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복음서 [5]
- 무딘스키
요즈음 TV를 보면서 무제한적으로 매스컴을 통해 퍼지는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왜냐하면 왜곡된 내용들이 각 가정의 안방에 여과 없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다빈치코드와 소위 유다복음서에 관련된 내용을 보고 저걸 뉴스라고 내보내는가 하는 의아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당나라 당시의 문화에서 불교,도교,경교,영지주의의 4각교류 과정이 우리나라에 전혀 소개 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이다.
예를 들자면 불교의 득도나 도교에서의 득도 흐름이 사실 유사하다. 또한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세존으로 호칭하는데 중국의 경교 역시 예수를 세존이라고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과거불, 현세불, 미래불을 이야기하는데 경교에서는 성부 하느님을 원존, 성자 하느님을 세존, 성령 하느님을 정풍이라고 한다.
염주가 불교에도 있고, 경교에도 있는데 만트라의 형태로서 이는 이집트의 사막에그 기원이 있다. 나무를 치는 형태는 불교에 목탁의 형태로 있고, 경교에서도 이미 그것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서남아시아지역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며, 불교보다도 경교가 먼저 사용한 것으로 기록에는 나타난다.
영지주의의 일종인 마니교 역시 중국에서는 마니를 부처라고 호칭하였고, 금강삼매경등은 불교의 경전이 아니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법화경을 보면, 선과 악, 빛에 대한 강조, 석가모니가 염불의 대상이 아닌 기원의 대상, 시간초월적인 개념, 이름 명명의 문제성 등을 담고 있는 것은 마니교와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연구도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빈치코드와 유다복음서에 관련된 내용이 안방에 여과없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빈치코드와 유다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는 시작이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라는 고전적 질문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이는 니케아세계감독협의회(에큐메니칼 시노드)에서 이미 핵심사항으로 제기되었던 적이 있는 주제이다. 이 세계감독협의회에서 예수는 시작이 없는 존재라고 만장일치로 결론을 낸 바 있다.
이에 대한 연원을 따져보자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발상지는 아시아이며, BC4,000년 이전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신앙과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라는 사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고가 존재한 후 몇백년이 지나서야 유대라는 나라가 국가체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국가체제 수립시의 정치형태는 제정분리형태였으며, 제정분리를 거부하였던 이스라엘의 사울왕은 신정의 기득권세력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제정분리의 형태를 느슨하게 유지했던 다윗왕이 왕권을 확립하였다.
이 당시에 제정된 법률은 이스라엘 국가의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삼았는데 이는 상기 '여자의 후손'과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라는 개념을 확장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인근 중동지역의 법제와 비슷한 형태로서 함무바리 법전과 같은 탈리오(동가 보복)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탈리오는 원래 동형보복의 형태로 출발하였으나 동가보복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모세의 율법에 따른 탈리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제정이 분리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사람의 신에 대한 관계와 사람 상호간의 관계로 구별하여 2가지로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2. 사람과 신의 관계는 해제조건부 계약관계와 비슷한 형태의 언약(디아띠끼)관계 형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언약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이고, 이 '죄'를 행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참고로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시 '죄와 무죄'를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기록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3. 이 언약관계에서 언약 위반의 결과에 대한 탈리오는 '신과의 단절', 즉 '생명 자체인 절대자로 부터의 단절'로 규정하였다. 즉 언약관계의 파괴행위 근저에는 사람 이 절대자인 신을 부정하고 사람이 신처럼 행세하는 사고가 지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행세가 거짓임은 당연한 것이며, 그 행세에 대한 신의 조치는 국제법상 '반도단체의 승인' 이론과 같은 내용이었으며, 신의 세계와는 별개의 불법적인 사람들의 공동체 및 사람 공동체의 지배하에 있는 자연세계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람공동체 및 자연세계를 '세상'이라고 명칭하였다.
4. 생명 자체인 신으로부터의 단절은 결국 죽음이므로,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공동체의 죽음을 대신할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상을 모세의 율법은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여자의 후손' 곧 '멜기세텍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 '왕'으로서 사람공동체를 대신하여 죽을 것이라는 메시아 사상은 모세 율법의 핵심이었으며, 이는 제사제도와 죽음과 생명의 상징인 피뿌리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제사, 절기 및 의식으로 구체화된다.
상기와 같은 전통에 입각하여 다윗왕조가 설립되었고, 이는 성막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가, 소로몬왕때에 성전의 형태로 굳어졌다. 이 성전의 형태에서 아직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면서 해결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성전에 비치된 '진설병' 유교병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다윗왕조 등장이후 곧 중동지역은 제국주의시데의 소용돌이에 휩쌓이면서, 이집트,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이사, 마케도니아, 로마의 시대를 겪게 된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그리스어 일종인 코이네가 중근동 유럽지역의 공용어가 되었고, 로마제국에 이르러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가 하나의 나라로 굳혀지게 되었다.
로마제국시기에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떡집)에서 태어나고 이집트에서 자랐으며, 나사렛에서 성장한 예수라는 보통 교육만을 받은 사람이 등장하였다. 유대민족이 로마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금지하고,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제시한, 모세의 율법이제시한 사람공동체의 죽음 대신할 바로 '그 사람'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하고 이 세대는 '세상의 통치자' 즉 사탄의 통치권아래에 있으나 자신은 '오는 세대'의 주인으로서 사람 공동체를 대신하여 대신 죽은 후 부활하여 자신에게 의탁하는 자들을 자신을 세상에 파송한 아버지와 관계회복 시키겠다고 공언하였다. 예수 스스로가 자신을 세상에 파송한 아버지 즉 시작이 없는 존재인 예수가 창조되지 않고 존재하다가 세상에 파송된자라고 자신을 말하는 내용이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 제사장'으로서 드리는 기도인 신약 성경 '요한에 의한 복음 17장에 잘나타난다.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대제상으로서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전에 하나의 행사를 만드는데 그것은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이다. 이감사의 성찬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영도에 의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이전에 제정되었다.
예수 당시에는 유월절과 안식일 그리고 누룩들은 빵을 먹지 아니하는 무교절이 겹쳤는데 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안식일 3일전에 에브하리스티아를 준비하여 안식일 전날 에브하리스티아를 제정하고, 안식일 전날이 끝나면서 안식일이 시작되기전에 죽었다.
이 에브하리스티아는 최후의 만찬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최후의 만찬 말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직접 제정하여 넘겨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다의 문제가 본격제기된다.
요일의 개념은 성경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요일로 굳이 구분을 하자면 안식일이자 유월절이며 무교절인 날은 토요일이다. 예수는 토요일저녁이 시작될즈음에 죽는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는 금요일 12시경 십자가에 못박혔고, 금요일 날 아침에 빌라도의 재판을 받았다. 금요일날 새벽에 체포되어 헤롯왕을 만난다. 그전에 목요일날 깊은 밤에 겟세마니 동상에서 기도를 한다. 목요일날 저녁에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의기도(요한에 의한 기쁜 소식 17장, 발신자 예수, 수신자 성부 하느님)를 한다. 중보기도 전에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이야기 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면서 긴 부탁을 한다, 부탁의 요지는 제자들의 기쁨이 클 것이고, 서로 사랑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부탁 이전에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이야기 한다. 발을 씻겨주기전에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의 제정이 있고, 그 전에 최후의 만찬이 있었다. 이 때는 목요일날 저녁이었다.
최후의 만찬과 감사의 성찬례 제정 사이에 유다의 배반이 발생하였다. 왜 이 때 유다의 배반이 발생하였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최후의 만찬 시간은 목요일 저녁이고 장소는 예수가 지정한 어느 집의 방이었으며, 참석자는 예수와 12제자였다. 음식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음식인 양은 없었고,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분명히 아니었다. 음식은 누룩이 들은 빵(알토스)와 포도주였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누룩이 들은 빵을 가지고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제정한 후에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예를 행하라고 이야기 한다. 이는 반복하라는 의미도 아니고 재생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재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천주교는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가지고 미사를 집행한다. 이는 천주교가 성경에 본질적으로 위배되는 부분이다.
시리아교회를 비롯한 모든 고대의 교회는 현재까지 누룩이 들은 빵을 사용한다. 왜 누룩이 들은 빵일까?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해부해 보면 금방 답니 나온다. 예수는 먼저 누룩이 들은 빵(알토스)를 가지고 " 이는 내 몸이다(몸으로 생각하라가 아님)"라고 하고 난 후에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이는 내 피이다(피로 생각하라가 아님)"라고 하면서 이 잔은 "새로운 언약을 맺는 잔(디아띠끼)"이라고 하였다.
무슨 계약인가? 새로운 계약이다. 새로운 것이라면 옛날의 것이 있다는 말이다. 옛날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모세의 율법이 옛날의 계약이다. 모세의 율법에 내포된 "사람공동체를 대신한 죽음"을 실현하는 잔이다. 당시에 생명과 죽음의 근원으로 여겼던 피를 가지고 대신 속죄의 죽음을 담당하는 잔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기독교의 핵심은 이 잔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잔외에 왜 누룩 들은 빵(알토스)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었을까? 그것도 곧 배반할 제자들에게. 누룩이 들지 않은 빵(아쥐모스)을 들고 감사의 성찬례를 행했다고 하면 누룩이 가지고 잇는 의미인 '죄'을 상기하게 되고, 이어서 깨끗하게 살으라는 말이었다고 얼버무릴 수 있지만 분명히 누룩이 들은 빵(알토스)을 가지고 예수는 감사의 성찬례를 제정한 것이다.
이 누룩들은 빵(알토스)과 포도주는 멜기세댁에서 이미 등장했다.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맬기세댁은 누룩들은 빵(알토스)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댁에게 10분의 1을 바쳤다. 10분의 1은 당시 중근동지역 국가들의 세금이 10분의 1이었는데 아브라함에게서 그 10분의 1은 의미가 달랐다. 수량적으로 10토막으로 나눈 후에 그중에 1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바쳐지는 그 1은 첫 것이라는 의미이며, 대표성을 띠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댁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일은 예수의 죽음을 예표한다고 한다. 즉 인류의 대표로서 바쳐지는 모습과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성부 하느님이 이루어 주는 약속을 예표한다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이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대표로 바쳐짐으로써 아브라함이 10분의 1을 바친 예표는 완성되었고, 예수의 죽음은 상부하느님의 고집으로 완성기키는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속죄제사에 해당되는 것들은 무룩이 들지 아니한 무교병을 사용한다. 그러나 감사제의 경우에는 누룩이 들은 빵을 사용하는데 오순절 같은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즉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는 감사제라는 의미이다. 성부하느님이 시작이 없는 예수를 즉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없고, 성부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지 않고 나신 예수를 세상에 파송하시어, 인류의 대표로서 사람공동체를 대신하여 사람공동체의 언약파괴의 댓가인 죽음을 겪도록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감사제인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제정하기 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빵을 포도주에 찍어 유다에게 먼저 준다. 이는 가장 사랑한다는 사랑의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 사랑을 거절하였다. 지독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은 더 한심했다. 자신의 실제적인 상황도 모르면서 맹세를 하기도 하고, 최후의 만찬과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 제정에 참석한다. 다 배반 할 것이면서도 말이다. 팔아먹은 유다나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나 도망쳐버린 제자들이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확실한 의문을 가진 도마가 오히려 더 솔직했을런지 모른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녀주고, 일방적으로 십자가를 져주고, 일방적으로 죽어 준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있은 후에, 그날 저녁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들어갔다. 그 때에 그들은 가족이 모여 앉아 어린양 고기. 무교병,쓴나물,포도주를 마시면서 유월절 행사를 시작하였고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사람공동체를 대신한 일방적인 죽음으로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평화(안식),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날이었고, 유월절 피뿌리는 의식과 율법상의 제사의식이 실현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 안식일 다음날 예수는 그 죽었던 육신 동일체가 부활하였고(깨어난 것이 아님), 죽기전에 만났던 남자 제자들과 어자 제자들 즉 교회에만 나타났다. 이 제자들은 의심하기도 하였지만 부활을 확인하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까지 참여하여,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를 시행하게 된다. 이 감사제는 제사이므로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뜻이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한다는 의미이며, 이세 대가 아닌 다가오는 세대가 지금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오늘 심겨진 씨앗이 오는 다음 세대에 완성을 이룬다는 의미이며, 그 감사의 예배를 재현하는 상황에서 성부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은 모두 예배의 대상인 하느님으로서 시작이 없고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없으며 자존하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파송하는 오순절 사건(천국 시민의 추수)이 있고 난 후에 교회의 중심지는 안티오키아가 되고, 안티오키아에서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 같은 분들이 활약을 하게 되면서 교회는 왕성하게 퍼져 나갑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고린토 교회나 데살로니까 교회 같은 곳은 지금도 변하 없이 내려 온다.
예루 살렘교회는 예수의 형제라고 불린 야고보(예수보다 나이가 많음)감독으로 재직하였고,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이집트(일렉산드리아 지방)을 거쳐 서유럽과 로마로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매주 안식일 다음날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집행하였고, 가는곳 마다 에삐스꼬뿌스(감독)을 임명하여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집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에 이삐스꼬뿌스(감독)을 보좌하는 원로(프레스비떼로스)를 두어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가 중단없이 집행되게 하였는데 이 감독과 원로만이 감사제를 거행 할 수 있는 사제의 직책에 해당된다.
여러교회가 설립되고 교회 내부에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들어 오자 이 사도들은 각 교회에 서신들을 발송하여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 시간에 낭독하게 하였고, 사도들이 사라져가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만들어 복음서를 만들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성경의 정경을 정할 때
감사의 성찬례를 집전할 수 있는 사도의 저작이고,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사)에서 읽혀졌으며,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느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모아서 신약 성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인도의 사도도마 예배서, 예루살렘의 야고보 예배서, 마가복음의 기자 마르코의 예배서는 지금도 내려 오고 있으며, 예루살렘교회는 이 야고보의 예배서에 의한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야고보의 축일에 드리고 있다.
예수님 이후 300면이 지나서 동쪽의 바실리우스가 이 예배서들을 종합하여 바실리우스 예배서를 만들고, 그 예배서를 요한 크리소스톰이 축소하여 요한 크리소스톰의 예배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서유럽에서는 프랑크제국의 등장과 교황대리권이라는 개념 등장이후 이 예배를 미사의 형태로 바꾸었다.
이제 유다서를 보십시다. 유다가 감사의 성찬례에 참석한 사도입니까? 유다의 자리는 맛디아에게 대체되지 않았습니까? 유다는 더 이상 사도가 아니란 뜻 아닙니까? 유다가 복음서를 쓸 자격이 있습니까? 유다가 각 교회에 회람을 돌릴 위치에 있었습니까?
사막에서 수도 하는 은수자의 개념은 안토니오스 이후에 등장합니다. 유다가 사막에서 기도하는 은둔 수도자였습니까? 그랬다면 마까리오스라는 수도생활 연원의 대가의 기록에 이미 나왔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빈치 코드를 보십시다.
결혼은 시작이 있고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있는 존재들만이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가 결혼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에 의한 기쁜 소식 서두에 시작전에 이미 예수가 존재하였다고 선포하고 시작합니다.
감사의 성찬례와 복음서의 의미만 알아도 예수의 결혼이나 유다가 복음서를 썼네 안썼네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를 안씁니다. 복음서 즉 기쁜 소식은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사)시에 봉독되기 위한 일차적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 복음서 운운 하는 것은 감사의 성찬례와 복음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을 무시하고 거짓을 유시킬 심산이든지 둘중에 하니인데...그러한 뉴스의 여파는 자식들이 그대로 전수 받는 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 중에서 다빈치코드와 소위 유다복음서에 관련된 내용을 보고 저걸 뉴스라고 내보내는가 하는 의아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당나라 당시의 문화에서 불교,도교,경교,영지주의의 4각교류 과정이 우리나라에 전혀 소개 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이다.
예를 들자면 불교의 득도나 도교에서의 득도 흐름이 사실 유사하다. 또한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세존으로 호칭하는데 중국의 경교 역시 예수를 세존이라고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과거불, 현세불, 미래불을 이야기하는데 경교에서는 성부 하느님을 원존, 성자 하느님을 세존, 성령 하느님을 정풍이라고 한다.
염주가 불교에도 있고, 경교에도 있는데 만트라의 형태로서 이는 이집트의 사막에그 기원이 있다. 나무를 치는 형태는 불교에 목탁의 형태로 있고, 경교에서도 이미 그것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서남아시아지역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며, 불교보다도 경교가 먼저 사용한 것으로 기록에는 나타난다.
영지주의의 일종인 마니교 역시 중국에서는 마니를 부처라고 호칭하였고, 금강삼매경등은 불교의 경전이 아니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법화경을 보면, 선과 악, 빛에 대한 강조, 석가모니가 염불의 대상이 아닌 기원의 대상, 시간초월적인 개념, 이름 명명의 문제성 등을 담고 있는 것은 마니교와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연구도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빈치코드와 유다복음서에 관련된 내용이 안방에 여과없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빈치코드와 유다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는 시작이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라는 고전적 질문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이는 니케아세계감독협의회(에큐메니칼 시노드)에서 이미 핵심사항으로 제기되었던 적이 있는 주제이다. 이 세계감독협의회에서 예수는 시작이 없는 존재라고 만장일치로 결론을 낸 바 있다.
이에 대한 연원을 따져보자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발상지는 아시아이며, BC4,000년 이전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신앙과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라는 사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고가 존재한 후 몇백년이 지나서야 유대라는 나라가 국가체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국가체제 수립시의 정치형태는 제정분리형태였으며, 제정분리를 거부하였던 이스라엘의 사울왕은 신정의 기득권세력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제정분리의 형태를 느슨하게 유지했던 다윗왕이 왕권을 확립하였다.
이 당시에 제정된 법률은 이스라엘 국가의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삼았는데 이는 상기 '여자의 후손'과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라는 개념을 확장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인근 중동지역의 법제와 비슷한 형태로서 함무바리 법전과 같은 탈리오(동가 보복)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탈리오는 원래 동형보복의 형태로 출발하였으나 동가보복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모세의 율법에 따른 탈리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제정이 분리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사람의 신에 대한 관계와 사람 상호간의 관계로 구별하여 2가지로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2. 사람과 신의 관계는 해제조건부 계약관계와 비슷한 형태의 언약(디아띠끼)관계 형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언약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이고, 이 '죄'를 행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참고로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시 '죄와 무죄'를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기록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3. 이 언약관계에서 언약 위반의 결과에 대한 탈리오는 '신과의 단절', 즉 '생명 자체인 절대자로 부터의 단절'로 규정하였다. 즉 언약관계의 파괴행위 근저에는 사람 이 절대자인 신을 부정하고 사람이 신처럼 행세하는 사고가 지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행세가 거짓임은 당연한 것이며, 그 행세에 대한 신의 조치는 국제법상 '반도단체의 승인' 이론과 같은 내용이었으며, 신의 세계와는 별개의 불법적인 사람들의 공동체 및 사람 공동체의 지배하에 있는 자연세계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람공동체 및 자연세계를 '세상'이라고 명칭하였다.
4. 생명 자체인 신으로부터의 단절은 결국 죽음이므로,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공동체의 죽음을 대신할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상을 모세의 율법은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여자의 후손' 곧 '멜기세텍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 '왕'으로서 사람공동체를 대신하여 죽을 것이라는 메시아 사상은 모세 율법의 핵심이었으며, 이는 제사제도와 죽음과 생명의 상징인 피뿌리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제사, 절기 및 의식으로 구체화된다.
상기와 같은 전통에 입각하여 다윗왕조가 설립되었고, 이는 성막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가, 소로몬왕때에 성전의 형태로 굳어졌다. 이 성전의 형태에서 아직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면서 해결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성전에 비치된 '진설병' 유교병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다윗왕조 등장이후 곧 중동지역은 제국주의시데의 소용돌이에 휩쌓이면서, 이집트,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이사, 마케도니아, 로마의 시대를 겪게 된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그리스어 일종인 코이네가 중근동 유럽지역의 공용어가 되었고, 로마제국에 이르러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가 하나의 나라로 굳혀지게 되었다.
로마제국시기에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떡집)에서 태어나고 이집트에서 자랐으며, 나사렛에서 성장한 예수라는 보통 교육만을 받은 사람이 등장하였다. 유대민족이 로마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금지하고,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제시한, 모세의 율법이제시한 사람공동체의 죽음 대신할 바로 '그 사람'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하고 이 세대는 '세상의 통치자' 즉 사탄의 통치권아래에 있으나 자신은 '오는 세대'의 주인으로서 사람 공동체를 대신하여 대신 죽은 후 부활하여 자신에게 의탁하는 자들을 자신을 세상에 파송한 아버지와 관계회복 시키겠다고 공언하였다. 예수 스스로가 자신을 세상에 파송한 아버지 즉 시작이 없는 존재인 예수가 창조되지 않고 존재하다가 세상에 파송된자라고 자신을 말하는 내용이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 제사장'으로서 드리는 기도인 신약 성경 '요한에 의한 복음 17장에 잘나타난다.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대제상으로서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전에 하나의 행사를 만드는데 그것은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이다. 이감사의 성찬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영도에 의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이전에 제정되었다.
예수 당시에는 유월절과 안식일 그리고 누룩들은 빵을 먹지 아니하는 무교절이 겹쳤는데 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안식일 3일전에 에브하리스티아를 준비하여 안식일 전날 에브하리스티아를 제정하고, 안식일 전날이 끝나면서 안식일이 시작되기전에 죽었다.
이 에브하리스티아는 최후의 만찬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최후의 만찬 말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직접 제정하여 넘겨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다의 문제가 본격제기된다.
요일의 개념은 성경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요일로 굳이 구분을 하자면 안식일이자 유월절이며 무교절인 날은 토요일이다. 예수는 토요일저녁이 시작될즈음에 죽는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는 금요일 12시경 십자가에 못박혔고, 금요일 날 아침에 빌라도의 재판을 받았다. 금요일날 새벽에 체포되어 헤롯왕을 만난다. 그전에 목요일날 깊은 밤에 겟세마니 동상에서 기도를 한다. 목요일날 저녁에 '멜기세댁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의기도(요한에 의한 기쁜 소식 17장, 발신자 예수, 수신자 성부 하느님)를 한다. 중보기도 전에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이야기 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면서 긴 부탁을 한다, 부탁의 요지는 제자들의 기쁨이 클 것이고, 서로 사랑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부탁 이전에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이야기 한다. 발을 씻겨주기전에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의 제정이 있고, 그 전에 최후의 만찬이 있었다. 이 때는 목요일날 저녁이었다.
최후의 만찬과 감사의 성찬례 제정 사이에 유다의 배반이 발생하였다. 왜 이 때 유다의 배반이 발생하였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최후의 만찬 시간은 목요일 저녁이고 장소는 예수가 지정한 어느 집의 방이었으며, 참석자는 예수와 12제자였다. 음식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음식인 양은 없었고,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분명히 아니었다. 음식은 누룩이 들은 빵(알토스)와 포도주였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누룩이 들은 빵을 가지고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제정한 후에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예를 행하라고 이야기 한다. 이는 반복하라는 의미도 아니고 재생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재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천주교는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가지고 미사를 집행한다. 이는 천주교가 성경에 본질적으로 위배되는 부분이다.
시리아교회를 비롯한 모든 고대의 교회는 현재까지 누룩이 들은 빵을 사용한다. 왜 누룩이 들은 빵일까?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해부해 보면 금방 답니 나온다. 예수는 먼저 누룩이 들은 빵(알토스)를 가지고 " 이는 내 몸이다(몸으로 생각하라가 아님)"라고 하고 난 후에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이는 내 피이다(피로 생각하라가 아님)"라고 하면서 이 잔은 "새로운 언약을 맺는 잔(디아띠끼)"이라고 하였다.
무슨 계약인가? 새로운 계약이다. 새로운 것이라면 옛날의 것이 있다는 말이다. 옛날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모세의 율법이 옛날의 계약이다. 모세의 율법에 내포된 "사람공동체를 대신한 죽음"을 실현하는 잔이다. 당시에 생명과 죽음의 근원으로 여겼던 피를 가지고 대신 속죄의 죽음을 담당하는 잔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기독교의 핵심은 이 잔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잔외에 왜 누룩 들은 빵(알토스)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었을까? 그것도 곧 배반할 제자들에게. 누룩이 들지 않은 빵(아쥐모스)을 들고 감사의 성찬례를 행했다고 하면 누룩이 가지고 잇는 의미인 '죄'을 상기하게 되고, 이어서 깨끗하게 살으라는 말이었다고 얼버무릴 수 있지만 분명히 누룩이 들은 빵(알토스)을 가지고 예수는 감사의 성찬례를 제정한 것이다.
이 누룩들은 빵(알토스)과 포도주는 멜기세댁에서 이미 등장했다.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맬기세댁은 누룩들은 빵(알토스)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댁에게 10분의 1을 바쳤다. 10분의 1은 당시 중근동지역 국가들의 세금이 10분의 1이었는데 아브라함에게서 그 10분의 1은 의미가 달랐다. 수량적으로 10토막으로 나눈 후에 그중에 1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바쳐지는 그 1은 첫 것이라는 의미이며, 대표성을 띠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댁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일은 예수의 죽음을 예표한다고 한다. 즉 인류의 대표로서 바쳐지는 모습과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성부 하느님이 이루어 주는 약속을 예표한다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이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대표로 바쳐짐으로써 아브라함이 10분의 1을 바친 예표는 완성되었고, 예수의 죽음은 상부하느님의 고집으로 완성기키는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속죄제사에 해당되는 것들은 무룩이 들지 아니한 무교병을 사용한다. 그러나 감사제의 경우에는 누룩이 들은 빵을 사용하는데 오순절 같은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즉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는 감사제라는 의미이다. 성부하느님이 시작이 없는 예수를 즉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없고, 성부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지 않고 나신 예수를 세상에 파송하시어, 인류의 대표로서 사람공동체를 대신하여 사람공동체의 언약파괴의 댓가인 죽음을 겪도록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감사제인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제정하기 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빵을 포도주에 찍어 유다에게 먼저 준다. 이는 가장 사랑한다는 사랑의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 사랑을 거절하였다. 지독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은 더 한심했다. 자신의 실제적인 상황도 모르면서 맹세를 하기도 하고, 최후의 만찬과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 제정에 참석한다. 다 배반 할 것이면서도 말이다. 팔아먹은 유다나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나 도망쳐버린 제자들이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확실한 의문을 가진 도마가 오히려 더 솔직했을런지 모른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녀주고, 일방적으로 십자가를 져주고, 일방적으로 죽어 준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있은 후에, 그날 저녁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들어갔다. 그 때에 그들은 가족이 모여 앉아 어린양 고기. 무교병,쓴나물,포도주를 마시면서 유월절 행사를 시작하였고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사람공동체를 대신한 일방적인 죽음으로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평화(안식),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날이었고, 유월절 피뿌리는 의식과 율법상의 제사의식이 실현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 안식일 다음날 예수는 그 죽었던 육신 동일체가 부활하였고(깨어난 것이 아님), 죽기전에 만났던 남자 제자들과 어자 제자들 즉 교회에만 나타났다. 이 제자들은 의심하기도 하였지만 부활을 확인하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까지 참여하여,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를 시행하게 된다. 이 감사제는 제사이므로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뜻이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한다는 의미이며, 이세 대가 아닌 다가오는 세대가 지금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오늘 심겨진 씨앗이 오는 다음 세대에 완성을 이룬다는 의미이며, 그 감사의 예배를 재현하는 상황에서 성부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은 모두 예배의 대상인 하느님으로서 시작이 없고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없으며 자존하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파송하는 오순절 사건(천국 시민의 추수)이 있고 난 후에 교회의 중심지는 안티오키아가 되고, 안티오키아에서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 같은 분들이 활약을 하게 되면서 교회는 왕성하게 퍼져 나갑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고린토 교회나 데살로니까 교회 같은 곳은 지금도 변하 없이 내려 온다.
예루 살렘교회는 예수의 형제라고 불린 야고보(예수보다 나이가 많음)감독으로 재직하였고,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이집트(일렉산드리아 지방)을 거쳐 서유럽과 로마로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매주 안식일 다음날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집행하였고, 가는곳 마다 에삐스꼬뿌스(감독)을 임명하여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집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에 이삐스꼬뿌스(감독)을 보좌하는 원로(프레스비떼로스)를 두어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가 중단없이 집행되게 하였는데 이 감독과 원로만이 감사제를 거행 할 수 있는 사제의 직책에 해당된다.
여러교회가 설립되고 교회 내부에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들어 오자 이 사도들은 각 교회에 서신들을 발송하여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 시간에 낭독하게 하였고, 사도들이 사라져가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만들어 복음서를 만들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성경의 정경을 정할 때
감사의 성찬례를 집전할 수 있는 사도의 저작이고,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사)에서 읽혀졌으며,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느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모아서 신약 성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인도의 사도도마 예배서, 예루살렘의 야고보 예배서, 마가복음의 기자 마르코의 예배서는 지금도 내려 오고 있으며, 예루살렘교회는 이 야고보의 예배서에 의한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찬례)를 야고보의 축일에 드리고 있다.
예수님 이후 300면이 지나서 동쪽의 바실리우스가 이 예배서들을 종합하여 바실리우스 예배서를 만들고, 그 예배서를 요한 크리소스톰이 축소하여 요한 크리소스톰의 예배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서유럽에서는 프랑크제국의 등장과 교황대리권이라는 개념 등장이후 이 예배를 미사의 형태로 바꾸었다.
이제 유다서를 보십시다. 유다가 감사의 성찬례에 참석한 사도입니까? 유다의 자리는 맛디아에게 대체되지 않았습니까? 유다는 더 이상 사도가 아니란 뜻 아닙니까? 유다가 복음서를 쓸 자격이 있습니까? 유다가 각 교회에 회람을 돌릴 위치에 있었습니까?
사막에서 수도 하는 은수자의 개념은 안토니오스 이후에 등장합니다. 유다가 사막에서 기도하는 은둔 수도자였습니까? 그랬다면 마까리오스라는 수도생활 연원의 대가의 기록에 이미 나왔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빈치 코드를 보십시다.
결혼은 시작이 있고 존재하지 아니한 적이 있는 존재들만이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가 결혼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에 의한 기쁜 소식 서두에 시작전에 이미 예수가 존재하였다고 선포하고 시작합니다.
감사의 성찬례와 복음서의 의미만 알아도 예수의 결혼이나 유다가 복음서를 썼네 안썼네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를 안씁니다. 복음서 즉 기쁜 소식은 에브하리스티아(감사의 성사)시에 봉독되기 위한 일차적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 복음서 운운 하는 것은 감사의 성찬례와 복음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을 무시하고 거짓을 유시킬 심산이든지 둘중에 하니인데...그러한 뉴스의 여파는 자식들이 그대로 전수 받는 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