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무게를 실어줍니다.
옛날 영어 교과서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 마지막 레슨이라는 감동적인 이야기라든가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도 있군요. 이것 역시 짧지만 매우 감동적이죠.
마지막 카우보이, 마지막 선비, 마지막 한마디...나 떨고 있니?~등등...
세속적인 인생들도 마지막이란 말에 무게를 그렇게 둡니다.
더하여 누구나 죽기전에 남기는 유언이란 것도
물론 공증을 변호사에게 받아야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는 하지만 죽음에 임박하여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자식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법적운운을 떠나 그게 인간이냐?...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 사도인 바울의 그 숱한 서신 중 마지막 서신...그 무게가 막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왠지 디모데 후서는 쓸쓸하고 씁쓸한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바라며 기대하는 그런 달콤한 결말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뭔가 거대한 승리를 쟁취하고 '나를 따르라'하는 호령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거든요.
저는 그래서 이 디모데 후서를 우리 신앙의 참됨을 살피는 시금석 정도로 여깁니다.
디모데 후서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아 맞으면 바른 신앙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요
만약 이 디모데 후서와는 전혀 동떨어진 상상을 하며 교회를 다닌다면 그것은 사이비라고 말입니다.
무엇이 그리 생각하게 하는가 하면 1장에 가라사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유언을 남기며 이 마지막 서신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IVF에 가입하여 겸손히 배우던 시절 사람 둘이 마주보고 있는 표지의 onE to onE을 끝내고 그 다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말씀을 제목으로 삼은 교재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사이비 복음을 전파하고 즐거워하며 번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외치는 이구동성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바울의 이 단언과는 얼마나 동 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부자되는 것, 권세 잡는것, 병고치는 것, 능력으로 으스대는 것이 그들의 교훈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어디 있습니까?
약간 민망한 마음이 들면 이렇게 말하지요. '기왕이면 잘되는 게 좋지않소?'...쩝
...
바울은 그의 평생의 사역을 돌아보며 깊은 통찰력으로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특별히 지독한 외로움으로 슬픈, 노구의 몸을 감옥에서 영광의 그날을 바라는소망으로 버티며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어하는 그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편지이니까요.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예언하며 언급한 말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의 교회들의 행태를 그대로 적시하고 있음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영적 통찰력이 이렇게 실제적으로 약 2천년 후의 한국교회 상황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3:1-5)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대입하는 일은 이런 감상문에는 좀 부담되는 일입니다.
...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버린 사람 데마...
아마 그는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되고 싶었고 유명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익이 되지않는 순수함에 대한 회의가 그를 돌아서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데마가 만든 복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삼중구원이니 오중축복이니 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목회자의 잘못을 지적하면 저주받는 다는 헛소리 아니겠습니까?
십일조를 가불해서라도 바치면 열배의 복을 받는 다는 속임수 아니겠습니까?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적절히 타협한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상상이지만...말입니다.
...
지금 성경말씀을 앞에 놓고...(온갖 목사들의 다양한 소리를 잠재우고...) 아니, 오직 이 디모데 후서의 짧은 말씀만을 앞에 놓고 한번 따져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바울의 세운 교회에 속하여 있는지
데마가 세웠을 것같은 교회에 속하여 있는지...후~~
...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눈물없이 읽기 어려운 애절함이 묻어 있습니다만
그래도 바울은 천국소망외에도 이 세상에서 더불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디모데와 같은 동지를 두었으니 행복합니다.
그런 동지들이 있습니까?
-
바울과 같은 목회자에겐 디모데와 같은 동지가 있겠습니다.
답글
데마와 같은 동지가 많은 목회자도 있겠지요?
요즘엔, 하나님에 대한 왜곡도 수준이 높아져서^^...
"하나님 뜻이 아닌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붙잡고 있기 때문에 빼앗아가는 분!"이라고도 한다지요? -
저희들이 참석하는 교회 목사님 부부만을 보고 그분들의 신실하심 때문에 교회 전체에 대한 인상이 처음엔 좋았더랬어요. 그런데 점점 더 교회를 알아감에 따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참으로 세상적이라는 것과... 매 주일 받는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사고와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답글
물론 소수의 신실한 믿음인들도 있습니다만, 그렇잖은 경우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지요. 그것을 보면서 참 많은 실망과 아픔을 느꼈더랬습니다. 목사님의 동지가 많잖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고, 스페인 교인들의 세상의 안이함과 쉬움만을 따라가는 모습에 실망이 들었어요.
믿음의 동지.. 정말 신실한 신앙의 동지들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정말 크나큰 축복이요 은혜인 듯 합니다.-
주방보조2007.04.24 23:24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갭이 ... 지적수준의 평준화에 비례해서 점점 줄어야 하는데...이상하게 그 갭이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특히요. 한 때...옥한흠목사님이 평신도를 깨우라 하는 책도 쓰시고 성속의 구분이 곧 없어질 것같았는데....그래서 그 이전부터 꿈꾸던 한몸의 지체들로서 평등한 교회를 기대했었는데...그 이후론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더 많이 나오시더라구요. 그리고 대세는 개신교조차 성속의 구분이 더 심화되어가는 추세로 나타나는 것같습니다.
일방적 강의와 듣기만 하는 시스템으로, 그 갭을 좁히기란 지난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새 대부분 그저 듣기만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저도 사실 뾰족한 대안을 가진 것은 없지만 ... 지금 우리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일방적 시스템은 깊이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성도들도 문제겠구요...길을 시원스레 터주지 못하시는 목사님들도 문제겠구요.
요즘 목사님들은 사실 일종의 CEO시잖아요. 성공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모든 것을 다 관장해야 직성이 풀리고 누가 감히 자기 잘못하나 지적하면 권위에 도전받은 것처럼 그 꼴을 못 봐주시는...
...
그래서 교회안에 믿음의 동지보다는 ...사교적인 친구만 득실대는 것이죠. 영적 공급의 통로가 하나로 독점되어 있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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