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기독교인의 정치의식(손봉호, 뉴조)

주방보조 2019. 9. 17. 06:44

지난해 수련회에서도 제가 설교를 했기 때문에 올해는 고사했는데, 인천기윤실에서 특별히 다시 요청을 해 주셨다고 해서 이렇게 서게 되었습니다. 먼저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수나 사회적 영향력이 커져서 그런지, 정치 문제, 국가 문제,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정치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곳은 미국과 한국뿐인 것 같습니다. 독재정치 시대에는 진보 기독교인들이 인권 탄압과 자유 억압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최근에는 보수 기독교인들이 대북 정책과 복지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기독교나 교인들이 정치·사회적 목소리를 낼 때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침묵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미국 상황을 봅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비기독교적인 인물입니다. 거짓말을 수시로 합니다. 성 추문도 많습니다. 인종차별 발언을 하고,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는 등 기독교 정신과는 맞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비도덕적 인물을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대통령이 전 인류, 전 세계적 위기와 갈등을 가져온 것에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반성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주장과 선택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의 대부분 메시지는 국가와 사회에 대해 수동적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는 무리도 많았지만, 예수님은 언급을 아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이신 태도가 어떤지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 태도를 결정하는 데 방향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로마는 헤롯 가문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물론, 예수님도 헤롯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헤롯과 바리새인들이 공공의 적인 예수를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하려고 합작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을 노예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세금(주민세)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이에 대한 열심당원들의 항거 사건도 있었습니다. 세금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를 옭아매기 위한 질문이 나옵니다. 이 질문에 만일 예수가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이는 유대인 편에 서지 않는 대답이 되는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한다면 로마에 반역하는 말이 되기 때문에 어떤 대답을 하든지 진퇴양난에 빠질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은 아첨하며 예수께 다가갑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낼까요? 말까요?", "이겁니까? 저겁니까?" 틀을 짜서 예수를 압박합니다. 물론 예수는 그들의 아첨에 귀 기울이지도 않았고, 세금에 대해 그들이 만든 질문의 틀에 갇히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는 로마 황제 얼굴이 그려진 은화만 세금 납부에 사용했습니다.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화폐를 만든 사람의 통치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은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로마, 로마 황제 통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화폐에 누가 그려져 있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황제입니다." 예수가 다시 말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쳐라." 만일 예수가 이 말로 끝냈다면 그들의 함정에 걸리는 것이지만, 덧붙여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니 하나님께 바쳐라. 너도, 나도, 가이사도, 하나님의 형상이니 하나님의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고, 그 안에 일부 가이사의 것이 있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도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이 대답은 바리새인들이 책잡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함정에 걸리지 않으셨고, 논쟁의 여지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정면으로 반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가를 인정하고 국가의 통치에 따라야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국가가 잘못되었을 때 비판하고 수정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인 동시에 권리입니다. 그러나 법률을 어겨 가며 항거한다면 논쟁의 여지를 만드는 것이기에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통치에 무조건 항거하고 뒤집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국가 개혁이 모든 사명인 것처럼 행동하시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보다 더 큰 하나님나라의 섭리와 사역에 중심을 둔 예수님의 태도를 보아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무엇이 중요한가를 보는 태도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천군 천사를 대동해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과 솔로몬이 누렸던 대국을 다시 누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왕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께 "오실 메시야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누구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나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과연 이 말을 깨달았을까요? 이어 예수는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자신의 말을 듣고 틀림없이 실족(실망하고 거리끼고 기분 나빠: 스칸달라이즈)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유일한 소망이 메시아인데, 메시아인 줄 알았던 자가 기껏해야 십자가에 매달린다니 기분 나쁘고 거리낌이 있고, 실족할 수밖에요.

그리스도인들이 독립운동도 할 수 있고 정부의 잘못에 비판하고 잘못을 고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상황에서 기독교 정당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이름,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 문제가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목을 매지는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복음은, 하나님나라는 정치 문제, 국가 문제보다 훨씬 큽니다.

하버드 법대 서스테인 교수의 책 <사회 정보 시대의 분열된 민주주의>는 이념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은 현재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보수는 원래 이념과 관련 있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보수가 이념화되어 '우파'라는 용어로 불리고 있습니다. 진보의 이념화는 '좌파'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사회는 사소한 것으로 목을 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프랑스 귀족 철학자가 이 사회문제를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냉정하게 따져 보자는 취지에서 이데올로기(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정리한 것이 이념의 시초입니다. "현실을 뒤집은 것이 이데올로기"라며 비판했던 칼 마르크스는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관념, 정치적 이론이 절대적으로(종교적으로) 우상화한 것을 '이념'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념은 종교보다도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기독교가 이념으로 대립하게 되며, 정치적 성향을 이론으로 정당화하면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예수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대립과 갈등으로 갈라진 여러 이념과 이즘(ism)에 대해 '그런 것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한 목사를 비판했더니 그렇게들 저를 욕을 합니다. 유튜브에서는 제가 고정간첩이 되어 버렸습니다. 좌파, 간첩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이 사람들이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길입니다.

우상숭배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원래 우상이 없습니다. 사람이 섬기는 무언가가 우상이 될 뿐입니다. 이념을 우상으로 만들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붙잡고, 진보 보수 무언가에, 쩨쩨한 것에 휩쓸리지 맙시다.

어느 한편에 서지 말고 그 위에 서야 합니다. 오늘날 기윤실은, 갈라지고 분열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한쪽 편에 서지 말고,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와 교훈처럼 그들 위에 올라서는 특권, 그곳에서 잘못과 옳음을 이야기하는 특권을 누리며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손봉호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자문위원장, 고신대학교 석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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