의 성육신이 존재양식이 아니라 표현양식이라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시작이 없고,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없으며, 스스로 자존하는 위치로 설정되어 있는 법화경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니교의 영향일까요? 아니면 인도불교에 원래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이란 염불은 무한한 생명과 지혜를 지닌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다짐이다. 나무(南無, Namas, Namo)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 빛(광명)과 지혜에 대한 강조는 마니교의 주요 교리입니다.
"아미타불께 의지합니다"는 지금도 정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끼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예수의 기도와 유사한데 중국 경교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경교에서는 목종과 꼼뽀스끼니(매듭줄 기도)의 전신인 염주의 묵주(?)를 가지고 예수의 기도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 예수의 기도는 현재 정교회에서는 끊이지 않고 기본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과 광명에 대한 강조와 나모아미타불이 인도 원시불교에도 있어요?
2. 경전 분류의 또 다른 한가지 방법은 교리 발달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부처님이 생존한 당시의 불교를 근본 불교라 하고, 부처님 적멸(寂滅)후 약 삼백년까지를 원시 불교라 한다.
그 뒤 부파불교(部派佛敎)라 하여 많은 문제점이 뒤따랐다. 그래서 '본래 부처님 의 사상으로 되돌아가자'는 일종의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으로 대승불교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 부파불교에서는 대승불교를 불교로 인정하지 않죠?
부파불교는 설일체부라고 하여 모든것이 실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윤회도 실재라고 가르치죠.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윤회는 공이라고 가르치니 실재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윤회가 실재라면 윤회는 시작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대승불교는 결국 AD 이전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는데, 대승불교의 사실상 시조는 용수와 법화경류의 경전이라고 볼 수 밖에 없겠지요?
3. '법화경'의 한역으로서는 서진의 축법호(Dharmaraksa)가 서기 276년에 번역한 '정법화경' 10권과 요진의 구마라집(Kumarajiva)이 406년 번역한 '묘법연화경' 7권, 그리고 수나라 때 사나굴다(Jnanagupta)가 601년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 7권이 있다.
구마라즙이 번역한 28품의 순서를 범어로 된 경을 가지고 단어를 분석해 보면 그 성립 시기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대체로
가.<方便品>, <譬喩品>, <見寶塔品>이 초기에 형성되고
나. 이어 <如來壽量品>, <如來神力品>이 첨가되고
다. 비교적 후대에 결집된 것은 <常不輕菩薩品>과 <提婆達多品>이 아닌가 추측한다.
밀교의 요소가 나오는 21품이후를 후기에 결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 사실상 중국에서 흥행한 법화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니교의 모습이 보이겠지요? 법화경류가 등장하던 시기는 영지주의의 활동이 아주활발하게 진행되던시기입니다.
자, 그러면 법화경의 내용을 보시지요.
4. (법화경에 나온다는 내용)
온갖 중생 그 모두 내 자녀이거니와
향략에 깊이 탐착하여 지혜 지닌 자 없도다.
삼계는 평안하지 않아서
마치 불난 집 같으니
괴로움 가득하여 매우 두렵도다.
생로병사와 우환의 불길이 항상 타오르고 있도다.
여래는 불난 집(화택: 火宅)같은 삼계(三界)를
이미 벗어나 고요히 임야에 한가하게 머물지만
저 불길 속에 있는 중생 모두가 내 자녀이거늘
이제 여기 이리도 고난이 많아
오직 나만이 구할 수 있도다.
타이르나 이를 아니 들으니
욕망에 탐착함이 깊은 탓이니라.
=> 모든 인류가 석가모니의 자식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에서 자식의 개념이 나온단 말입니까? 이건 영지주의의 냄새가 짙게 배인 글이 아닙니까?
5. '법화경'은 웅대한 불신론(佛身論)을 전개한다. '법화경'의 '여래수량품'에서는 이 세상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야근성(伽耶近城)의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붓다가야에서 성불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팔십 세의 나이로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셨지만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명을 보이신 방편신(方便身)일뿐, 실은 무한한 과거에 성불하신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수명은 무량하다는 것이다. 즉 '법화경'은 역사적, 인격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불법을 펴기 위한 방편신(方便身)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다는 신앙의 요체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 영원하신 분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즉 성육신의 개념이 법화경에도 등장합니다.
석가모니의 성육신이 존재양식이 아니라 표현양식이라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시작이 없고,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없으며, 스스로 자존하는 위치로 설정되어 있는 법화경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니교의 영향일까요? 아니면 인도불교에 원래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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