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개념]헤아리다에 대하여(5)

주방보조 2004. 2. 8. 00:42
<제80호> [개념] "헤아리다"에 대하여 (5) 2002년 01월 06일


수(數): 세다와 헤아리다

1967년에 초판이 발행된 제 자전에서는 수(數)의 첫 번째 뜻으로 "셈" 혹은 "세다"를
제시합니다.  수(數)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그것이 어째서 "세다"는 뜻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역은 상당히 끔찍하지만 말입니다.  

수(數)자는 우선 루(婁)자와 복( )자의 합자입니다.  복( )자는 다시 복( )자와 같은
자인데, 이는 손(手)에 막대기 혹은 채찍(卜)을 쥐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상형자입니다.  
막대기나 채찍으로 때린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누구를 때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루(婁)자에 나타나 있습니다.  루(婁)는 무(毋)와 중(中)과 여(女)의 합자인 점에
주목합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있는 중인 여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수(數)는 "아무 일도
안하고 있는 여자를 막대기나 채찍으로 때린다"는 뜻입니다.  게으른 여자를 체벌한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게으른 "여자"만 때린다고 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고대
중국에서도 서양의 로마시대처럼 여자가 사람으로가 아니라 재산이나 노동력으로만
취급되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녀동등의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부당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랬다는 데에야 어째 볼 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게으른 여자를 때릴 때에도 어떤 규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數)자가
"세다"의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게으른 여자를 때릴 때에라도 마구잡이로
체벌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정한 수의 매를 때리기로 되어 있었고, 그 수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매를 때릴 때마다 일일이 그것을 세었던 것 같습니다.  

고대 로마법에서도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매질, 혹은 채찍질의 상한선은 40회였습니다.  
혹시 잘못 셀 가능성 때문에 40회를 채우지 않고 한 대를 뺀 설흔 아홉까지만 세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중국에서 수(數)자가 "세다"의 뜻을 갖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자전에 나타난 수(數)자의 뜻은 "세다" 이외에도 대단히 많아서 전부
열다섯 가지나 됩니다.  그 중에서 아홉 번째 뜻이 "헤아리다"입니다.  "수왕자순
지래자역(數往者順 知來者逆)"이라는 역경(易經)의 예문도 함께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경의 편찬시기에는 수(數)자의 어법 중에 "헤아리다"가 이미 정착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역경의 편찬연대는 추정이 쉽지 않습니다만,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주역의 주요 내용
중 8괘의 저자는 복희씨(伏羲氏), 64괘와 괘사(卦辭)의 저자는 문왕(文王), 효사(爻辭)의
저자는 주공(周公), 끝으로 십익(十翼)의 저자는 공자(孔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르게
잡으면 중국의 삼황오제 시대, 아무리 늦게 잡아도 공자의 시대에 이르면 이미 수(數)자가
"세다"와 함께 "헤아리다"의 뜻으로 쓰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가 한반도에 전래됐던 한국의 삼국 시대에는 이미 수(數)자의 이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와 한국말로 새김이 붙여졌을 것임을 넉넉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다"와 "헤아리다"는 사촌

한국 고유어에서도 "세다"와 "헤아리다"는 매우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중세 한국어 어휘를
살펴보면 이 점이 분명해 집니다.  문헌을 통해 확인 가능한 "헤아리다"의 옛말로 "혜다,"
"혜아리다," "혜어?榻?" 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혜다"가 가장 근원적인 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혜아리다"나 "혜어?榻?"는 어떤 점에서든 "혜다"의 파생어, 혹은 다른 낱말과의
복합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혜다"의 뜻에 "세다"와 "생각하다"가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예컨대
유합(類合)이라는 한자학습서에 보면 "세다"는 뜻의 계(計)자를 "혤 계"라고 풀고 있습니다.  
계(計)자를 파자하면 "열(十)까지 말하다(言)"는 뜻입니다.  수를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것이
바로 계(計)라는 뜻입니다.  또 석보상절(釋譜詳節) 언해본에도 "삼세(三世)옴 혜온
수(數)ㅣ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혜다"가 "생각하다"는 뜻으로 쓰인 예문은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열녀편에 "우러 닐오  l
나도 혜여?榻? 올?怠척舅甄? ?態傘?"이라는 대목에 나타납니다.  "우러러 말하되, 나도
생각해 보니 (그말이) 옳습니다 하거늘"이라는 뜻입니다.  

또 용비어천가 104장에서도 "사직(社稷) 공(功)  혜사"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사직의
공을 생각하사"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일찍이 15세기 경의 문헌에도 "혜다"는 "세다"와
"생각하다"의 두 가지 뜻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세다"는 뜻으로서의 "혜다"가 단모음화 현상과 히읗이 시옷으로 변하는 현상을 겪으면서
"혜다"는 "세다"의 형태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혜다"는
"세다"의 어원적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생각하다"는 뜻으로서의 "혜다"는 오늘날
그 형태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헤아리다"입니다.  물론 중세 국어에도
이미 "혜아리다"는 말은 있습니다.  그와 함께 다른 파생어로서의 "혜어?榻?"와 "혜여?榻?"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 두 형태는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혜다"의 파생어, 혹은 다른 낱말과의 복합어인 "혜아리다," "혜어?榻?,"
"혜여?榻?"에는 "세다"는 뜻이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불경인 능엄경 언해에 보면 "혜아린 젼 로"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뜻은 "생각했기
때문에"입니다.  또 송강 정철의 속미인곡에는 "누어    각?耽? 니러 안자 혜어?榻?"라는
구절이 나오고 같은 저자의 성산별곡에도 "만고인물(萬古人物)을 거 리 혜여?榻?"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혜어?榻?"와 "혜여?榻?"는 모두 "(깊이)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혜아리다" 혹은 "혜어?榻?"가 "세다"의 뜻으로 쓰인 용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혜다"의 명사형인 "혜욤"과 "혜윰"의 뜻이 대체로 "생각"으로만
새겨졌다는 점입니다.  두시언해 초간본의 "네 게을어 도라올 혜유미 업고"라는 구절이나
원각경 언해의 "연(緣)?態? 혜요  닐오 ㅣ 팔식(八識)이 다 능(能)히 제 분(分)ㅅ경(境)을
연(緣)?態? 혜  젼 ㅣ오"라는 구절에 나오는 "헤욤"이나 "혜윰"은 모두 "생각"이라는
뜻이지 거기에는 "셈" 혹은 "계산"이라는 뜻이 없습니다.  

사전에 따라서는 "혜윰"의 뜻으로 "셈"을 제시한 것도 있지만, 예문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서
과연 "혜윰"에 "셈"이란 용법으로 실제로 쓰였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혜다"의 또 다른 명사형인 "혬"은 거의 전적으로 "셈"이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예컨대 월인석보에 나오는 "말 ?糖? 혬 혜  안해 겨샤 ㅣ"라는 구절의 "혬"은 의문의
여지없이 "셈"이라는 뜻입니다.  "혬 혜다"는 말은 곧 "셈을 세다"는 동족 목적어를 취한
동사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혜다"가 원래 "세다"와 "생각하다"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이 두 가지 뜻은 서로 다른 형태로 전환되어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동사의 형태를 보면 "세다"의 뜻은 오늘날의 "세다"로, "생각하다"의 뜻은 오늘날의
"헤아리다"의 형태로 남았습니다.  

또 명사형의 형태를 보면 "세다"의 뜻으로서는 "혬"을 거쳐서 오늘날의 "셈"으로 정착됐고,
"생각하다"는 뜻으로서는 "혜욤"이나 "혜윰"의 형태는 사라지고 "혜아리다"의 명사형인
"혜아림"만 사용되다가 오늘날의 "헤아림"으로 남았습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