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무너지는 이유
1.
예언적 설교가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영원의 지평에서 늘 평가했다. 권력, 물욕, 색욕의 유혹 앞에서 언제나 유약한 인간을 향하여 죽음을 기억하고, 그 이후의 심판을 기억하라고 설교했다. 서양과 동양의 종교는 같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런저런 통로를 통해 서로 같은 교훈을 주고받았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산 자를 찾아오는 죽은 자 이야기다. 해골이 앙상한 죽은 자 셋이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찾아오는 이야기다. 사찰에 미몽에 빠진 자아에서 벗어나라는 뜻의 팔정도를 그려 놓듯이 서양에서는 수도원 담에 세 명의 산자와 세 명의 죽은 자 모습을 그려 놓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대들과 같았었고, 그대들도 우리와 같아질 것이다(Quod fuimus estis, Quod sumus eritis)"라는 글귀를 덧붙였다. 신앙의 길은 탐욕의 길이 아니라 온갖 탐욕의 허상을 통찰하고 그 유혹을 이기며 걷는 길과 맞닿아 있었다.
2.
초기 한국 교회에서도 이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목회자는 구도자였고, 현실적 요구보다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였다. 지역 사회에서 그들의 삶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1960년대를 지나면서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 부류의 마술적 성서 해석에서 일석삼조의 유혹에 빠졌다. "예수의 십자가가 저주를 풀었으니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다가 천국에 가자!"라는 삼박자 구원이다. 가난에 찌든 이들에겐 "여기서도 잘살고, 거기서도 잘살자"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이때부터 목사들은 구도자가 아니라 "여기서도 잘살고 저기서도 잘사는" 데 성공하기 위한 수단을 찾기 시작했고, 효율성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었다. 대형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세워졌고, 작은 교회들은 문을 닫았다. 돈이 없으면 개척교회도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낸다. 진리는 교회의 크기에 따라 입증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작은 교회를 버리고 대형 교회로 내닫는 이들이 많아졌다.
3.
사람의 주목을 받기 위해 성령과 불을 받아야 한다는 설교가 붐을 이루었다. 황금 이빨로 변한다는 기괴한 주장에서 공중으로 부양 승천할 것이라는 종말론까지 판을 쳤다. 구도적 삶이 아니라, 이적의 증표를 얻든가 종교적 신비를 경험해야 인간의 합리성을 깨는 초월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 곁들여진 주제는 '마술 방망이를 든 하나님' 체험이다. 기적을 이루는 삶, 긍정의 힘, 좋으신 하나님, 승리의 길, 이슬비같이 내리는 은혜, 정상을 향한 신앙 등등의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구도적 삶은 이제 너무 어려워졌다. 불을 받아 병을 고치고, 불운을 밀어내면 더 잘살 수 있다며 여기저기서 부흥사들이 휩쓸고 지나갔다. 구복적 삶이 신앙생활이 되었다. 복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다. 이들이 설교하는 하나님은 사회적 비극, 분단의 고통, 암으로 죽어가는 노인 40% 등 '그들'의 삶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으신다. 교회 안에는 평생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순을 지적하면 은혜를 모르는 자의 불신앙으로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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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독교는 자연과 운명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신의 창조물인 자연은 비신성화되고, 개인의 운명은 초월에 의하여 재구성될 수 있다는 성공 신화가 성경 여기저기 섞여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서구의 뜨겁던 신앙 부흥 운동은 경제에 밀리기 시작했다. 서구 식민지 시대에 많은 것을 착취해 들인 나라의 축적된 자산과 부의 재생산 구조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구복적 기독교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건강보험, 무상교육, 사회복지 망이 촘촘한 나라에서는 교회의 사유화도 불가능하고, 불의 역사도, 성령의 능력도 제대로 입증되지 않는다. 그래서 "특별한" 목사가 만들어 내는 대형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질병 퇴치 퇴마사 같은 목사도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 세상에서는 탐욕과 욕망이 내장된 구복 기도도 사라졌다. 그리고 교인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국 부흥사들은 서양 교회의 몰락을 지적하며 성령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 비신학적 아전인수 논리다.
5.
가난하여 복을 구하고, 병이 들어 치유받기를 원하고, 현실이 너무 힘들어 내세의 구원을 바라는 종교는 우리 사회에서도 당분간은 유지될지 모르겠으나 머잖아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기독교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서 하나님 신앙을 증언할 영적 지도자를 키워 내려면, 진리를 설파하고 참 신앙을 증언하려 한다면, 이젠 교회가 무엇을 위하여, 왜 존재해야 하는지 스스로 밝혀야 한다. 이런 작업은 신학자의 정신세계가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교단 중심부만 아니라, 신학 교육 현장까지 이판사판이다. 돈과 권력을 점유한 정치 목사들이 교회의 미래를 고민할 리가 없다. 그들은 너무나 세속적이며, 노골적이다. 입으로는 경건과 초월을 주장하면서 손으로는 권력과 돈을 거머쥐는 무리가 너무나 많아, 나는 가끔 그들에게서 기독교의 종말을 경험한다. 신학교에 찾아오는 신학도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이들이다.
6.
한국교회는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 부류로 흥했으나, 그 결과 길을 잃었다. 조용기 부자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미래를 본다. 정화가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교회는 외부의 힘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에 기생하는 악이 부패시켜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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