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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왜 이렇게 추락하나(최재석,당당뉴스)

주방보조 2014. 1. 9. 21:49

한국기독교, 왜이렇게 추락하나
한국기독교의 갱신을 위해서
입력 : 2014년 01월 08일 (수) 00:18:59 / 최종편집 : 2014년 01월 09일 (목) 12:23:39 [조회수 : 1418] 최재석jschoi@cnu.ac.kr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 3:18)

요즘 한국의 대형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목사편과 반대편이 맞서서 서로 고소고발하고 방송과 신문에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비행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내가 호주에 있을 때 어느 할머니가 “내일 저녁 한국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 오셔서 집회하시는데 가지 않겠소?”라고 내게 물었을 때 한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할머니를 만난다면 그분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겁이 난다. 한국교회가,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교회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불교의 원로 스님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분들의 책과 어록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이 세상을 떠나도 그분들의 삶에 관한 책이 나오고 그분들의 헌신적인 삶이 영화화 되어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전에 정의구현 사제단이 종북적인 발언을 했다고 구설수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 사제들은 개신교의 목사들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 그들은 국가적인 문제에 관여했지만, 개신교의 목사들은 얼굴 뜨거울 정도의 사적인 비리나 윤리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에도 손양원 목사나 한경직 목사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얼마 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사회인들이 교인과 교회를 자기중심적이고 상업적이라고 본다는 보고서를 냈다. 믿음과 삶의 이중성으로 인해서 교인들의 언행을 싫어한다고 지적받았단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에서 교회가 유지해야 할 거룩함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소명의식의 약화와 교인들의 경건의식의 상실이 한국교회의 영상이변(靈狀異變)을 불러왔다고 했다. 이러한 영적 상황을 개선하고 추락한 교회의 신인도를 회복하기 위해서 교회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 글의 필자인 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의 임원은 주장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이 단체의 임원의 결론에 내 마음이 답답했다. 그 협의회의 명칭은 길고 거창해 보이는데, 이 필자가 제시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진단과 치유방안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막연했기 때문이다. 왜 소명의식이 약화되고 경건의식이 상실되었는지 그리고 교회와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지 밝혔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 기독교의 현 상황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원인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치유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깝다. 문제점을 직시한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문제점이 보이면 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이 아플 때 그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올바른 처방이 나올 수 없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원인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영성이변이 일어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개선되기보다는 날로 악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 기독교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진작부터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다고 말해 왔다. 가톨릭교회가 부패했을 때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개혁자들은 종교개혁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혁운동 후 50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보다 더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에는 교인이 늘고 있는데, 개신교회의 교인 수는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회에 자정능력이 있는가? 교회의 비리나 부패는 교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가톨릭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종교집단의 경우 지도자의 역할은 어느 집단에서보다 더 중요하다.

요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대형교회들의 문제는 한 마디로 말해 교회의 담임 목회자들의 욕심에 그 원인이 있다. 교회의 재정을 사유재산처럼 유용하는 것도 교회의 건물을 과도하게 크게 짓는 것도 모두 목회자들의 욕심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이렇게 인간적인 욕심을 부리게 되었는가?

한 마디로, 목회자의 권위를 부추기거나 목회자를 신성시하게 만드는 목회자들의 가르침과 교회제도가 그 원인이다. 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주의를 내세웠지만, 요즘 그 원리를 제대로 가르치거나 실천하려는 목회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받은 성직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벌을 받는다고 배웠다. 바꾸어 말하면, 목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담임목사에게 순종해야 복을 받는다. 부흥강사들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과 담임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을 별로 구분하지 않고 순종을 강조한다. 실제로 목사에게는 축도권이 있고 안수권이 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목사는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 아니고 구약 시대의 제사장의 위치에 올라 있는 신령한 분이다. 그의 말씀이 곧 진리다. 개혁자들의 후예인 목사들은 안타깝게도 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주의를 외면하고 있다.

개신교의 개교회 제도는 이 신령한 목사로 하여금 전횡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각 교회의 목회자는 해당 교회에서 선임하고 어떤 상부기관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지 않는다. 노회 또는 연회가 있고 총회가 있지만, 그러한 상부 기관은 개별 교회의 행정을 별로 감독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그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목사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한 문제는 목사의 뜻에 맞게 해결된다. 개별 교회의 문제를 노회 또는 연회로 가지고 간다고 해도 그 노회 또는 연회의 임원들은 그 교회의 목사의 친구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사 한 분이 20년이나 30년 동안 장기간 시무할 경우 그는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 목사 세습이나 교회재정의 유용 등 많은 교회의 문제가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장기 집권하는 정부가 부패하듯이 목사가 장기간에 걸쳐 시무하는 교회도 부패하게 마련이다.

목사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제사장직에서 가르치는 직분으로 내려오려고 하겠는가? 개교회 중심의 개신교회 조직이 바뀔 가능성이 있는가? 그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정치적 혁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은 혁명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개혁운동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제2종교개혁을 말하는 사람들도 개혁자들과 같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여건이 16세기와는 달라서 그런 개혁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부패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는 한국의 교회를 손 놓고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 갱신의 책임이 거의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제사장적 권위를 내려놓아 달라고 목회자들에게 요청하고 싶다. 중세에 가톨릭교회가 부패했던 것은 아무도 건들릴 수 없는 그들의 권위 때문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그들의 권위의식으로 인해서 그들은 물욕, 명예욕 그리고 성적 타락에 빠져들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의 문제도 바로 목사들의 권위의식에서 나온다. 지금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에게서 중세의 사제들이 빠졌던 타락과 유사한 면을 본다.

목회자들은 설교단에서 참 좋은 말을 많이 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 말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설교하지만, 누구보다 재물을 탐한다. 한 가지 예로, 목회자들이 은퇴할 때면 다른 직장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퇴직금을 요구한다. 명예를 탐하지 말라고 설교하지만, 총회장직을 맡기 위해서 몇 십억씩 돈을 써가며 불법 선거운동을 한다. 그리고 목사들이 가짜 박사학위를 받는 데서 그들의 명예욕과 도덕적 해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함안에 있는 조그만 교회의 집사인 동서와 저녁식사를 했다. 한참 만에 만난 동서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네 교회에서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자기네 교회 목사가 미국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단다. 하루는 목사가 팜플렛 하나를 건네주기에 집에 가서 읽어보니 그 안에 미국 모 신학교에서 박사를 했다는 목사들 명단 가운데에 자기네 목사의 이름이 있더라는 것이다. 동서는 회사에 다니면서 경영학 석사를 이수하기 위해서 3년 동안 죽을 애를 다 썼는데, 자기네 목사는 미국에 가서 공부한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한 것인지 떡하니 목회학 박사를 취득했더라는 것이다. 그런 목사에게 실망한 동서는 그때부터 3개월 동안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목사가 서서 악수하는 문을 피해서 다른 문으로 나왔다고 했다. 목사들이 이렇게 교인들에게 불신을 받을 만한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목사가 가짜 박사를 얻는다는 것은 먼저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사기죄를 범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성경에는 세상 명예를 탐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박사 칭호의 명예를 탐했으니 성경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겸손하라고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주셨는데, 그는 박사학위증을 가지고 자기의 권위를 더 높이려고 애쓰는 권위주의자이다. 마지막으로, 학식 있는 체하려는 그는 예수님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하셨던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선자이며 외식하는 사람이다. 미국에 가지도 않았거나 한두 번 단기간 다녀와서 박사를 얻은 목사들이 큰 교회로부터 작은 교회에 이르기까지 전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지금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부도덕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행위가 사회적 기준에조차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음행한 것이라고,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아주 높은 수준의 행위를 요구하셨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교회들의 목사들이 그리고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높은 수준의 삶은 고사하고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수준의 삶을 살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다. 그러면 그들의 행위가 그렇게 저급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들이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행위를 중시하는 가톨릭교회에 맞서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해서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소위 이신칭의 교리를 내세웠다. 특히 루터에게 있어서 이 교리는 여러 교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의 총합이었다. 루터는 주로 바울서신에서 이신칭의 교리의 근거를 제시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고 기록했고, 갈라디아서에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2:16)라고 말했다. 루터는 행위를 중시하는 가톨릭에 맞설 수 있는 좋은 근거를 바울서신에서 찾아냈다.

개혁자들의 주장에 따라 그들의 후예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믿고 행위를 중시하지 않았다. 물론 바울이나 개혁자들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 세상의 정욕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성화의 단계를 중시했지만, 그러한 행함에 대한 언급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이신칭의 교리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자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수동적인 의인화의 교리가 강조된 나머지 개신교인들은 능동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화된 삶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한 번 믿음에 의해서 의인이 된 사람은 그 후에 어떤 삶을 살더라도 하나님의 견인에 의해서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교파까지 생겨났다.

인간은 원래 게으른 존재여서 편안하면 더욱 편안해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계속 몰아세우지 않으면 힘 드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의 정욕에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힘써 노력한다고 해도 그 욕구를 극복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은 재물에 대한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고, 권위를 누리고 싶어 하고 싫은 사람을 미워하는 습성이 있고, 원수를 미워하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웬만큼 노력해서 가능한가?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 혹은 습성은 안간힘을 써서 노력해도 억누르거나 버리기가 쉽지 않은데, 그러한 욕구나 습성을 방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의 스님들이나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이 개신교 지도자들보다 더 존경의 대상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저서를 탐독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가? 개신교가 불교나 가톨릭교회보다 더 부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보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나 노력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교리는 루터가 본 대로 바울 서신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행위를 경시한다는 데에 있다. 루터주의자들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언급이 바울 서신에 나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구약은 율법의 세계니까 젖혀둔다고 하더라도, 바울서신을 제외한 다른 서신서나 요한계시록이나 복음서에서는 신앙인의 행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먼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내용은 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기도하는 방법도 제시되어 있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믿음에 관한 교훈도 나온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신앙인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조목조목 명시되어 있다. 산상수훈의 결론부분에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 절 내려가서는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다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보다 믿음을 더 강조한 요한복음에서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9)고 말하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믿는 자의 행함이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서신서들 중에서 요한서신에서는 특별히 행함이 중시되어 있다. 요한일서 3장 18절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랑 하는 자가 곧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강조한 요한서신의 기록자는 여기서 사랑은 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행해야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사랑을 말로만 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요한서신 기자는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 사는 것 혹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요한서신에 따르면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며 악을 행하는 자는 사단에게 속한 자다. 따라서 구원과 멸망의 판단기준은 행위이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행함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교회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의 행함이다.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소개되는데, 이 첫 번째 편지의 첫 문장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2:2)로 시작한다.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라서 믿음이 전제되어서인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지 않고 그들의 행위가 어떤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계시록의 마지막부분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참고하는 생명책의 두루마리에는 심판받는 사람의 행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20:12).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줄 상에 대해서 언급할 때도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고 행위를 상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물론, 믿음이 구원의 기본조건이어서 믿음 없는 사람이 행함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성경에서 행함을 언급할 때 그 행함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바울은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웠는데, 복음서들, 요한서신, 요한계시록에서는 행위를 구원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둥절하기 쉽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도 없고 두 가지를 모두 선택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야고보서 기자는 이 두 가지를 연계시키면서 모두를 받아들이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에서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2)고 부언함으로써 믿음과 행함의 동반자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야고보서 기자의 이런 언급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강조한 믿음과 복음서들, 요한서신, 요한계시록에서 중시한 행함이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보아야 한다. 어느 신약학 교수는 로마서는 초신자를 위한 것이고 복음서는 성숙한 신앙인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에 집중하면서 내 논리와 맞지 않는 구절을 간과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읽기가 아니다. 그렇게 정립된 신학이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올바른 신학이 될 수 있겠는가? 성경에는 서로 상반되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맥을 자세히 살피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은 아주 큰 산이다. 그 산에는 가파른 절벽도 있고 완만한 경사지도 있고, 숲이 우거진 곳이 있는가 하면 바위가 많은 곳도 있고, 소나무가 우거진 곳도 있고 참나무 군락지도 있다. 그런데 그 산을 바위산이라고 말하거나 참나무 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산의 일부를 보고 하는 말에 불과하다. 나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을 선택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버리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을 내 주장에 맞추려 하지 않고 그 글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글 읽기의 기본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믿음과 함께 행함을 중시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에 치우쳐서 행함을 소홀히 한 결과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올바르지 않은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불신하게 되었다. 전도하자고 하지만, 이렇게 불신의 대상이 된 교회는 전도의 동력을 잃게 마련이다. 그래서 개신교인이 줄고 있는 것 아닌가? 왜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이 그토록 힘들여 가르치신 교훈을 외면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물론 그동안 많은 개신교인들이 사회봉사에 힘쓰고 올바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 그러한 수고가 모두 빛을 잃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턱 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바울의 메시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함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할 때 겸손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목회자들도 부패의 근원인 권위의식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믿음에 치우쳐 왔으니 균형을 잡기 위해서 한동안 행함에 치우치는 것이 좋겠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갱신이라는 사명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를 탓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