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성경에 대하여

의심스런 불교의 기원(펀글)

주방보조 2004. 2. 26. 16:41
의심스러운 불교의 기원

문명의 전파

인도의 문명을 예찬하는 자는 인도만이 모든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는 인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관념이 본래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기서 모습을 바꾸고 세계의 갖가지 종교로 나뉘었다고 한다. 인도를 예찬하는 자가 쓴 책을 볼라치면 어디에나 그런 내용이 씌어 있다. 그러나 사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런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중앙 아시아와 인도는 그 문명을 서양으로부터 이어 받았다. 서양 문명을 전하는 개척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쪽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에 문명을 전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하기 전에 벌써 다리우스 왕(재위 B.C.522-486)이 통치하고 있던 페르시아가 신드(Sind) 골짜기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지방총독 제도를 펴는 동시에 중앙 집권제를 시행하였다.

인도에 남아있는 유적은 바빌론 및 페르시아의 유적과 똑같은 것이다. 페르시아 다음에는 알렉산더 대왕(재위 B.C.336-323)이 다스리던 희랍인이 인도에 침입하였다. 그들은 펀자브 지방에 희랍 풍의 왕국을 여러 개 세웠다. 그리고 나서 희랍계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희랍 문명(주: 헬레니즘 문명)을 중앙 아시아에 전하였다.

예컨대 박트리아 왕국(B.C.255-139)은 알렉산더가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했을 때 잔류한 희랍인의 자손이 중앙 아시아의 `암`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그 박트리아 및 소그드 지방(주: 박트리아 지방과 소그드 지방은 거의 같은 장소를 가리킴)의 왕국은 힌두교의 문헌을 남기고 있지만, 거기에는 야바나 인(주: 희랍인)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그 유적에는 희랍과 로마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꽁트 고브레 달비엘라(Comte Goblet d`Alviella)는 <인도가 희랍에게서 받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조각, 회화, 문학 그리고 연극에 이르기까지 희랍 문명의 요소를 전부 다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도의 서해안에서는 고대 로마제국과 인도 사이에 무역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로마 유적도 출토되고 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의 신전을 건설하는 데 필요로 했던 고가의 목재를 인도로부터 수입했을 것이라는 것은 유력한 학설이다.

기원 후 스키타이 족이나 파르티아 족의 침략은 서양의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스키타이 족이나 파르티아 족은 러시아의 남쪽 카스피해의 남동쪽으로부터 밀려와 인도를 침략하였다. 그들은 인도의 여러 왕국을 정복했지만 문명은 그대로 보존하였다.

기원 후 2, 3세기에 그들은 새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여러 민족에 대해 교량 역할을 하였다.

민족 대이동 때의 상황을 보건대, 북 아시아로부터 남하한 민족은 이동할 때에는 난폭하게 파괴하였으나 일단 그 땅에 정착하고 나면 서양의 희랍, 라틴, 그리스도교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의 전파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인, 희랍인, 스키타이 족이 수세기에 걸쳐서 힌두스탄(현재의 인도와 파키스탄을 합한 지역)의 북서 지역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공동체가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정착한 일은 있어도, 유럽이 인도의 침략을 받은 일은 한 번도 없다. 유럽에는 인도의 사원도 없다. 인도에 남은 유적을 살펴보면 페르시아나 희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소아시아나 이집트의 유적에는 인도의 발자취는 그림자도 없다.

희랍과 라틴의 고전 문학 속에는, 다시 말해서 기원 후 2세기 이전의 고대 동양계의 문학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불교 이야기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인도인이 신으로 섬기는 보타(Botta)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알렉산드리아 클레멘데의 `스트로마데스`인데, 이것은 기원 후 2세기말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처(주: 불타, 이하 부처라고 하기로 함)의 가르침은 바빌로니아이건 시리아이건 이집트이건 그 어디로도 들어간 적이 결코 없었다. 인도에 인접한 서양이나 중동에는 부처의 종교가 전해졌으리라는 흔적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런 일은 한 순간도 없었다.


부처(불타)가 살던 시대

정말이지 기원전에 부처가 살고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막스 뮐러(Max Mller)는 인도에 관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일생에 걸쳐 불교가 그리스도교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찾아내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부처에 대한 숭배는 박트리아와 소그드 지방의 스키타이 족의 왕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같은 최초의 숭배는 현 페샤와르의 고을(현 파키스탄의 북부)인 간다라 지방의 한 귀퉁이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스키타이 족의 자손인 쿠샨 왕조 밑에서 기원 후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 발전하였다.

마하반사(Mahavansa)를 보면 아소카 왕의 전설이 들어 있다. 마하반사에 의하면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소카 왕은 `경건한 왕 샤크라바틴Chakravartin)`이며, 역사가에 의하면 기원전 273년경에서 232년경에 재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그의 치세에 고대 인도에서 영토를 제일 많이 확장하고, 포교 및 불교 경전을 모으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마하반사는 기원 후 5세기의 것이다. 아소카 왕은 사르나드라는 장소 말고도 인도 각지에 왕의 이름을 새긴 철기둥과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아소카 왕의 철기둥 어떤 곳을 보면 알렉산드리아라는 마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역사가는 그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와 동일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이집트에는 인도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박트리아나 지방이나 소그디아나 지방의 중앙 아시아 산간 지역에서 희랍계의 작은 왕국이 후세까지, 즉 기원 후 7세기에 이슬람교 국가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 작은 희랍계 왕국의 왕들은 희랍인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거듭하건대 특히 코카서스 지방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마을이 그것 말고도 많이 있었다. 아소카 왕의 철기둥에는 희랍 왕의 옆에 훈족 왕들의 이름도 열거하고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그 왕들의 이름은 중앙 아시아 작은 왕국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임스 프린제프(James Prinzep)라는 박학한 영국인은 비문의 몇 개 문장을 해독해 놓았다.

그에 의하면 `신들과 법의 친구`라는 아소카는 자기가 부처의 가르침으로 귀의케 한 민족을 열거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야바나 인(주: 희랍인을 지칭함)의 왕 이름으로 프톨레 마이오스, 안디고노스, 안디오고스가 있다. 그것을 보고 역사가들은 그 왕들은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자손으로 아소카는 기원 전 3세기에 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소카는 탁실라(Taxila)라는 마을의 왕이었지만 그것은 간다라의 아주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치 않게 인도 각지를 정복한 `인도의 제왕`으로 아소카를 높이 떠받듦은 물론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또 아소카 왕은 동서남북을 상징한다는 4종의 동물(주: 수소, 코끼리, 말, 사자), 샤크라(Chakra, 주: 법륜이라고 번역되며 윤은 차륜의 모양이다.

인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최고의 신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샤크라 자체는 불교만의 상징이 아니며 금세기의 마하트마 간디는 피륙을 짜는 데 명주의 륜(輪)을 샤크라의 상징으로 삼았다), 4마리의 사자가 새겨진 돌기둥 등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대지의 여신인 야크시(Yakshi) 상과 대지의 남신인 야크샤(Yaksha) 상이 만들어진 듯하다. 당시의 조각은 표면 가공이 특징적이다.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여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물이란 본래 부처의 유골을 보관하기 위한 일종의 분묘로 지금은 `부처의 열반의 상징`이라고 해석하고들 있다. 그렇지만 여물에 있는 부처의 생애와 본생경(本生經), 자타카(Jataka), 주: 부처의 전생에 대한 설화집)이라는 부조를 보면 부처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말 탄 사람이 없는 `말`은 왕자의 출가,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 `두 개의 발자국`은 세상의 왕인 부처, 고귀한 사람에게 떠받쳐져 있는 책은 제각각 부처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그 시대에도 역시 상술한 대지의 여신 야크시가 인간의 형태로 표현되고, 이제 바로 꽃피려고 하는 초목에 발을 묶어놓아 풍요의 신으로 등장한다.

후에 안드라라고 불리는 왕조(B.C.27∼A.D.336년경)가 번성하는데, 그 시대에는 산치(Sanchi)에 대 여물이 세워지게 된다. 산치의 여물은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여물을 둘러싼 듯한 일종의 담장이 있으며, 그 동서남북에 탑 모양의 문이 달려 있다. 그 탑 모양으로 된 문의 조각은 `법륜`과 `삼보표`(주: 부처, 법, 승려를 상징함)가 있지만, 그 대부분이 민간 신앙의 우상들과 더불어 불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특히 문을 지키는 우상으로 야크샤와 야크시가 눈에 띈다. 야크샤와 야크시들은 머리를 독특하게 묶고 가슴 장식과 귀걸이, 둥근 형태의 팔찌와 발찌를 했으며 뒤 허리 쪽에 리본을 묶었을 뿐인 나체이다. 조각을 보면 야크샤들이 보리수를 둘러싸고 있고 물소, 사자,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 등 많은 동물들이 보리수를 둘러싸고 있으며, 코끼리의 무리가 여물을 둘러싸고 있다.

맞은 편 오른쪽에는 기괴한 얼굴을 한 크고 작은 악마들이 다수 있고 좌측에는 보리수 등이 있지만 여기에도 아직 부처의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보리수와 여물이 부처를 표시하고 있다고 할뿐이다.

그러나 야크시 및 야크샤들 그리고 동물들의 생동감과 현실감을 볼 때, 어째서 부처만이 보리수 혹은 움직임이 없는 여물 정도로만 표현되었는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궁금증이 더해진다. 그것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산치의 야크샤들이 있는데, 그 근방 가쥬라프의 남녀 상의 옷차림과 매우 닮아 있다.

가쥬라프에는 9∼10세기경에 만들어진 힌두교와 자이나교(Jainism) 사원의 유적이 있다. 그 남녀 상에서 나타난 에로티시즘은 인도의 가장 오래된 `베다` 시대로부터 중세 인도의 `가마, 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있었던 것이다. 산치의 여물도 불교의 소산이라기보다는 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여기에 있는 유적의 부조를 볼 것 같으면, 동양에서 기원한 것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는 종려나무의 잎을 형상화한 동자(Barmitz)와 날개가 있는 사자, 뿔이 있는 사자, 사람 얼굴을 한 사자,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그리핀(Griffin, 주: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사자 몸뚱이를 한 괴물) 등 많은 것이 서방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인도에서 부처의 모습이 돌연 등장하는 것은 기원 후 간다라(Gandhara) 미술의 시기이다. 또 간다라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인도의 마투라(Mathura)에서 독특한 불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마투라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니스카 왕 입상은 명백히 로마의 복식이라 생각되는 기법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간다라에서 갑자기 나타난 최초의 불상은 제자를 가르치는 교사로 표현되어 있다. 부처는 똑바로 서서 오른손을 위로 들고 있다. 얼굴은 고전적인 데다가 완전히 희랍 풍이다. 코도 그렇고 어깨도 반듯하며 머리는 깎은 상태다. 이는 영락없이 제자를 데리고 산책하되 희랍 풍의 토가(toga, 주: 옛 로마 시민의 겉옷)를 입은 철학자의 모습이다.

부처에게 후광이 붙여진 시기로 미루어 그것은 바로 희랍의 아폴로(주: 희랍 신화에서 음악, 의술, 궁술, 예언과 광명의 신으로 태양과 동일시함)였다. 인도의 기후로 인하여 당시의 벽화는 소실됐고, 남은 것이라곤 조각품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간다라 미술이 인도 최초의 불교 미술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간다라 미술은 본디 희랍과 로마의 미술이라는 것을. 부처는 결코 후세의 인도 사원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간다라 미술에서는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에밀 말르(Emile Male)라는 유명한 그리스도교 예술의 사가(史家)에 의하면, 갈리아(옛날의 프랑스)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주: 대 성전 교회 건물) 중 아주 오래된 것은 그리스도교 예술가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건축 및 조각과 장식 모양도 시리아, 그리스도교 유적에서 그 기법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는 간다라의 얕은 돋을 새김(주: 얕게 판 부조를 말함)과 카타콤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관,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로빈키아 아트 제작소의 관 등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매우 닮아 있어서 거의 같은 기법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어느 것을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는 고풍스런 옷을 감아 걸친 모양을 하고 있고, 가는 기둥과 잎이 무성한 나무 줄기로써 다른 장소와 분리된 벽감(주: 벽에 조각품 등을 세워 놓기 위해서 만든 오목한 부분)에 평행하게 놓여 있다.

그들은 둘 다 선 채로 한 손을 들고 있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제자들의 표정으로 보아 스승의 가르침에 동의를 표명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으로 미루어 에밀 말르는 예술가 한 사람이 그 두 곳에서 종사했으며 그 조각품을 제작한 곳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간다라 미술에서 부처의 출생을 나타내고 있는 얕은 돋을 새김에는 움직임이 없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코린트식 석주의 장식에 새겨져 있다. 파슈느거르에서 발견된 불상의 발판에는 274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만일 콘드파레스 왕이 즉위한 때를 시점으로 해서 계산된 연대라면 기원 후 214년이다. 콘드파레스는 기원 후 1세기 인도의 왕으로서 파르티아 인이었다.

그는 칸드라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조카 아브라가레스가 콘드파레스의 뒤를 잇고 기원 후 70년에 왕좌에 앉은 것 같다. 그것이 만일 샤카 족의 시대라면 기원 후 352년인 것이다. 샤카는 스키타이 인을 산스크리트 어(범어)로 표현한 것이다.

+ 마리아의 토마스 오노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