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명을 향하여: 변화하는 환경에서의 선교와 전도
Together Towards Life :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
2013 부산 WCC 제10차 총회를 위한 새로운 WCC 선교와 전도 확언을 위한 제안
Proposed for a new WCC Affirmation on Mission and Evangelism Toward WCC’s 10th Assembly in Busan, Korea, 2013
2012년 1월 22일 CWME executive group 승인
2012년 3월 22-27일 마닐라에서 있을 CWME pre-assembly 제출
제11차 초안 (Draft 11)
?WCC CWME의 새로운 선교와 전도 선언문은 2012년 9월 경 WCC 중앙위원회에 채택되고 내년 WCC 10차 부산 총회에서 승인될 것이다. 따라서 이 번역문은 2012년 3월 22-27일까지 마닐라에서 열린 CWME Pre-Assembly에서 토론하고 논의하기 위해 만든 초안이다. 이 선언문은 향후 수정 보완될 것으로 예상되나 지역교회와 선교현장에 있는 사역자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이 문서를 숙고하고 얻은 통찰력이나 문제제기를 하도록 장려하는 목적으로 번역하여 나눈다.
?책임번역자: 김영동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 번역참여자: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선교와 전도 위원회(CWME)는 Porto Alegre 총회 후 2006년 이래 새로운 에큐메니컬 선교의 확언을 세우기 위해 일하였고, 공헌을 하였다. 그 새로운 진술은 2013년 한국 부산에서 열리는 WCC 10차 총회에 제출될 것이다. 1961년 뉴델리에서 있은 IMC와 WCC의 통합이래로 ?중앙위원회에서 승인한 ?선교와 전도에 관한 단 하나의 공식적인 진술은 1982년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컬적 확언”이라는 문서뿐이다. 에큐메니칼 통찰력의 목적은 변화하는 상황에서 전도와 선교의 이해와 실천을 갱신하기 위한 비전과 개념과 방향을 찾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 받아 모두를 위한 생명의 완전성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WCC 구성원 교회들과 또한 관련되어 있는 선교기구들보다 더 넓은 차원의 폭넓은 호소이다.
1. 생명을 향하여 함께: 주제 소개
2. 불의 숨결: 변혁적인 영성
3. 세상의 소금: 주변부로부터의 선교
4. 생명의 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기
5. 변화의 바람: 움직이는 교회?
6. 생명의 축제 : 결론적인 확언?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
1. 우리는 창조주이며, 구원자이며, 생명의 유지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안에서 온전한 세상(oikoumene)을 창조하셨고,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세상안에서 지속적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생명이며,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임을 믿는다(요 3:16). 더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관심이자 그의 선교이다(요 10:10). 우리는 전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고 생명을 공급하고 유지하는 생명의 수여자로서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창 2:7;요 3:8). 생명의 거부는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수여하는 선교로 초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한 풍성한 생명의 비전을 증거할 힘을 주신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생명수여의 사역을 찾아볼 수 있을까? ? ?
2.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과 모든 인간들과 피조물에 흘러가는 거룩한 삼위일체로 묶여 있는 사랑에서 시작된다.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선교사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요20:21), 그들이 희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능력을 주신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안에서 생명을 경축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힘에 저항하고 변혁하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성령을 받아”(요20:22)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성령의 선교에 대한 감사를 갱신함으로 어떻게 우리가 변화하고 다양한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재구현할수 있을 것인가? ??
3. 성령안에서의 생명은 선교의 본질이고, 왜 우리가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의 핵심이다. 영성은 우리의 삶에 깊은 의미를 주고 우리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부터의 거룩한 은사이고 생명을 유지하고 돌보는 동력이다. 이 선교적 영성은 사람들의 영적인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역동적인 변혁과 다름 아니다. 어떻게 우리가 삶을 지탱하는 변혁적 영성으로서의 선교를 되찾을 수 있을까??
4. 하나님은 인간만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지 않았고, 또한 우리에게 부분적인 구원을 주지 않았다. 나아가 복음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과 우리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의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를 우주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명의 체계안에서 상호연결되어진 존재로서의 모든 생명 온 세상(oikoumene)을 인식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지구에 대한 미래의 위협이 자명하다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5. 기독교선교의 역사는 기독교의 중심부에서 “미전도지역들” 땅끝으로 가는 지리적 확장의 개념에 의해 구현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대다수가 그들의 현재의 삶이나 근원을 남반구나 동반구에 두는 이른바 “세계 기독교”로 묘사되어지는 급격히 교회의 환경이 변화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주(nigration)는 기독교적인 환경을 재형성하는 세계적이고 다방향적인 현상이 되었다. 여러 다른 지역들로부터의 강력한 순복음적이고 은사주의적인 운동의 출현은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기독교의 무게중심의 이동”이 신학들과 의제들과 실천들에 있어서 선교와 전도에 주는 통찰력은 무엇인가??
6. 선교는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가는 또한 사회의 특권층으로부터 주변층으로 갈 때 일어나는 운동으로 이해되어졌다. 지금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선교의 수행자로서의 그들의 핵심적 역할을 주장하고 있고, 변혁으로서의 선교를 주장한다. 이렇게 선교를 재고하는 역할의 도치는 강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선교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 어리석은 자들, 힘이 없는 자들을 선택하기 때문이다.(고전 1:18-31). 만약 “주변부로의 선교”에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개념의 전환이 있다면, 주변부 사람들의 특징적인 공헌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들의 경험과 꿈은 오늘날 선교와 전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결정적인가??
7. 우리는 맘몬의 신앙이 복음의 신뢰성을 위협하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다. 시장신학은 글로벌 시장이 무제한의 성장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선전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신화는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영적인 삶을 위협하고 인간들만이 아니라 전 창조세계를 위협한다. 어떻게 우리가 지구적인 시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복음을 선포할 수 있거나 시장의 영을 이길 수 있을까? 교회가 지구적인 영역에서의 위기와 경제적 생태계적인 불의 가운데서 교회가 어떠한 선교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8.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 회중들은 구원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활기찬 사자로 부름을 받았다. 전도는 확신있게 그러나, 겸손하게 우리의 신앙과 확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자비를 선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은사이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라면 피할 수 없는 열매이다. 그러므로, 각 세대에서 교회는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전달하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으로서의 전도에 대한 헌신을 갱신해야만 한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개인화되고 세속화되고 물질화되고 있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 선포해야한단 말인가??
9. 교회는 다종교 다문화상황 가운데서 거하고 있고, 사랑과 평화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다른 종교와 문화의 사람들과 함께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다원적인 상황은 교회들에게 도전이고 그러므로 진지한 종교간 대화와 교차문화적 의사소통이 필수불가결하다. 이처럼 많은 종교들과 문화가 있는 세상에서 생명을 수여하는 선교를 실천하고 공동증거하는데 있어서 에큐메니칼 확신은 무엇인가??
?10.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변혁을 위해 세상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선교는 새로운 생명을 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을 선포한다.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있는 분열과 긴장을 극복하며, 통일성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면 마침내 세상은 믿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요 17:21). 그리스도의 제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반드시 포용하는 공동체로 세상과의 화해와 치유를 가져다 주는 공동체로 존재한다. 교회는 생명의 충만함을 위하여 어떻게 함께 전진하고 선교적인 정체성을 갱신할 수 있을까? ? ? ?
불의 숨결: 변혁적 영성
?11. 오순절 임하였던 성령은 꺼져가는 촛불이라기보다는 불의 숨결로서 신비적 카리스마적 경험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헌신적인 역사적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성령의 선교를 우리자신의 이야기나 제도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성령의 세례는 쭉정이를 태우는(행 2:3; 눅 3:16-17) 불세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성령과 선교에 있어 성령론적 접근이 우리의 신학적 교회적 울타리들을 넘어가고 우리를 선교의 새로운 자세와 실천으로 이끌어가는지를 함께 분별할 필요가 있다.
?12.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삶의 모든 차원 즉 생물학적, 인간적, 사회적, 영원의 모든 차원에서 생명을 소생시키는 많은 표적이 있음에 기뻐한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의미로 이 땅에서 실현되었다.
13. 그러나 21세기는 아주 많은 문제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개인간, 공동체간, 국가 간 폭넓은 인간 관계성의 범위뿐 아니라 전 창조세계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전례 없는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세계화된 세상에서 선교의 새로운 변혁적 영성은 이러한 깨어진 관계들을 치유하는 희망의 가장 심오한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도전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에로 이끌어가는 중보자(Paraclete)이며 생명의 수여자인 하나님의 영의 은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구한다. 잠시동안 우리와 전 생태계가 산모와 같이 고통스러워할지라도, 성령은 우리의 산파가 되시기에 선교가 완수되었을 때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을 믿는다(요 16:20-22).
14. 지난 수십 년간 선교신학에 있어서 성령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것은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다. 이 재확인은 신적인 실체에 대해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한 권속으로서의 세상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에 있어 성령론적 초점은 선교가 기독론적 근거를 가지며 성령의 경륜은 그리스도의 경륜인 말씀에 관련됨을 인정한다.
? 성령의 선교
?15. 하나님의 영-히브리 성경의 루아흐-는 생명의 원천이고 인류의 숨결로서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창 2:7). 현재의 고통 가운데서도 성령은 우리의 탄식과 피조물의 썩어짐에 종노릇한 산통을 함께 하신다(롬 8:23, 21-22). 우리는 희망과 기쁨 속에서 구원받기를 고대하고 있다(롬 8:23). 창조때 물의 형태를 나누게 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였던(요 1:33) 하나님의 동일한 성령이 교회를 세우시고 능력을 부여한다. 성령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신비한 방식과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역사하기도 한다(눅 1:34-35; 요 3:8; 행 2:16-21). 그러므로 창조 때의 성령의 경륜의 보편성과 구속에서의 성령 사역의 독특성은 하나님이 마침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때(고전 15:24-28)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성령의 선교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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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성령은 마리아에게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의 구원자와 주로 삼으셨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주셨다(눅 4:18). 우리는 자유케 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찾는 일을 계속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사역은 죄에 속박된 사람들에게 자유케 하는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는 일,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일을 포함한다.”?
?17.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숨을 거두셨고 그의 옆구리(요 19:34)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다. 죽음 가운데 무덤의 냉기 속에 있을 때 불의 숨결인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는 죽은 자 가운데 첫번째로 살아나셨다(롬 8:11). 부활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동체에 나타났고 그의 제자들을 선교하도록 보내셨다. 예수는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심으로 능력을 부여하셨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 그리고 불의 혀가 각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행 2:3). 하나되게 하는 성령 안에서 초대교회는 더불어 살면서 교인들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나누었다(행 2:44-45). 위로부터의 능력, 성령의 은사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을 증거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형성하였다(눅 24:49; 행 1:8). 심지어 환난으로 인해 흩어져 있을 때도 이주민 교회는 믿음을 지켰고 전세계 교회들은 서로서로 또 주변에 있는 교회들을 도왔다(행 11:19-30).
18. 성서적 증거는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다양한 이해로 증명한다. 그 중 하나는 중보자이며 상담자와 변호인인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이후에만 오실 것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성령을 강조한다. 성령을 선교의 임무를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대행자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성령 이해는 보내고 파송하는 것을 강조하는 선교학으로 이끈다. 또 다른 이해는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요 16:13) 가운데로 인도하며,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요 3:8) 움직여 전우주를 품는 “진리의 영”임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성령을 그리스도의 근원으로, 교회를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선포한다. 이 두 번째 관점은 믿음이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왕국을 미리 맛보는 성만찬 모임 후에 ?평안히 나아가는(선교에서) 것을 전제한다. 전진(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기원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산물이고 “예전 이후의 예전”이라고 불린다. 이 두 번째 관계적이고 동반상승적인(synergetic) 신학은 선교에 대한 포괄적 이해로부터 온다. 여기서의 선교는 보편적 개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는 교회의 종말론적 경험에 대한 진정성있는 증거를 하는 것이다. ?
19. 미시오 데이는 삼위일체 신학의 재진술이다: “하나님 자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교의 생명이 되시고, 역사 속의 하나님의 개입이 인류와 보편적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친교하도록 이끄신다”(요 21장). 교제(코이노니아)와 사랑에 대한 이 궁극적 표현은 교리나 윤리강령이 아니라 사랑의 친교로서 전세계로 전파된다. 이 성령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끊임없이 알리는 기독교적 증언을 낳았고 또한 전 창조세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역동적인 개입을 확언하기도 하였다.
피조물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선교
?20. 성령은 지혜의 영으로서(사 11:3; 엡 1:17)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성령께서 인간의 문화와 창조성을 깨우시므로 모든 문화와 상황이 지닌 생명살림의 지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은 우리 선교의 한부분이다. 우리는 선교가 식민지화와 연계하여 각 지역 사람들 가운데 있는 지혜를 알아보는 데 실패하고 그들의 문화를 폄하한 것을 반성한다. 문화를 공격하고 문화파괴에 일조한 선교 활동은 생명대신 죽음을 불러왔다. 삶을 긍정하는 각 지역의 지혜와 문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전통이 멸시받고 무시당했던 사람들의 증언들을 높이 사며, 그들의 지혜는 창조세계 속에서 성령의 생명과 우리를 연결하는 새로운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속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러 방식을 아는 데 도움을 준다. ?
21.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의 행위와 더불어 시작되므로 창조가 하나님의 선교의 중심에 자리한다. 피조물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은 긴밀히 연결되어있고 하나님의 선교는 우리 모두를 무한한 은혜로 감싸안는다. 선교는 피조물 전체를 아우른다. 우리는 인간중심의 좁은 접근방식을 넘어 모든 창조된 생명간의 화해된 관계를 나타내는 선교방식을 재발견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 우리는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을 듣듯이 이땅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우리는 이 땅이 처음부터 인간의 불의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을 안다(창 4:10). ?
22. 하나님의 영의 사역인 선교는 인류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구속을 추구한다(롬 8:19-22). 선교는 하나님께서 변혁을 원하시는 피조물의 구체적 상황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위치해야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피조물과 함께하는 선교가 이미 우리의 교회들에서 생태정의(eco-justice),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 지구를 긍정하는 영성을 통한 응답들과 같은 긍정적인 운동으로 나타났음을 기뻐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는 때때로 모든 피조물 또한 우리 모두가 부름받은 화해된 공동체에 포함되었다는 사실(고후 5:18-19)을 잊었고, 피조계를 미시오 데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하는 데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으로부터의(from) 임박한 구원을 선포하지 않고 성령의 생명에 참여하여 얻는 우리와 지구의 치유에로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가 버려지고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지구와 우리의 몸 둘다 변혁되어야 한다. 이사야의 환상과 요한이 받은 계시는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됨을 증언한다(사 11:1-9; 25:6-10; 66:22; 계 21:1-4). ? ?
23. 우리의 선교의 관점에서, 영성과 창조는 재방향설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선교참여, 창조세계 안에서의 우리 존재, 성령의 생명을 실천함은 상호변혁적으로 함께 엮여야 한다. 다른 것들을 빼고 하나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많은 위험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선형적인 삼위일체의 친교에서 벗어난 헛된 활동주의와 선교에 빠질 수 있다. 우리의 이웃에 속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만 속하였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개인주의적 영성에 빠질 것이다. 또 우리는 나머지 피조물들이 아파하고 신음하는데도 즐거워하는 영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변혁될 창조세계의 희망 없이 살게 될 것이다. ?
?24. 우리는 우리의 선교에서 새로운 회심(metanoia)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겸손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교를 인간이 다른 것들에게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얼마나 많은 다양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선교의 동역자로서 활동하고 있는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창조세계가 여러 방식으로 인간에 대한 선교에 참여함을 확실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세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혜서는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찬양(시 19:1-4; 66:1; 96:11-13; 98:4; 100:1; 150:6)을 확인해주고 있고,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기쁨과 경탄이 우리의 영성의 한 근원이 됨을 말해준다(욥 38-39). ?
25. 우리는 창조세계와의 영적인 결탁을 긍정하기 원하지만 땅은 오염되고 착취되었다. 인간의 탐욕은 지구온난화와 다른 형태의 기후변화를 야기하였다. 소비주의는 무제한의 성장이 아니라 지구자원의 끝없는 착취를 자극하였다. 만일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땅은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구원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홀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또 구원은 우리가 공유하는 창조세계의 폭넓은 생명의 요구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을 배제하고는 도래할 수 없다.?
영적인 은사와 분별력
26. 성령은 자신의 뜻대로 공평하게 은사들을 주신다(고전 12:8-10; 롬 12:6-8; 엡 4:11). 그 은사는 다른 이들을 세우고(고전 12:7; 14:26) 또한 전 피조물의 화해(롬 8:19-23)를 위해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 은사들 중의 하나가 영들을 분별하는 것이다(고전 12:10).
27. 초기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많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영들의 세계를 경험했다. 신약성경은 악한 영을 포함하는 다양한 영들을 증언한다: “통치자”(예: 천사들, 히 1:14), “주관자”와 “권세”(엡 6:12), “짐승”(계 13:1-7)과 선하고 악한 다른 권세들. 사도 바울도 영적 싸움을 증언하며(엡 6:10-18; 고후 10:4-6) 마귀에 저항하라고 권고한다(약 4:7; 벧전 5:8). 교회는 세상에 보내진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를 가져오는 성령의 능력과 연합하라고 부름받는다.
28. 분별력의 요청은 또한 우리가 영적인 삶에서 종종 성령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예고하거나 명령할 수 없으나 성령의 자유가 선교에서 분명하고 능동적이라는 끊임없는 종말론적 희망 안에서 산다. 교회는 함께 분별하는 공동체로서 교회 안팎의 다양한 목소리들에 개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동등하게 교회 내부의 분열과 죄의 영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에 의해 계속적으로 갱신될 필요가 있다(요 16:8-11).
29.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이 비록 처음에는 내적, 개인적으로 시작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선교적 노력에서 우리를 외부로 인도해간다. 성령에 대한 전통적인 상징과 칭호(불, 빛, 이슬, 분출, 기름부음, 치유, 부드러운, 따뜻하게 함, 위안, 위로, 힘, 쉼, 씻음, 빛남 등)들은 성령이 우리의 삶과 친숙하며 선교와 관련된 모든 관계와 삶, 피조물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다양한 상황과 사건에로, 다른 이들과의 접촉점으로, 만남의 공간과 위급한 인간투쟁의 자리에로 이끌림받는다.
30.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주장은 우리만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가 안내하는 삶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교회로 하여금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관용, 충성, 절제를 수반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권고로 표현하였다(갈 5:23). 이러한 열매맺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들이 일하시는 성령의 깊은 사랑과 능력을 분별하기를 희망한다.?
31.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옳은 것을 확인하고 거짓과 악을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의 충만함이 긍정되는 곳마다 그리고 억압된 자들의 해방, 와해된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창조의 회복을 포함하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을 분별한다. 우리는 또한 사망의 세력과 생명의 파괴가 자행되는 모든 곳에서 악의 영들을 분별한다.
변혁적 영성
?32. 선교영성은 항상 변혁적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죽음의 정황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일깨우고 지탱하는 힘을 소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증언처럼,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눅 1:46-55). 세계제국주의 상황에서-특히 경제세계화의 패권적인 힘의 형태에서-이 자기비움의 영성은 체계적 폭력과 불의의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고무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위한 그의 투쟁에서 사도바울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고전 2:3-5) 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RSV)라고 선언한다. 교회의 선교는 무능한 자들에게 힘을 주고 유력한 자들이 무능한 자들을 위해 그들의 힘과 특권을 스스로 비우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33.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KJV)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세계자유시장 지배를 통한 무제한 성장정책은 가난한 자들과 자연에 끝없은 희생을 요구하는 대안없는 주장을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면서 우상숭배에 이르도록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며 부와 번영의 창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거짓된 약속이다.” 이것은 부와 힘을 가진 자들이 끝없는 착취를 통해 부의 무제한적인 성장을 사수하려는 맘몬의 세계적 체계이다. 이 탐욕의 탑은 하나님의 전(全) 가속을 위협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맘몬제국과 정반대로 대치한다.?34. 선교영성은 삶을 파괴시키는 모든 가치와 체제에 저항하고 변혁을 추구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실함과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시는 생명의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적 장악, 불의한 체제, 우리의 현세적 경제질서에서 착취,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게끔 한다. 경제와 경제정의는 그것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핵심을 건드리기 때문에 항상 믿음의 문제이다.” 선교영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과 재연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프리카적 개념인 Ubunthu는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으며, 내가 있기에 우리가 있다.” 또 한국의 상생(相生) 개념은 “함께 사는 삶”으로 하나님의 선교에서 우주적 비전의 유력한 예이다. 선교영성은 하나님의 생명 살림 선교에의 우리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것은 우리가 맘몬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의 경제를 섬기도록 자극하며, 개인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탁에서 삶을 나누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자기이익을 현상유지하는 것 대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35. 변혁은 부활의 신비의 빛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 2:11-12). 교회는 고난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도록 부름받았다. 억압, 차별과 상처받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드러나도록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36. 십자가의 빛에서 우리는 교회와 선교안에서의 힘의 오용과 우리의 잘못된 힘의 사용을 회개하도록 요청받는다. 더나아가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우리를 분열시키고 힘들게 하는 힘의 비대칭과 불균형으로 왜곡되었기에, 힘의 체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힘의 구조의 책임적 사용에 이르기까지 회개하도록 요청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그리스도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영접하고 힘을 주시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는 확실한 인식 안에서 한 몸의 구성원으로 사는 실제적인 길을 찾도록 부름받는다.
37. 진정한 기독교 증언은 우리가 선교에서 무엇을 하는가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교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이다. 단순한 선교전략을 넘어 우리는 선교영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영성은 우리의 삶에 깊은 의미를 주고 자극하며 동기를 주고 삶의 여정에 역동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삶을 위한 충만한 에너지로서 삶을 부인하고 파괴하며 위축시키는 모든 세력과 힘과 체제에 저항하도록 부른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돌보신다는 깊은 감각을 일깨운다. 선교는 삶을 긍정하고 돌보는 실천이며, 영성은 창조주가 주시는 신성한 은사로서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38.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선교하는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깊이 근거한 영성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성령의 변혁적인 현존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선교를 새롭게 구현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탐욕과 두려움에 지배되며 사망의 열매를 내는 파멸과 소외로 가득찬 활동중인 “영적 세력들”의 존재를 안다. 우리는 그들이 활동중인 곳마다 그리고 우리의 경제, 정치 심지어 교회들까지 사로잡고 있는 곳에서 그것들과 맞설 필요가 있다.
39. 성령안의 삶을 경험하는 것은 삶의 충만함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희망과 빛을 재생시키고, 파괴되고 손상된 것을 재창조하며, 성령이 계속 창조하시는 모든 것을 경축하면서, 절망과 근심의 강을 건너기 위해 손을 맞잡고 삶을 향한 운동을 증언하고 변호하도록 부름받았다(시 23, 사 43:1-5). 선교는 성령이 삶의 모든 차원에서 우리를 만나고 도전하며 새로움으로 데리고가서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행로의 시공을 변화시킨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세상의 소금 : 변두리로 부터의 선교?
40.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사랑과 지혜로서 창조하신 것들을 변혁을 통해 재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단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속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회복과 변혁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며 누룩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인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그들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증언하는 변화의 매개체가 되게 하셨다.(마태복음 5:13; 14; 13:33). 예수님은 온정주의적 자선행동이 아니라 존엄성과 함께 정의와 생명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보시고 사회의 변방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하심을 선택하심으로 이러한 변혁의 선교를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는 단지 인간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일뿐 아니라 찬사와 남용으로 표출되는 ?삶의 외연의 더 큰 단계들을 포함한다.?
41. 기독교 선교를 이해하는 이전의 방법들은 하나님의 이해로부터 기인한 선교를 인식하는데 실패하였기에 부적절하였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주변부로 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이 세상의 깨어짐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일하신다.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선교를 하나님께서 생명의 충만함이 모든 피조물에게 유용한 세상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일하시는 세상을 향해 바라시는 소명으로 단언하며 다시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정의와 주린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즉 그분은 갇힌자들을 자유케 하시며 눈 먼 자들을 보게 하사는 분이시다(누가복음 4:18). 주님은 짓밟힌 자들, 이방인들, 고아들과 과부들을 부양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42. “하나님은 가난한자들의 외침과 창조세계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명에 동참하도록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다(요한복음 10:10).”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부인하는 일체의 것들과 맞서며 변혁하고자 하는 시각을 가지고 그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껴안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부르심이다. 이러한 것들은 대량의 기근과 차별, 비인간화를 만들어내며 유지할 뿐 아니라 인간과 지구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화와 구조를 포함한다. 만약 이러한 갈망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들의 선교적 노력의 어떠한 진정성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주변부와 주변화인가??
43. 변방으로부터의 선교는 삶과 선교의 표현에 있어서의 불의와 맞선다. 이는 압제와 변방화, 변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존엄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선교적 접근과 활동들에 대항하여 대항문화적인 선교적 움직임이 되도록 그 방법을 추구한다. 선교는 오늘날 중심부에 있는 존재는 권리와 자유 그리고 긍정적이고 존경받는 자아를 형성하는 반면 변방에서 산다는 것은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여타의 체제들을 포함하여 존엄하고 고결한 삶, 충만한 삶과 온전한 정의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변두리에서의 삶은 그 자신 스스로의 교훈들을 제공할 수 있다. 규범으로 승인된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도외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수라는 위치는 변방에 사는 사람들과 특권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불의와 삶을 포기하게 하는 관행들에 대한 변혁을 위한 적절한 영감을 제공한다.
44. 선교활동의 수혜자들과 선교적 활동을 담당하는 수행자들의 상황은 선교의 범위와 특징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선교는 반드시 상황에 따라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지금까지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만들어왔고 계속해서 그 경험들을 형성하거나 그 형성을 방해하도록 하는 상황적 현실을 언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선교학적 반성들은 선교적 관점들을 형성하는 결과적 가치성향과 관점에 있어서의 차이점들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45.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선교에 대한 주된 표현들은 종종 사회의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왔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소외계층의 구성원들을 선교활동의 주체적 수행자가 아닌 수혜자로 전락시키는 관점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된 선교는 종종 억압과 삶을 비관하는 사회체계와 너무 지나치게 연관되어진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선교 중심부의 특권주의를 등에 업은 나머지 주로 일부 사람들을 변방의 늪으로 몰아넣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체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온정주의나 우월감에 의해 동기부여된 중심부로부터의 서구화로서의 선교는 기독교와 동일시되거나 기독교를 그 밑으로 두었고 결국 소외계층의 희생자들의 모든 인권이 무시당하는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
46.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 갖는 주된 관심은 ?우리 사회와 문화, 문명, 국가들 그리고 나아가 모든 사람을 위한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교회들의 실패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적 확신과 예수가 선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모두 동일하게 구속하였다는 그의 사역에 위배되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함이 소외와 억압, 인종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를 낳은 불평등의 뿌리가 된 것이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민수기 10:17-18) 말씀에 그의 ?본성과 주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선교활동은 피조물과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가치를 보장하여야 하는 것이다.(이사야 58장과 비교)
47. 소외 계층을 위한 선교는 하나님이 선교의 중심이라는 확신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어 창조와 구속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운행을 스스로 담당하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소외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잘 이해되어지고, 또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그 시대적 억압의 대가를 감수하심으로 못 박히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차별당하는 사람들과 주변화의 구조적 문제의 논쟁에 대한 의식적인 전략이 필요함을 말하여 준다.?
48. 소외를 당하여 본 모든 자들은 무엇이 삶을 확신하게 하고 그것을 부정하게 하며 무엇이 공동체에 유익하며 해가 되는지 그리고 무엇이 양질의 삶에 기여하며 그렇지 못한지를 알고 있다. 그들과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세력들의 실체를 밝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잡다한 관습에 얽매인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체계화한다. 그들 모두에게는 무력함에서 답습되어지는 특징이 있는데, 삶의 기회나 또는 정의로의 추구를 부정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평생의 투쟁을 통하여 약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들 스스로가 주체적인 소망을 품는 저수지와 집단적 저항 그리고 인내 그리고 약속된 하나님 통치에 순종할 필요가 있는 사명집단이고자 하는 바램을 갖는다.?
투쟁과 저항으로서의 선교
49. ‘하나님의 선교’의 확신은 시간과 상황의 확고한 관계를 기반으로 역사와 창조를 주관하시는 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암시하는 것인데, 그 분은 정의와 평화와 화해를 통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충만함을 추구하신다. 그러므로 해방과 화해라는 성령에 의해 행해지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착취하고 노예화하는 사단을 분별하고 그 실체를 밝히는 것임과 동시에 압제와 폭력과 학대와 파괴의 출처와 문화들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선교는 악마의 폐쇄된 카스트 제도와 같은 낡은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말하는데. 이는 그 사회적 악습에 경종을 울림으로서 그 사회의 희생자를 옹호하며; 토착민에게 자율결정권의 권리와 문화 표현의 자유 그리고 창조 중심의 영성과 제국주의의 죄를 인내하였던 패배자들을 위한 재건을 포함한다.
50.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의 약속된 충만함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이 표현이 종말론적 실체를 생각나게 할지라도, 이 말세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우리의 현세적 참여를 진실로 북돋우며 일깨워준다.
5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이 결코 사회-정치적 집권에서 발견되는 지도력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고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나와 있듯이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려 오신 예수를 따르는 길임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복음 1장 46-55절에서 말하는 예수가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낮추고 낮은 자들을 높이신다는 고백으로 그의 사랑이 상호관계와 상호의존과 상호존중의 특징이 있음을 보인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피조물 모두를 위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세상 권력에 대한 투쟁과 저항을 위한 헌신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기독교 지형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정의와 존엄과 생명을 생성하는 데 일조하는 운동과 권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치유와 온전함으로서의 선교?
52.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선교에 속한다는 것은 치유와 모든 생명체의 온전성을 증진하는 것이다. ?치유는 예수의 사역의 주된 양상일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을 계승하도록 하는 그의 부르심의 특징이기도 하다(마10:1). 치유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 중에 하나이다(고전 12:9, 행3).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교회에게 살리는 선교를 행하게 하는데, 이는 기도와 목회자의 돌봄, 전문적 치료, 고난의 원인에 대한 예언적 충고, 그리고 과학적 연구의 추구 등의 총체적 치유의 모든 면들을 포함한다.
53. 건강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 풍요를 넘어서는 것이며, 치유는 일차적인 의학적 치료가 아니다. 건강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성서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한 인간을 다양한 영역에서 하나이며 몸과 혼과 마음이 상호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인 생명력을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은 한 개인이나 전 인격체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생태학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고난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와 ?하나님 은혜의 능력으로 증거하는 것을 실제화 하신다.
54. 온전함이라는 의미에서의 건강이란 현재의 실질적인 가능성 뿐 만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온전함이란 조화에 대한 굳건한 균형보다는 하나님과 사람들 그리고 창조물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개인주의나 불의는 공동체 형성 곧 전체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에이즈 바이러스나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포함하는, 의학적 상태나 장애에 판단기준을 두는 편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각 개인을 느낄 때마다, 잊었던 우리 개인과 협동체 삶의 모든 부분들이 다시 되살아나고,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던 자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마다, 우리는 땅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을 볼 수 있다.
55. 사회는 장애나 질병을 죄의 결과나 해결되어야 할 의학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의학적 관점은 한 개인의 결점으로 추정되는 것에 대한 교정과 치료를 강조한다. 그러나 소외당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결점이 있는 자나 병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이 각종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고치는 많은 예들을 드는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공동체의 조직 안에서 적재적소로 회복시켜 복귀시킨다는 것이다. 치유가 결점으로 인식되는 무엇인가를 고치는 차원을 넘어 전인격적인 회복을 가리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나뉜 부분들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치유자체에 대한 집착은 성경적 강조점을 증진시키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선교는 교회와 사회의 삶에서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전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야한다.
56. 치유는 전체 공동체의 선과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녀노소 모두는 어떤 차별도 없이 최고수준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건강이 인간의 누려야 할 권리가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 중 다수가 그러한 권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 의료선교는 지구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질높은 건강관리에 접근하는 의미에서 모두를 위한 건강을 추구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단체적 봉사를 통해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대중들을 돕거나 상담서비스나 의료봉사단과 보건 프로그램의 제공 뿐 아니라 의료관련 직업들과 진료소 그리고 선교의 목적으로 세워진 병원들을 만들어내고 지원하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러한 목표에 기여할 것이다.
57. 넓은 의미에서 보면 보건과 치료를 위해서 교회들이 참여할 수 있거나 참여하고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치료의 과정들에는 예배, 성찬, 병든 자들을 위한 기도, 회개와 용서, 안수, 기름을 바름,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고전 12). 그러나 치료하는 사람이 하나님 대신에 영광을 받는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치유집회를 포함하는 기독교예배의 부적절한 형태들에는 주의를 귀울여야만 하며 이런 것들은 잘못된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의 개입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치유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문제나 고통이 없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집단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는 서로의 많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동정심과 사랑, 소망을 가지고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로 고통속에서 신음하는 창조세계의 일부로 ?해방을 갈망하며, 기독교공동체는 희망의 표지가 되며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다(로마서 8:22-24).
공평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
58. 포용성은 기독교 초기부터 나타난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세례는 배타와 분리를 촉진하는 문화적 장벽들이 허물어졌음을 의미하였다(갈 3:27-28). 복음은 외국인 혐오증, 인종주의, 계급주의, 카스트주의(castism), 성차별, 장애인차별, 노인차별과 종교와 성적성향, 언어, 신체장애, 무능력과 같은 환경 에 처한 사람들이나 에이즈 양성반응의 의학적 상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는, 배제하는 것보다는 포용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가 된다. 포용성은 인간 개개인과 피조물에 대한 상호인식과 각자의 신성한 가치에 대한 상호 존중과 유지 속에서 인류와 피조물의 공동체 안에서의 바른 관계를 촉진시킨다. 이러한 포용성은 또한 각자가 공동체의 생활속으로 깊숙한 참여를 돕는 역할을 한다.
59. 우리가 ?돌보는 작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버림을 받은 자들의 범위까지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현존을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속에서 소외되어 버린 사람들에 대한 극단적인 접대를 실천하는 범위까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가치를 구현하는 우리의 헌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스스로 버리는 만큼만 우리는 ?우리의 존재속에 스며든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상호작용들과 경제적, 정치적, 사회체제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이고 영적인 나타남 속에서의 폭력을 단념하는 범위만큼 우리는 세상의 사건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60. 선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에게 특정한 기대를 갖도록 한다. 교회는 변방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충분한 참여를 확실하게 한다는 사실을 단언하게 하는 포용성이 있는 기관이다. 교회는 복음전파의 장소일 뿐 아니라 복음이 구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삶을 긍정하는 오늘날의 계획을 구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또한 교회는 공동체의 파괴를 야기하는 가치들과 관습들을 거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차별의 형태들의 죄악된 본성을 인식하고 불공평한 구조들을 개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는 대항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역할은 하지 않고 대신 교회의 지위에 압제하는 권력들을 숨겨주는 일을 거부해야만 한다. 신구약성경속에서 언약공동체에 주시는 성서적 지상명령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마태복음 20:26)라는 명령으로 특징지어진다.
61. 언약공동체의 내적인 삶의 윤리적 진실성은 교회는 중요한 선교적 표현 즉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살아있는 증언이라는 사실을 요청해왔다. 기독교인의 삶은 회심(메타노이아)에 기초한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해야 하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죄악성의 조건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는 교회의 침묵과 억압하는 구조에 동참한 죄를 회개하도록 부름받았고, 과거의 죄악들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보상과 정의와 화해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전을 받아왔다. 이러한 사실은 압제로 인한 희생자들과 가해자들 모두에게 치유와 변혁을 가져오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
6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겔47:12) 에스겔 선지자는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강해지도록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공동체를 치유하고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적 정체성들의 과도한 주장과 박해에 의해 위압당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복음과 삶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한 부르심,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것을 향한 하나님이 의도하는 방법을 우리는 어떻게 재상상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치유하고,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물과 같이 복음이 흘러가기 위해서 장애물이 아닌 통로가 되기 위해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화를 위한 부르심
63.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복음이라고 믿는다. 증거(Martyria)는 온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온전한 복음의 소통인 전도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 자체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한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과 부활의 명확하고 분명한 중심인 선교활동이다. 그것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의 경험으로 그들을 초대하는 것이다.?64. 반면에 “전도”는 선교의 다른 차원을 배제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과 개인적인 회심과 제자도로의 초대를 포함한 복음의 명확하고 의도적인 표현이다.
65. 성령님이 어떤 이를 전도자로 부르시는 반면에(엡4:11) 우리 모두는 우리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나누도록 부르셨다.(벧전3:15). 개인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복음화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마16;15; 벧전2:9). 교회가 말로나 행위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복음화를 멈출 때 , 세상에서 존재하는 그 자체의 우선적 이유를 잃게 된다.
66. “전도는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의 넘쳐남이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행2:4;4:20).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충만과 “너는 나의 증인들”이라는 말씀을 복종해야할 명령이 아니라 약속의 충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
67. 전도는 개종이 아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설교와 좋은 소식을 나타내는데 함께 동역하신다.(참조 롬10:14-15,; 고후4:2-6), 하지만 새 생명을 창조하고 거듭남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시다.(요3:5-8;살전1:4-6). 한편, 전도는 하나님의 사역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들에게 인간적인 행동이나 강한 압력을 준다고 생각함으로 우리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복음이 왜곡되고 그 자체의 신뢰성이 잃어버린 때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기독교인은 폭력의 수단 또는 권력의 남용에 의해 “개종”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는 강압적인 개종에 대한 비난은 지배적인 집단들이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억압된 정체성과 비인간적인 조건들 가운데 사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
68. 전도는 다른 사람과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나누는 것이고, 그들이 다른 종교적 전통에 집착하든지 아니든지 그들을 제자도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이 확신과 겸손으로 우리의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 급박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우리의 이웃에게 나누거나 소개하는 것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은 없다.?
69. 전도는 회개와 믿음과 세례로 이끈다. 죄와 마귀에 맞서 진리를 듣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응답을 요구한다.(요4:28-29, 참조 막10:22). 그것은 태도와 우선순위와 목적의 변화와 관련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 결과는 잃어버린 자의 구원, 병의 치유와 억압받는 자와 모든 창조물의 해방이다.
진정한 전도
70.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은혜, 사랑, 심판의 메시지를 가지는 복음은 반드시 언제나 사랑과 진리 그리고 연민가운데 선포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을 확장하기 위한 전도는 영적이며, 생명을 주는 행위이다.71. 전도는 말씀과 행위 모두에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구술적 선포 또는 복음의 설교를 통한 복음화는 성경적으로 심오하다. 예수님은 매우 뛰어난 언변가였으며 베드로와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00년 넘게 예수님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좋은 소식은 전해지고 또 전해졌으며 세계의 모든 영역의 대부분의 언어들로 해석되어지고 번역되어졌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언어들이 우리의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전도는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구술적 선포와 시각적 행동의 조합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증인을 낳는다.?
72.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복음 선포의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요1:1,14; 히1:1-4)이며 “그가 우리 가운데 은혜와 진리로 충만히 살아계심”(요1:14)을 확신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이 사랑을 위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전도의 많은 방법들과 실천들이 복음을 성육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전도는 겸손히 행해지지 않은 행동과 복음을 듣는 자들을 향해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정치적 목적 또는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오용된 복음의 원인이 되는 악함에 대한 회개에서 시작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마22:34-40; 요14;15).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은 다른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확언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미끼나 어떤 미혹을 제공함이 없이 인간존엄을 온전히 존중하며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이를 섬기고 섬김의 실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참조 막 10:45; 마 25:45)
73. 진정한 전도는 겸손과 모든 사람을 존중함에 근거하고 대화의 상황을 풍성하게 한다. 그것은 말과 행동에서 복음의 메시지,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증진시킨다. “연대가 없는 전도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오실 통치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과 관련되지 않는 기독교 연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람 사이에 그리고 공동체 관계성을 세우는 것에 영감을 준다.?
74.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에로의 초대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하나님의 화해와 회복과 치유를 증거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치유와 회복을 갈망하는 깨어진 세계에 이런 치유의 메시지를 가져온다. 진정한 전도는 사회에서 정의와 인권에 대한 성서적 부르심에 대한 메아리이며 또한 모든 인간과 창조물에 대해 사랑이다. 진정한 전도는 약화되고 주변화된 사람들뿐만아니라 권력자들, 정치가들과 경제구조에도 전하는 것이다.?
75. ?그것이 행해지는 어떤 형태에서든지 진정한 전도는 가치를 확언하는 생명에 의해 처리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1) 폭력과 차별의 모든 형태와 심리학적 또는 사회학적 권력의 남용을 포함한 세속적 권위에 의한 억압에 대한 거부?(2) 종교의 자유를 실천하고 보복이나 협박의 두려움 없는 믿음을 확언하는 것. 상호적인 존중과 정의와 평화 그리고 모든 것의 공통의 선을 증진시키는 연합.(3) 모든 사람과 인간문화에 대한 배려, 또한, ?우리 문화 안에서 인식되어지는 요소들을 분별하는 것, 예를 들어 가부장, 인종차별, 카스트제도 등의 것들은 복음의 도전이 필요한 것들이다.(4) 상호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위해 잘못된 증언과 경청의 거부.(5) 의사결정의 부분으로 사람들이나 공동체에 의한 계속적인 분별을 위한 자유를 확언하는 것?(6) 공공의 선을 위해 깊은 상호적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믿지 않는 사람이나 타종교인들과 관계를 세우는 것.
전도, 타종교간의 대화와 기독교적 현존
76. 선교에서 우리는 순례를 하면서, ?많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 이데올로기, 확신과 대화 속에서 그들과 관련을 맺게 된다. 대화는 우리의 일반적 삶을 확언하는 길이며 생명의 확증과 창조의 온전함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진다. 대화는 우리의 앞에 가셨으며 사람들의 문화적 상황과 확신안에서 관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대로 시작한다면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기전에 거기 계시며(행17)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대화는 정직한 만남을 위해 개방, 인내와 배려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테이블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77. 전도와 대화는 분리가 아닌 상호관계적인 것이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있는 지식으로 오기를 소망하고 기도할지라도, 전도는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대화는 역시 “상호적인 헌신의 만남”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것이 그 안에 적절하게 위치하게 된다. 더욱이 진정한 전도는 삶의 대화의 상황과 행동 그리고 “대화의 정신” 즉 “배려와 존중과 우정의 태도” 안에 있다. 전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확신의 필연적 선포일 뿐만 아니라 타자의 경청과 관련있는 것이며 타자에 의해 풍성케 되고 도전되어지는 것이다.(행10장). 인간으로서 타자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없는 전도는 그저 잡답 또는 소음이 된다. 이웃의 현존을 자각함이 없이 전도의 가치는 없어진다.(고전 13:1)
78. 우리는 특별히 다른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 대화의 중요성을 확인한다. 이것은 다종교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류의 특정한 신앙공동체에게도 중요하다. 이것은 소수집단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와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위한 헌신하도록 하는데 필수적이다. 종교적 자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의 인간의 창조에 근거하는 인간의 존엄성의 본질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지지되어야 한다.(창1:26). 모든 종교와 믿음을 추종하는 자들은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가졌다.?
79. 전도는 연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의 표현이다. (요13:34-35) 반면 분열은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다.(고전 1). 대화는 성령안에서 양육하는 태도와 존중, 신뢰, 더 큰 공동목표에 근거한 관계에 의해 복음의 목적에 기여한다. ??
80. 모든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예수님을 나타냄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의 부르심을 받았다(마 5:13-16). ?때때로 침묵은 은둔적인 삶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증거의 강력한 형태이다. 기독교 증거는 언행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자신 생명의 위협이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단지 복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도, 예언과 선포
81. 우리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물질주의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도전하는 다른 사상들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비록 복음이 긍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그것은 거짓과 불의와 억압을 조장하는 세력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복음을 확장하기 위해 전도는 예언적 소명인데 그것은 소망과 사랑 안에 능력을 향한 진리를 외치는 것이다.(행26:25; 골1:5; 엡4:15) 복음은 해방적이고 변혁적이며 의롭고 포용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관점에서 문화의 변혁을 포함하는 선포이다.
82. 악과 불의에 대해 맞서는 것과 선지자적 존재는 때때로 고통과 폭력을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고통과 억압 그리고 심지어 죽음으로 이끈다. 진정한 전도는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연약함을 포함한다. (빌2:5-11). 순교자의 피가 로마 박해아래 교회의 씨앗이 된 것같이 오늘날 정의와 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강력한 증인을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자기부인과 영원한 구원을 결부시킨다.(막 8:34-38)
83. 복음은 세속주의에서는 다소 모호한 것처럼 보인다. 유다-기독교 종교에 의한 영향으로 전도의 많은 형태들이 세속과 삶의 실존적 현실로부터 영적인 것을 분리하는 표현들을 발견된다. 그러나 성서적 증인들이 “예배는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행위”라고 주장하듯이 오늘날 복된 소식의 설교는 힘과 부의 우상, 소비주의와 생명을 거부하는 힘을 고발해야만 한다. 복음의 선포는 그것이 어떤 경험주의적 과학의 방법들과 분석적 도구들을 차용한 사람들의 영적세계와 초월적인 삶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거부할 때 세속주의에 도전을 준다.
전도와 문화
84. 전도의 현재적 상황은 많은 문화들이 서로 서로 중첩되고, 상호작용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복음은 특수한 문화, 정치 그리고 종교적 현실과 연계된 여러 다른 상황에 뿌리를 내린다. 사람과 그들의 문화와 상징적 삶의 세계에 대한 고려는 복음의 더 좋은 수용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또는 “특별한 공동체 또는 문화에 말씀이 구현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복음의 근원과 영감은 성육신의 신비 안에 있다.” 동서남북 어느 곳에든지 복음은 표현되어진다. 그것은 특별한 상황 안에서 특별한 사람과 창조를 다루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인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85. 선교역사 가운데서 식민지적 힘과 전도의 결탁은 서구적 기독교의 형식은 다른 이들이 따라야하는 표준으로 간주되어지는 전제를 낳았다. 경제적 권력이나 문화적 헤게모니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한 전도는 복음의 왜곡의 위험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반드시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소수자들과 협력을 구해야하고 그들의 신학적인 자료와 비전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86. 때때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들의 복음적 사역의 결과를 조정하기 위한 충동을 받는다. 이것은 그들의 교회와 결과적으로 그들의 힘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그들의 강제적인 시도로 비쳐질 수 있다. 또는 어떤 사람을 복음화하기 꺼리는데 특히 다른 민족적 배경으로부터 온 사람들, 가난한 자들과 주변부에 있는 자들이다. 이는 그런 선택이 기존의 권력구조와 회중 안에 있는 현상유지에 지각변동을 초래할 것이라는 위협의 두려움에 기인한다.?
87.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만의 왕국, 우리 자신만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독립이라는 협소한 관심에서 나오도록 부르셨다.(행1:6) 성령님은 우리에게 더 큰 비전을 보여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유와 평화의 시간과 공간의 각 상황 안에서 증인으로서 “땅끝까지” 가라 하셨다. 우리에게 위임된 복음사역은 우리자신이나 우리의 교회보다는 예수께 모든 초점이 맞추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것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여야 한다. (참조 빌2:3-4)
88. 획일성의 강요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형상 안에서 창조되어진 각 개인의 유일함을 실추시키게 된다. 바벨은 획일성을 강요하기 위한 시도인데 반해서 오순절날 제자들의 설교는 개인적인 개별성 안에서 연합을 이루었고 공동체의 정체성은 손상되지 않고 존중되었다. 즉 모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되었다.
변화의 바람: 움직이는(전진하는/활동하는) 교회
89. 우리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성령으로서 역동적인 거룩한 삶을 보여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Deus caritas est, 요한일서 4:8). 선교는 창조와 구속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초대하였다” (Caritas Christi urget nos). 이러한 교제 (Koinonia)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눈다는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안에 녹아있다 (고후 5:18-21). 이 사랑 안에 살아가고 있기에 교회는 이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첫번째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더불어 그의 답례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존재 그 자체로 또한, 궁극적인 목표로서 교회는 화해와 정의, 평화 안에서 모든 인류와 창조물에게 생명의 풍성함을 제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나눔은 선교와 전도의 근원이 된다.
90. 성령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시간과 장소 속에서” 그리고 모든 문화와 상황에 적합한 영감을 주는 선물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강한 임재하심은 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생명의 풍성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성령은 그것을 증거하는데 우리들보다 앞서가신다. 이 모든 사실은 교회의 선교 활동보다 앞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고,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세상에 그의 증인으로 보내셨다 (요 20:19-23).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위한 그의 목적들을 드러내 보이시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그의 목적들이 실현되는 것에 참여하도록 능력을 더해 주시고 가능하게 하시는 모습으로 교회에 내재하신다. 교회가 그 원천으로부터 방향을 분별하고 힘을 끌어낼 때, 교회는 창조물이 번성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과 가능성들을 불러오는 변화의 바람이 된다.
세계 기독교 환경의 변화
91.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교회가 속해있는 오늘날의 세계 기독교의 환경은 지난 1세기 전의 모습과는 눈에 띄게 다르다. 한 예로 기독교의 세계 인구 통계의 의미 있는 변화를 들 수 있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세계 선교대회는 서방의 기독교 문명이 짧은 미래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독교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권한과 방법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낙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남반구나 동반구에 살고 있거나 그 곳 출신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세계 종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대는 어느 정도 실현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우리가 이전에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던 나라는 눈에 띄는 쇠퇴를 보여주고, 이제는 재복음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92. 생계를 위하여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사람들이 이동하게 되는 이민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국수주의적인 태도와 인종차별의 아집과 결부된 우익 보수진영의 발생은 이민자들에게 적의를 갖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여자들과 아이들, 불법 체류 근로자들은 모든 이민자들 중에서 가장 약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민은 또한 기독교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이민자 기독교인이 다른 사회에 정착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주류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이민자 공동체에게 도전이 된다. 이민자 공동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역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혹은 “이민” 교회 혹은 “다문화” 교회들과 같은 새로운 조직이나 모임을 만들 수도 있다. 기존 공동체는 이민자와 이주자들과 관계를 맺고 상호문화적 사역에 적합한 형식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새로운 교회의 선물이자 도전은 선교와 전도, 그리고 교회됨에 새로운 모습을 요구한다. 또한 어떤 형태의 협력과 어떤 종류의 상호문화적인 교회적 관계와 구조가 그러한 적합한지에 대한 고민이 요구된다.
93. 선교적 관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또 다른 현상은 강력한 오순절과 성령운동 형태의 기독교의 등장이다. 이미 세워져있던 전통적인 교회들 내에서 오순절 운동과 성령운동단체들의 급격한 성장은 강한 선교의 열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북/서방의 교회가 활기를 잃어버린 곳에서 번성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공동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의 선교 활동은 종종 규모가 큰 민중 운동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남반구부터 시작된 몇몇의 오순절 운동은 자신의 지역 뿐 아니라 북반구를 전도함으로 전통적인 선교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전도 활동은 특별히 한 교회가 다른 교회의 손실가운데 성장할 때, 다른 교회들 사이에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는 기독교 종파의 수에 전례없는 성장을 이끌어왔다. 세계 기독교의 다양성은 오늘날 연합하여 선교할 때 중요한 도전이 된다.
94. 기독교 선교라는 이름 아래 개인과 모임, 조직들의 활동은 꾸준히 다양해지고있고, 그 수의 증가는 교회에 의해 후원되어지는 선교 사역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의 대부분이 선교의 시작과 독창성의 표현인 반면에, 그런 종류의 선교단체 활동이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더 넓은 교회 공동체와 교회에 대한 책임을지지 않을 때 어려움들이 생겨난다. 선교 활동의 새로운 형태 중에 단기 “선교 여행”은 세상의 다른 곳에 있는 교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을 가난한 지역 교회들에게 주게 되거나 기존교회를 모두 경시하게 되기도 한다. 과제는 모든 부분에서 전체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 것이다. (고전 12-14)
95. 오늘날 세계 속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은 이 세상이 성령에 이끌리는 더 나은 곳이 되게 하기 위한 바람(wind)이 되도록 교회를 부른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모습(re-imagination)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교회가 새롭게 성육화되어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별히,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가지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주류나 소외계층을 넘어 남반구 교회의 목소리와 의제가 국제 선교나 전 기독교 협력 단체의 구조 안에서 충분히 인식되어지지 않고 있다.
겸손과 존중 안에서 선교
96.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제자로서 우리는 겸손한 섬김과 단결, 사랑,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인간과 창조물을 포용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복음을 증거함으로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서 살아나신 부활의 주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결말에까지 이르셔야했던 성육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우신” (빌 2:7)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힘이나 재물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을 비우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겸허한 이해는 단순히 우리의 방법을 구체화시키진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자 진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선교적 교회는 자신을 비운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97. 기독교 증언은 생명을 잉태하는 부활의 메시지를 통하여 섬김과 교제, 선포 안에서 하나님과 모든 창조물과 함께 교제하게 하는 초청장이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예배와 예전 안에서, 영적이고 거룩한 삶 속에서, 사회 활동 중에서, 모든 인류와 창조된 모든 세계와의 연합 속에서,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중에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은 예전이 교회의 선교의 근원이자 시작점이 되게 한다. 교회는 예배와 기도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자신의 강점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전은 선교를 위한 출발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현현과 모든 세상을 위한 봉헌과 감사의 표현이다.?
98. 어떤 선교운동은 승리주의라는 유혹의 희생물이 되어왔다. 21세기의 선교는 겸손함 안에서 공동증거를 통해 “승리자”와 “정복자”라는 모습을 극복해야한다. 진실된 증인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모든 것이 그들에게 속해있다는 선교정신을 전제한다. 진실된 증인은 세계의 기독교인의 수적 성장만을 위한 확장주의적인 수단 혹은 경쟁적인 태도와 양립할 수 없다.
99. “기독교의 사랑의 영을 부인하고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며 교회의 기독교 증인 안에 있는 믿음을 작게 만드는” 방법과 수단을 통하여 그들의 특정 교파에 대한 헌신을 바꾸려고 하는 이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의 유혹은 그리스도로의 진실된 개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라는 책무를 포용하고 따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류애의 초석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속박, 죽음이라는 인간의 최후의 속박으로부터 모든 창조물들을 자유케하셨다.?
100. 우리는 무한 성장과 다른 사람과 적대하며 그들을 이겨야하고 그들과의 경쟁하는 모습을 갖도록 촉구하는 자유시장의 고도로 경쟁해야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많은 교회들과 선교단체 운동의 선교적 관점에도 역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옛 “고객”들을 잘 지키면서 새로운 고객을 모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과 상황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에 근거한다기보다 개종한 사람들과 교회의 수적 성장에 근거하여 선교의 성장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선교 안에서 교회를 움직이신다.
101. 하나님의 선교(missioDei)는 교회의 근원이자 기초이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과 같다. 이 하나님은 온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시고, 우리를 그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그의 형상을 따라 모든 인류를 지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구원의 역사의 계획을 성취하기위해 아들을 보내셨다.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깨우치고, 선교적 사명을 위해 필요한 능력을 ?주시기 위해 성령이 보내심을 받았다. 이러한 거룩한 삼위일체안의 역동적인 교회는 교회의 연합의 근간이 된다.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세 인격이 그 안에서 하나의 하나님으로 내적으로 연합하신 것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또한 다른 이들과 교제를 경험하도록 초청하는데 있다.?
102.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교회의 참여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라는 배경 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선교학적 관점에서 역사 속에서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선교를 위해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와 선교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의 기원과 목적에만 근거하여 교회와 선교를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의 선교적인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왜냐하면 선교 안에서 교회에 능력을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의 생명과 같은 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상에 보내실 때 성령을 교회에 불어넣어주셨다 (요 20:19-23). 그러므로 마치 불이 연소됨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에 의해 존재한다. 만약에 교회가 선교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되기를 멈추는 것이다.??
103. 하나님의 선교와 함께 시작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교회론적 접근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귀납적인, 교회 신학의 환경적인 이해, 세계 기독교의 환경의 변화와 교회적 현상에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고무한다. 이러한 접근 안에서 교회가 선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선교가 교회를 가지고 있다고 보게 된다. 선교는 교회를 확장하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체화 하려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교회의 사도적 성격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가 따라오는데, 사도적 성격이라는 것은 대대로 걸친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려는 것 뿐 아니라 사도직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로 그리고 첫째로 선교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4. 신학적으로 또한 실질적으로 교회와 선교가 연합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1961년에 이루어졌던 IMC 와 WCC의 연합은 이 방향에서 의미있는 일보였다. 이 역사적인 경험은 우리가 선교와 교회는 함께 가야한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하였다. 그러나 이 목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교회가 진정한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며 우리 세대에 이 여정을 계속해야한다.
105. 교회의 선교적 본질은 교회와 선교단체 구조가 더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선교단체 구조들은 필연적으로 선교를 추구함으로 교회에 정착되어졌고, 이것은 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었다. 이에 더해서 교회들은 선교단체의 사역이 가능하도록 도와주고 책임을 제공함으로 그들의 구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선교단체 구조는 교회가 그들의 역동적인 사도적 특성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IMC와 WCC의 연합은 교회 연합과 선교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들여왔다. 그러나 일치와 관련된 토론은 구조적인 질문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에 선교단체 (mission agencies)들은 선교에 있어서의 융통성과 보완성을 진술한다.
106. 교회는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선교를 충분히 구체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날 인식했다. 때때로 여전히 선교와 교회를 분리하는 생각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교 안에서 완전하고 실제적인 연합의 결핍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의 실현에 대한 신뢰성과 진실성을 해치고 있다. 우리 주님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와 일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결과적으로 교회와 일치에 관한 우리의 사상을 더 넓은 의미의 일치, 즉 가난하고 빈곤한 이들과의 일치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와의 우주적 일치까지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양성 안에서의 공동증언
107. 선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하는 여정 중에 주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교는 “타자”를 선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상”이 아닌 동료로 만든다. ?기독교 증거가 주어지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동료로 여기게 한다. 그들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라는 성경적 진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 경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해 성령 사역의 실현을 돕는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풍성함을 소중이 여긴다. 기독교 증거의 많은 형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선포를 구하지만, 반면 이것이 모든 창조물 도처에 하나님의 영이 역동적으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된다.?
108.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선교에 동참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조직화 되었던지 비공식적인 모임이든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됨 없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모이기를 권하라” (히 10:25). 그리고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포괄적인 공동체이다. 말씀과 행위, 그리고 그것의 존재 자체를 통하여 교회는 하나님이 오셔서 다스릴 비전을 미리 맛보고 증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신실한 자들의 함께나옴 (coming together)이고 평화로 나아감 (going forth)이다.?
109. 일반적으로 이 세상 그리고 특별하게 인류가 역사적이고 다양한 문화의 배경 안에서 표현되어진 다양하고 상호보완적인 많은 다양한 선물들로 축복 받았을때, 이러한 색깔이나 다양성이 분열인 적개심이 아닌 상호의존과 화합으로 인도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110. 사람들의 다양성 안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협동과 협력의 영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전도의 모습을 통하여 공동 증거의 방법을 밝히고 실행하도록 부름받았다. 공동 증언은 교회가 심지어 분리되어 있을 동안에라도, 특별히 협력을 통해, 그들이 이미 공통으로 나누고 경험한 진리와 생명의 신령한 선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교회가 그것을 함께 품는 것이다.??
111. 겸손을 갖춘 섬김은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선교의 역사 가운데 선교 완수의 영광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돌아가는 동안, 낯선 사람에 의해 전달된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토착민들의 환대는 무시되어져왔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환대가 어떻게 행해졌었는지, 특별히 다종교와 다문화 배경에서 공동증언이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112. 신앙의 공동체로서 우리는 교회가 이민이라는 미사여구(rhetoric)를 재구성하고 사람들을 떠나게 한 원인들을 밝혀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 스스로 개방하여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던 교회들과 공동체들은 격려와 후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포괄적이고 협력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선교와 세계교회주의 (ecumenism)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는 말씀을 들어보았다. 기존 교회와 선교 단체가 이민 공동체에게 자신들의 삶, 계획, 사역 안에서 동반자로서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하는 것은 필연적 명령이다. 교회는 인종과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기 위해 하나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다양성 안에서 공동 증거의 실제적인 표현 방식으로써 다문화 사역과 선교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113. CWME의 기본 구조 안에서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선교 안에서 연합을 표현하고 강화하는 방법들을 찾는 조직들을 가지고 있다. ?CWME는 선교 안에서의 연합에 대한 추구를 촉진하기 위한 1910년 에딘버러에서 이루어졌던 발의권의 직계 상속자이다. WCC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CWME는 새로운 선교의 이해와 그리스 정교회, 영국 성공회, 개신교, 복음주의, 오순절, 그리고 지구촌의 모든 원주민 교회의 연합을 경험할 수 있었다. WCC의 상황은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가까이 일할 수있는 관계를 만들어주었다.?
114. 복음주의진영에서의 협력의 고양, 특별히 2010 에딘버러 백주년 프로젝트에서 주최측을 대표했던 WEM과 로잔위원회는 일치가운데에서의 선교에 대한 에큐메니칼 신학적 숙고를 풍성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비록 일치가운데서의 선교에 대한 우리의 접근들이 ?다른 초점을 가지고 있지만 CWME가 복음주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구성원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함께 전도에 관한 공통 관심사를 나누고 모든 교회는 온누리에 온전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115. 일치의 영인 성령은 다양성 안에서의 연합을 주도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인 측면에서 기뻐하기 위해 사람들과 교회들을 연합시킨다. 성령은 다름의 문제를 다양성을 기뻐해야하는 이유로 바꾸셨다. 성령은 사람들이 포괄적이고 상호간에 책임있는 공동체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기위해 안전하고 긍정적이며 배양하는 환경 안에서 다름을 탐색하도록 역동적인 환경과 필요한 재료를 공급한다.
선교라는 교회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116. 교회 역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해치는 분열과 배척으로 오점이 남겨져있다.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의 일원에게 능력을 주시고 활기를 북돋우시며 교회에 내재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삶의 완전함을 나누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뿌리 깊은 요구에 기인한, 그리스도 안의 진실된 삶을 위한 시험과 기준, 기독교인들을 위한 긴급한 내적 충동(고전 9:16)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특정한 개인들이나 특별한 모임에게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기도 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오늘날에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을때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도 가득차게 한다. ?
117. 인류와 모든 창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담은 기독교의 메세지를 신자와 다른 종교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은 한 목소리로 우리 안에 있는 희망(벧전 3:15)에 관해 말하며 공동 증거를 하는 것이다. ?만약에 기독교인들이 그들과 다른 공동체와 문화들 사이에서 그들이 선포하는 것을 행하고 자신들 사이에서 연합을 실천한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 길잡이가 될 것이고 다른 종교의 신자들에게는 모범이 될 것이다 (요 13:35). 동시에 종교의 자유에 대한 약속은 전 기독교적인 행위들과 다른 신앙과의 관계 안에서 신뢰성을 쌓아나가는 열쇠를 제공한다.??
118. 모든 사람으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교회는 연합중인 교회와 연합된 교회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 풍부한 공동 선언문 그리고 치유와 화해의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 안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연합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화를 만들어내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으로서의 치유와 화해는 자기 자신과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모든 창조물들과의 치유와 화해의 근원이다. 오늘날의 선교 신학의 중심에 있는 치유와 화해를 통한 성령의 사역의 재발견은 세계교회주의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19.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구조적 연합을 향한 노력과 연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연합은 조직의 구조의 단계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역시 언급되어져야한다. 선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하나님의 선교의 동인을 도울 수 있도록 분별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선교 안에서의 연합은 교회의 구조적 연합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연합을 위한 시도는 때때로 침묵하고 압제하는 잘못된 연합을 깨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정의를 추구하는 성경적 부르심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120.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갈구하는 깨어진 세상에게 치유의 메세지를 가져다준다.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치유를 가져다주기 위해 교회는 첫째로 하나님의 치유와 능력과 은혜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치유와 회복의 사역의 신뢰성은 생명의 부활의 진술, 즉 회복되어진 완전함과 그 안에 있는 연합에 근거한다. ?
생명의 축제 : 결론적 확언?
121. 우리는 ?창조세계 모든 사람들 특별히 생명의 온전성을 바라며 압제당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할 사명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공동증거하는 것으로서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눅 14:15)로의 초대이다. 교회의 선교는 잔치를 준비하여 사람들 특히, “가난한 자, 불구자, 눈먼 자, 그리고 저는 자”들을 생명의 축제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 축제는 창조와 풍성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결실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의 목표인 전 창조세계의 회복과 해방의 표지이다.?
122.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이 생명의 풍성함(요 10:10)이며 이것이 선교를 분별하는 기준임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압제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해방과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과 전 창조세계의 회복의 견지에서 풍성한 생명으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을 구별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다른 문화 가운데 현존하는 생명을 긍정하는 영에 감사하고 생명을 긍정하고 보존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또한, 우리는 어디에서 죽음의 힘과 생명을 거부하는 악한 영을 ?만나든지 간에 그것을 분별하고 맞선다. ?
123. 우리는 선교가 성령께서 주시는 생동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행동과 함께 시작되고 재창조 가운데 지속되는 것을 확언한다.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부어진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끔 하였다.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성령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어 자기를 비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하고, 말씀과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한다. 진리의 영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고,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세력과 대항하며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구속받은 공동체로서 우리는 생명의 생수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전 창조세계를 치유하고 화목하게 하고 갱신하는 일치의 영을 추구한다.?
124. 우리는 영성이 선교의 동력의 근원이며 성령안에서의 선교는 변혁적인 것임을 확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와 영성과 창조사이의 우리의 관점을 재조정하려고 한다. 예전과 예배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교적 영성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또한 창조물들과 연결시킨다. 우리는 선교에서의 우리의 참여, 창조세계에서의 우리의 존재, 성령의 생명 가운데 있는 우리의 실천들이 상호적인 변혁성을 가지기에 그것들은 함께 엮여져 있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생명을 찬양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125.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는 전 창조세계를 갱신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생명의 하나님은 자연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며 창조세계의 보전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이다. 자연의 계속적인 파멸을 야기하는 끝이 없는 욕망과 무제한의 소비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 창조세계의 갱신과 분리된 인간적인 구원만을 선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목표를 넘어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생명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새로운 방식의 선교를 행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위해 기도하지만, 또한 지금 행동해야 한다. 선교의 중심부에 창조세계가 있다.?
126. 우리는 오늘날 선교운동이 다방향적이고 많은 측면이 있는 남반구와 동반구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확언한다. 남반구와 동반구로의 기독교의 중력이 옮겨지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들, 문화들, 영성들안에 있는 뿌리 박혀 있는 선교적 표현들을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상호성과 파트너쉽을 더 발전시키며,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상호의존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교실천은 고난받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누는 것으로서의 전도는 자기를 비우는 겸손으로 행해지며 다른 사람을 향한 존중과 다른 문화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가 수반된다. 이런 환경은 하나님의 통치의 가치와 모순되는 비인간화와 압제의 문화와 구조와 대항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127.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이 선교의 수행자이며, 모두를 위한 생명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훈련해야 함을 천명한다. 사회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주된 동역자들이다. 소외되고, 압제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떤 소식이 그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고, 어떤 소식이 위험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나쁜 소식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수여의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명을 긍정하는 것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듣는 소외받은 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방향을 소외된 자들이 행하고 있는 실천과 맞추어야 한다. 정의, 연대, 포괄성은 주변부로부터의 선교의 핵심적 표현이다.?
128.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는 모두를 위한 사랑과 정의의 가치에 근거하며 변혁적인 선교는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우상에 저항함을 천명한다. 경제적 지구화는 생명의 하나님의 자리를 효과적으로 빼앗고 그 자리에 세상의 힘이 과도한 부와 번영의 축적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시장자본주의의 신인 맘몬을 갖다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선교는 반(反) 문화적이거나 이러한 우상적인 비전에 대하여 대안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교는 생명,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며, 사람들과 자연에게 고통과 비참함을 주는 사악한 신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는 탐욕의 경제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나눔과 정의의 경제를 구현하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12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연령들과 모든 곳에 좋은 소식이고 사랑과 겸손의 영 가운데 선포되어져야 함을 천명한다. 우리는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메시지의 중심임을 천명하고, 또한 그 진리안에서 전도해야 한다. 따라서, 전도는 제도보다는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됨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이 소리가 들리어져야 할 때에 침묵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복음을 설득과 영감과 확신 가운데 전달하는 전도의 방식을 갱신하도록 부름받았다.?
130. 우리는 생명을 위한 대화와 협력이 선교와 전도에 있어 필수적인 것임을 천명한다. 진정성있는 전도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에 관점에서 행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개종, 경제적 대가를 주거나 힘을 남용하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와 반대된다. 전도를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경과 신뢰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와 모든 인간의 문화에 대하여 가치있게 여기며, 복음은 어떤 그룹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을 어디에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행 17:23-28). 성령과 연합하여 우리는 생명을 향하여 함께 일하기 위하여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131. 우리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분이시고, 선교하는 교회에 힘을 주시는 분임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역동적이고 변화함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계속해나간다. 이것은 공동증거의 다양한 형태를 낳으며 세계 기독교로서의 다양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교회는 움직이는 존재가 될 필요가 있으며 선교와 함께 여행하며, 사도적인 선교를 계속해 나간다. 실제적으로, 교회와 선교는 하나되어야하며, 이는 다른 교회적이고 선교적인 기구들은 생명을 위하여 함께 일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132.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요 10:10)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사65:17)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의 비전을 확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전 창조세계를 생명의 축제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겸손 가운데 함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여야하며, 모든 것을 재창조하시며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Together Towards Life :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
2013 부산 WCC 제10차 총회를 위한 새로운 WCC 선교와 전도 확언을 위한 제안
Proposed for a new WCC Affirmation on Mission and Evangelism Toward WCC’s 10th Assembly in Busan, Korea, 2013
2012년 1월 22일 CWME executive group 승인
2012년 3월 22-27일 마닐라에서 있을 CWME pre-assembly 제출
제11차 초안 (Draft 11)
?WCC CWME의 새로운 선교와 전도 선언문은 2012년 9월 경 WCC 중앙위원회에 채택되고 내년 WCC 10차 부산 총회에서 승인될 것이다. 따라서 이 번역문은 2012년 3월 22-27일까지 마닐라에서 열린 CWME Pre-Assembly에서 토론하고 논의하기 위해 만든 초안이다. 이 선언문은 향후 수정 보완될 것으로 예상되나 지역교회와 선교현장에 있는 사역자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이 문서를 숙고하고 얻은 통찰력이나 문제제기를 하도록 장려하는 목적으로 번역하여 나눈다.
?책임번역자: 김영동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 번역참여자: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선교와 전도 위원회(CWME)는 Porto Alegre 총회 후 2006년 이래 새로운 에큐메니컬 선교의 확언을 세우기 위해 일하였고, 공헌을 하였다. 그 새로운 진술은 2013년 한국 부산에서 열리는 WCC 10차 총회에 제출될 것이다. 1961년 뉴델리에서 있은 IMC와 WCC의 통합이래로 ?중앙위원회에서 승인한 ?선교와 전도에 관한 단 하나의 공식적인 진술은 1982년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컬적 확언”이라는 문서뿐이다. 에큐메니칼 통찰력의 목적은 변화하는 상황에서 전도와 선교의 이해와 실천을 갱신하기 위한 비전과 개념과 방향을 찾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 받아 모두를 위한 생명의 완전성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WCC 구성원 교회들과 또한 관련되어 있는 선교기구들보다 더 넓은 차원의 폭넓은 호소이다.
1. 생명을 향하여 함께: 주제 소개
2. 불의 숨결: 변혁적인 영성
3. 세상의 소금: 주변부로부터의 선교
4. 생명의 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기
5. 변화의 바람: 움직이는 교회?
6. 생명의 축제 : 결론적인 확언?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
1. 우리는 창조주이며, 구원자이며, 생명의 유지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안에서 온전한 세상(oikoumene)을 창조하셨고,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세상안에서 지속적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생명이며,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임을 믿는다(요 3:16). 더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관심이자 그의 선교이다(요 10:10). 우리는 전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고 생명을 공급하고 유지하는 생명의 수여자로서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창 2:7;요 3:8). 생명의 거부는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수여하는 선교로 초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한 풍성한 생명의 비전을 증거할 힘을 주신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생명수여의 사역을 찾아볼 수 있을까? ? ?
2.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과 모든 인간들과 피조물에 흘러가는 거룩한 삼위일체로 묶여 있는 사랑에서 시작된다.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선교사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요20:21), 그들이 희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능력을 주신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안에서 생명을 경축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힘에 저항하고 변혁하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성령을 받아”(요20:22)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성령의 선교에 대한 감사를 갱신함으로 어떻게 우리가 변화하고 다양한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재구현할수 있을 것인가? ??
3. 성령안에서의 생명은 선교의 본질이고, 왜 우리가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의 핵심이다. 영성은 우리의 삶에 깊은 의미를 주고 우리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부터의 거룩한 은사이고 생명을 유지하고 돌보는 동력이다. 이 선교적 영성은 사람들의 영적인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역동적인 변혁과 다름 아니다. 어떻게 우리가 삶을 지탱하는 변혁적 영성으로서의 선교를 되찾을 수 있을까??
4. 하나님은 인간만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지 않았고, 또한 우리에게 부분적인 구원을 주지 않았다. 나아가 복음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과 우리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의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를 우주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명의 체계안에서 상호연결되어진 존재로서의 모든 생명 온 세상(oikoumene)을 인식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지구에 대한 미래의 위협이 자명하다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5. 기독교선교의 역사는 기독교의 중심부에서 “미전도지역들” 땅끝으로 가는 지리적 확장의 개념에 의해 구현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대다수가 그들의 현재의 삶이나 근원을 남반구나 동반구에 두는 이른바 “세계 기독교”로 묘사되어지는 급격히 교회의 환경이 변화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주(nigration)는 기독교적인 환경을 재형성하는 세계적이고 다방향적인 현상이 되었다. 여러 다른 지역들로부터의 강력한 순복음적이고 은사주의적인 운동의 출현은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기독교의 무게중심의 이동”이 신학들과 의제들과 실천들에 있어서 선교와 전도에 주는 통찰력은 무엇인가??
6. 선교는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가는 또한 사회의 특권층으로부터 주변층으로 갈 때 일어나는 운동으로 이해되어졌다. 지금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선교의 수행자로서의 그들의 핵심적 역할을 주장하고 있고, 변혁으로서의 선교를 주장한다. 이렇게 선교를 재고하는 역할의 도치는 강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선교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 어리석은 자들, 힘이 없는 자들을 선택하기 때문이다.(고전 1:18-31). 만약 “주변부로의 선교”에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개념의 전환이 있다면, 주변부 사람들의 특징적인 공헌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들의 경험과 꿈은 오늘날 선교와 전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결정적인가??
7. 우리는 맘몬의 신앙이 복음의 신뢰성을 위협하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다. 시장신학은 글로벌 시장이 무제한의 성장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선전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신화는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영적인 삶을 위협하고 인간들만이 아니라 전 창조세계를 위협한다. 어떻게 우리가 지구적인 시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복음을 선포할 수 있거나 시장의 영을 이길 수 있을까? 교회가 지구적인 영역에서의 위기와 경제적 생태계적인 불의 가운데서 교회가 어떠한 선교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8.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 회중들은 구원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활기찬 사자로 부름을 받았다. 전도는 확신있게 그러나, 겸손하게 우리의 신앙과 확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자비를 선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은사이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라면 피할 수 없는 열매이다. 그러므로, 각 세대에서 교회는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전달하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으로서의 전도에 대한 헌신을 갱신해야만 한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개인화되고 세속화되고 물질화되고 있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 선포해야한단 말인가??
9. 교회는 다종교 다문화상황 가운데서 거하고 있고, 사랑과 평화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다른 종교와 문화의 사람들과 함께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다원적인 상황은 교회들에게 도전이고 그러므로 진지한 종교간 대화와 교차문화적 의사소통이 필수불가결하다. 이처럼 많은 종교들과 문화가 있는 세상에서 생명을 수여하는 선교를 실천하고 공동증거하는데 있어서 에큐메니칼 확신은 무엇인가??
?10.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변혁을 위해 세상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선교는 새로운 생명을 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을 선포한다.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있는 분열과 긴장을 극복하며, 통일성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면 마침내 세상은 믿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요 17:21). 그리스도의 제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반드시 포용하는 공동체로 세상과의 화해와 치유를 가져다 주는 공동체로 존재한다. 교회는 생명의 충만함을 위하여 어떻게 함께 전진하고 선교적인 정체성을 갱신할 수 있을까? ? ? ?
불의 숨결: 변혁적 영성
?11. 오순절 임하였던 성령은 꺼져가는 촛불이라기보다는 불의 숨결로서 신비적 카리스마적 경험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헌신적인 역사적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성령의 선교를 우리자신의 이야기나 제도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성령의 세례는 쭉정이를 태우는(행 2:3; 눅 3:16-17) 불세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성령과 선교에 있어 성령론적 접근이 우리의 신학적 교회적 울타리들을 넘어가고 우리를 선교의 새로운 자세와 실천으로 이끌어가는지를 함께 분별할 필요가 있다.
?12.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삶의 모든 차원 즉 생물학적, 인간적, 사회적, 영원의 모든 차원에서 생명을 소생시키는 많은 표적이 있음에 기뻐한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의미로 이 땅에서 실현되었다.
13. 그러나 21세기는 아주 많은 문제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개인간, 공동체간, 국가 간 폭넓은 인간 관계성의 범위뿐 아니라 전 창조세계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전례 없는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세계화된 세상에서 선교의 새로운 변혁적 영성은 이러한 깨어진 관계들을 치유하는 희망의 가장 심오한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도전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에로 이끌어가는 중보자(Paraclete)이며 생명의 수여자인 하나님의 영의 은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구한다. 잠시동안 우리와 전 생태계가 산모와 같이 고통스러워할지라도, 성령은 우리의 산파가 되시기에 선교가 완수되었을 때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을 믿는다(요 16:20-22).
14. 지난 수십 년간 선교신학에 있어서 성령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것은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다. 이 재확인은 신적인 실체에 대해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한 권속으로서의 세상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에 있어 성령론적 초점은 선교가 기독론적 근거를 가지며 성령의 경륜은 그리스도의 경륜인 말씀에 관련됨을 인정한다.
? 성령의 선교
?15. 하나님의 영-히브리 성경의 루아흐-는 생명의 원천이고 인류의 숨결로서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창 2:7). 현재의 고통 가운데서도 성령은 우리의 탄식과 피조물의 썩어짐에 종노릇한 산통을 함께 하신다(롬 8:23, 21-22). 우리는 희망과 기쁨 속에서 구원받기를 고대하고 있다(롬 8:23). 창조때 물의 형태를 나누게 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였던(요 1:33) 하나님의 동일한 성령이 교회를 세우시고 능력을 부여한다. 성령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신비한 방식과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역사하기도 한다(눅 1:34-35; 요 3:8; 행 2:16-21). 그러므로 창조 때의 성령의 경륜의 보편성과 구속에서의 성령 사역의 독특성은 하나님이 마침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때(고전 15:24-28)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성령의 선교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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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성령은 마리아에게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의 구원자와 주로 삼으셨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주셨다(눅 4:18). 우리는 자유케 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찾는 일을 계속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사역은 죄에 속박된 사람들에게 자유케 하는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는 일,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일을 포함한다.”?
?17.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숨을 거두셨고 그의 옆구리(요 19:34)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다. 죽음 가운데 무덤의 냉기 속에 있을 때 불의 숨결인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는 죽은 자 가운데 첫번째로 살아나셨다(롬 8:11). 부활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동체에 나타났고 그의 제자들을 선교하도록 보내셨다. 예수는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심으로 능력을 부여하셨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 그리고 불의 혀가 각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행 2:3). 하나되게 하는 성령 안에서 초대교회는 더불어 살면서 교인들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나누었다(행 2:44-45). 위로부터의 능력, 성령의 은사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을 증거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형성하였다(눅 24:49; 행 1:8). 심지어 환난으로 인해 흩어져 있을 때도 이주민 교회는 믿음을 지켰고 전세계 교회들은 서로서로 또 주변에 있는 교회들을 도왔다(행 11:19-30).
18. 성서적 증거는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다양한 이해로 증명한다. 그 중 하나는 중보자이며 상담자와 변호인인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이후에만 오실 것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성령을 강조한다. 성령을 선교의 임무를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대행자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성령 이해는 보내고 파송하는 것을 강조하는 선교학으로 이끈다. 또 다른 이해는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요 16:13) 가운데로 인도하며,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요 3:8) 움직여 전우주를 품는 “진리의 영”임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성령을 그리스도의 근원으로, 교회를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선포한다. 이 두 번째 관점은 믿음이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왕국을 미리 맛보는 성만찬 모임 후에 ?평안히 나아가는(선교에서) 것을 전제한다. 전진(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기원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산물이고 “예전 이후의 예전”이라고 불린다. 이 두 번째 관계적이고 동반상승적인(synergetic) 신학은 선교에 대한 포괄적 이해로부터 온다. 여기서의 선교는 보편적 개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는 교회의 종말론적 경험에 대한 진정성있는 증거를 하는 것이다. ?
19. 미시오 데이는 삼위일체 신학의 재진술이다: “하나님 자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교의 생명이 되시고, 역사 속의 하나님의 개입이 인류와 보편적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친교하도록 이끄신다”(요 21장). 교제(코이노니아)와 사랑에 대한 이 궁극적 표현은 교리나 윤리강령이 아니라 사랑의 친교로서 전세계로 전파된다. 이 성령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끊임없이 알리는 기독교적 증언을 낳았고 또한 전 창조세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역동적인 개입을 확언하기도 하였다.
피조물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선교
?20. 성령은 지혜의 영으로서(사 11:3; 엡 1:17)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성령께서 인간의 문화와 창조성을 깨우시므로 모든 문화와 상황이 지닌 생명살림의 지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은 우리 선교의 한부분이다. 우리는 선교가 식민지화와 연계하여 각 지역 사람들 가운데 있는 지혜를 알아보는 데 실패하고 그들의 문화를 폄하한 것을 반성한다. 문화를 공격하고 문화파괴에 일조한 선교 활동은 생명대신 죽음을 불러왔다. 삶을 긍정하는 각 지역의 지혜와 문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전통이 멸시받고 무시당했던 사람들의 증언들을 높이 사며, 그들의 지혜는 창조세계 속에서 성령의 생명과 우리를 연결하는 새로운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속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러 방식을 아는 데 도움을 준다. ?
21.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의 행위와 더불어 시작되므로 창조가 하나님의 선교의 중심에 자리한다. 피조물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은 긴밀히 연결되어있고 하나님의 선교는 우리 모두를 무한한 은혜로 감싸안는다. 선교는 피조물 전체를 아우른다. 우리는 인간중심의 좁은 접근방식을 넘어 모든 창조된 생명간의 화해된 관계를 나타내는 선교방식을 재발견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 우리는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을 듣듯이 이땅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우리는 이 땅이 처음부터 인간의 불의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을 안다(창 4:10). ?
22. 하나님의 영의 사역인 선교는 인류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구속을 추구한다(롬 8:19-22). 선교는 하나님께서 변혁을 원하시는 피조물의 구체적 상황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위치해야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피조물과 함께하는 선교가 이미 우리의 교회들에서 생태정의(eco-justice),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 지구를 긍정하는 영성을 통한 응답들과 같은 긍정적인 운동으로 나타났음을 기뻐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는 때때로 모든 피조물 또한 우리 모두가 부름받은 화해된 공동체에 포함되었다는 사실(고후 5:18-19)을 잊었고, 피조계를 미시오 데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하는 데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으로부터의(from) 임박한 구원을 선포하지 않고 성령의 생명에 참여하여 얻는 우리와 지구의 치유에로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가 버려지고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지구와 우리의 몸 둘다 변혁되어야 한다. 이사야의 환상과 요한이 받은 계시는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됨을 증언한다(사 11:1-9; 25:6-10; 66:22; 계 21:1-4). ? ?
23. 우리의 선교의 관점에서, 영성과 창조는 재방향설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선교참여, 창조세계 안에서의 우리 존재, 성령의 생명을 실천함은 상호변혁적으로 함께 엮여야 한다. 다른 것들을 빼고 하나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많은 위험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선형적인 삼위일체의 친교에서 벗어난 헛된 활동주의와 선교에 빠질 수 있다. 우리의 이웃에 속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만 속하였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개인주의적 영성에 빠질 것이다. 또 우리는 나머지 피조물들이 아파하고 신음하는데도 즐거워하는 영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변혁될 창조세계의 희망 없이 살게 될 것이다. ?
?24. 우리는 우리의 선교에서 새로운 회심(metanoia)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겸손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교를 인간이 다른 것들에게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얼마나 많은 다양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선교의 동역자로서 활동하고 있는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창조세계가 여러 방식으로 인간에 대한 선교에 참여함을 확실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세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혜서는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찬양(시 19:1-4; 66:1; 96:11-13; 98:4; 100:1; 150:6)을 확인해주고 있고,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기쁨과 경탄이 우리의 영성의 한 근원이 됨을 말해준다(욥 38-39). ?
25. 우리는 창조세계와의 영적인 결탁을 긍정하기 원하지만 땅은 오염되고 착취되었다. 인간의 탐욕은 지구온난화와 다른 형태의 기후변화를 야기하였다. 소비주의는 무제한의 성장이 아니라 지구자원의 끝없는 착취를 자극하였다. 만일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땅은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구원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홀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또 구원은 우리가 공유하는 창조세계의 폭넓은 생명의 요구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을 배제하고는 도래할 수 없다.?
영적인 은사와 분별력
26. 성령은 자신의 뜻대로 공평하게 은사들을 주신다(고전 12:8-10; 롬 12:6-8; 엡 4:11). 그 은사는 다른 이들을 세우고(고전 12:7; 14:26) 또한 전 피조물의 화해(롬 8:19-23)를 위해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 은사들 중의 하나가 영들을 분별하는 것이다(고전 12:10).
27. 초기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많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영들의 세계를 경험했다. 신약성경은 악한 영을 포함하는 다양한 영들을 증언한다: “통치자”(예: 천사들, 히 1:14), “주관자”와 “권세”(엡 6:12), “짐승”(계 13:1-7)과 선하고 악한 다른 권세들. 사도 바울도 영적 싸움을 증언하며(엡 6:10-18; 고후 10:4-6) 마귀에 저항하라고 권고한다(약 4:7; 벧전 5:8). 교회는 세상에 보내진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를 가져오는 성령의 능력과 연합하라고 부름받는다.
28. 분별력의 요청은 또한 우리가 영적인 삶에서 종종 성령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예고하거나 명령할 수 없으나 성령의 자유가 선교에서 분명하고 능동적이라는 끊임없는 종말론적 희망 안에서 산다. 교회는 함께 분별하는 공동체로서 교회 안팎의 다양한 목소리들에 개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동등하게 교회 내부의 분열과 죄의 영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에 의해 계속적으로 갱신될 필요가 있다(요 16:8-11).
29.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이 비록 처음에는 내적, 개인적으로 시작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선교적 노력에서 우리를 외부로 인도해간다. 성령에 대한 전통적인 상징과 칭호(불, 빛, 이슬, 분출, 기름부음, 치유, 부드러운, 따뜻하게 함, 위안, 위로, 힘, 쉼, 씻음, 빛남 등)들은 성령이 우리의 삶과 친숙하며 선교와 관련된 모든 관계와 삶, 피조물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다양한 상황과 사건에로, 다른 이들과의 접촉점으로, 만남의 공간과 위급한 인간투쟁의 자리에로 이끌림받는다.
30.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주장은 우리만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가 안내하는 삶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교회로 하여금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관용, 충성, 절제를 수반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권고로 표현하였다(갈 5:23). 이러한 열매맺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들이 일하시는 성령의 깊은 사랑과 능력을 분별하기를 희망한다.?
31.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옳은 것을 확인하고 거짓과 악을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의 충만함이 긍정되는 곳마다 그리고 억압된 자들의 해방, 와해된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창조의 회복을 포함하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을 분별한다. 우리는 또한 사망의 세력과 생명의 파괴가 자행되는 모든 곳에서 악의 영들을 분별한다.
변혁적 영성
?32. 선교영성은 항상 변혁적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죽음의 정황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일깨우고 지탱하는 힘을 소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증언처럼,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눅 1:46-55). 세계제국주의 상황에서-특히 경제세계화의 패권적인 힘의 형태에서-이 자기비움의 영성은 체계적 폭력과 불의의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고무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위한 그의 투쟁에서 사도바울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고전 2:3-5) 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RSV)라고 선언한다. 교회의 선교는 무능한 자들에게 힘을 주고 유력한 자들이 무능한 자들을 위해 그들의 힘과 특권을 스스로 비우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33.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KJV)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세계자유시장 지배를 통한 무제한 성장정책은 가난한 자들과 자연에 끝없은 희생을 요구하는 대안없는 주장을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면서 우상숭배에 이르도록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며 부와 번영의 창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거짓된 약속이다.” 이것은 부와 힘을 가진 자들이 끝없는 착취를 통해 부의 무제한적인 성장을 사수하려는 맘몬의 세계적 체계이다. 이 탐욕의 탑은 하나님의 전(全) 가속을 위협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맘몬제국과 정반대로 대치한다.?34. 선교영성은 삶을 파괴시키는 모든 가치와 체제에 저항하고 변혁을 추구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실함과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시는 생명의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적 장악, 불의한 체제, 우리의 현세적 경제질서에서 착취,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게끔 한다. 경제와 경제정의는 그것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핵심을 건드리기 때문에 항상 믿음의 문제이다.” 선교영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과 재연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프리카적 개념인 Ubunthu는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으며, 내가 있기에 우리가 있다.” 또 한국의 상생(相生) 개념은 “함께 사는 삶”으로 하나님의 선교에서 우주적 비전의 유력한 예이다. 선교영성은 하나님의 생명 살림 선교에의 우리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것은 우리가 맘몬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의 경제를 섬기도록 자극하며, 개인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탁에서 삶을 나누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자기이익을 현상유지하는 것 대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35. 변혁은 부활의 신비의 빛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 2:11-12). 교회는 고난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도록 부름받았다. 억압, 차별과 상처받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드러나도록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36. 십자가의 빛에서 우리는 교회와 선교안에서의 힘의 오용과 우리의 잘못된 힘의 사용을 회개하도록 요청받는다. 더나아가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우리를 분열시키고 힘들게 하는 힘의 비대칭과 불균형으로 왜곡되었기에, 힘의 체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힘의 구조의 책임적 사용에 이르기까지 회개하도록 요청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그리스도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영접하고 힘을 주시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는 확실한 인식 안에서 한 몸의 구성원으로 사는 실제적인 길을 찾도록 부름받는다.
37. 진정한 기독교 증언은 우리가 선교에서 무엇을 하는가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교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이다. 단순한 선교전략을 넘어 우리는 선교영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영성은 우리의 삶에 깊은 의미를 주고 자극하며 동기를 주고 삶의 여정에 역동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삶을 위한 충만한 에너지로서 삶을 부인하고 파괴하며 위축시키는 모든 세력과 힘과 체제에 저항하도록 부른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돌보신다는 깊은 감각을 일깨운다. 선교는 삶을 긍정하고 돌보는 실천이며, 영성은 창조주가 주시는 신성한 은사로서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38.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선교하는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깊이 근거한 영성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성령의 변혁적인 현존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선교를 새롭게 구현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탐욕과 두려움에 지배되며 사망의 열매를 내는 파멸과 소외로 가득찬 활동중인 “영적 세력들”의 존재를 안다. 우리는 그들이 활동중인 곳마다 그리고 우리의 경제, 정치 심지어 교회들까지 사로잡고 있는 곳에서 그것들과 맞설 필요가 있다.
39. 성령안의 삶을 경험하는 것은 삶의 충만함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희망과 빛을 재생시키고, 파괴되고 손상된 것을 재창조하며, 성령이 계속 창조하시는 모든 것을 경축하면서, 절망과 근심의 강을 건너기 위해 손을 맞잡고 삶을 향한 운동을 증언하고 변호하도록 부름받았다(시 23, 사 43:1-5). 선교는 성령이 삶의 모든 차원에서 우리를 만나고 도전하며 새로움으로 데리고가서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행로의 시공을 변화시킨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세상의 소금 : 변두리로 부터의 선교?
40.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사랑과 지혜로서 창조하신 것들을 변혁을 통해 재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단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속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회복과 변혁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며 누룩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인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그들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증언하는 변화의 매개체가 되게 하셨다.(마태복음 5:13; 14; 13:33). 예수님은 온정주의적 자선행동이 아니라 존엄성과 함께 정의와 생명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보시고 사회의 변방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하심을 선택하심으로 이러한 변혁의 선교를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는 단지 인간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일뿐 아니라 찬사와 남용으로 표출되는 ?삶의 외연의 더 큰 단계들을 포함한다.?
41. 기독교 선교를 이해하는 이전의 방법들은 하나님의 이해로부터 기인한 선교를 인식하는데 실패하였기에 부적절하였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주변부로 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이 세상의 깨어짐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일하신다.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선교를 하나님께서 생명의 충만함이 모든 피조물에게 유용한 세상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일하시는 세상을 향해 바라시는 소명으로 단언하며 다시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정의와 주린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즉 그분은 갇힌자들을 자유케 하시며 눈 먼 자들을 보게 하사는 분이시다(누가복음 4:18). 주님은 짓밟힌 자들, 이방인들, 고아들과 과부들을 부양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42. “하나님은 가난한자들의 외침과 창조세계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명에 동참하도록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다(요한복음 10:10).”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부인하는 일체의 것들과 맞서며 변혁하고자 하는 시각을 가지고 그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껴안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부르심이다. 이러한 것들은 대량의 기근과 차별, 비인간화를 만들어내며 유지할 뿐 아니라 인간과 지구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화와 구조를 포함한다. 만약 이러한 갈망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들의 선교적 노력의 어떠한 진정성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주변부와 주변화인가??
43. 변방으로부터의 선교는 삶과 선교의 표현에 있어서의 불의와 맞선다. 이는 압제와 변방화, 변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존엄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선교적 접근과 활동들에 대항하여 대항문화적인 선교적 움직임이 되도록 그 방법을 추구한다. 선교는 오늘날 중심부에 있는 존재는 권리와 자유 그리고 긍정적이고 존경받는 자아를 형성하는 반면 변방에서 산다는 것은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여타의 체제들을 포함하여 존엄하고 고결한 삶, 충만한 삶과 온전한 정의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변두리에서의 삶은 그 자신 스스로의 교훈들을 제공할 수 있다. 규범으로 승인된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도외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수라는 위치는 변방에 사는 사람들과 특권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불의와 삶을 포기하게 하는 관행들에 대한 변혁을 위한 적절한 영감을 제공한다.
44. 선교활동의 수혜자들과 선교적 활동을 담당하는 수행자들의 상황은 선교의 범위와 특징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선교는 반드시 상황에 따라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지금까지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만들어왔고 계속해서 그 경험들을 형성하거나 그 형성을 방해하도록 하는 상황적 현실을 언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선교학적 반성들은 선교적 관점들을 형성하는 결과적 가치성향과 관점에 있어서의 차이점들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45.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선교에 대한 주된 표현들은 종종 사회의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왔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소외계층의 구성원들을 선교활동의 주체적 수행자가 아닌 수혜자로 전락시키는 관점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된 선교는 종종 억압과 삶을 비관하는 사회체계와 너무 지나치게 연관되어진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선교 중심부의 특권주의를 등에 업은 나머지 주로 일부 사람들을 변방의 늪으로 몰아넣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체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온정주의나 우월감에 의해 동기부여된 중심부로부터의 서구화로서의 선교는 기독교와 동일시되거나 기독교를 그 밑으로 두었고 결국 소외계층의 희생자들의 모든 인권이 무시당하는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
46.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 갖는 주된 관심은 ?우리 사회와 문화, 문명, 국가들 그리고 나아가 모든 사람을 위한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교회들의 실패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적 확신과 예수가 선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모두 동일하게 구속하였다는 그의 사역에 위배되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함이 소외와 억압, 인종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를 낳은 불평등의 뿌리가 된 것이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민수기 10:17-18) 말씀에 그의 ?본성과 주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선교활동은 피조물과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가치를 보장하여야 하는 것이다.(이사야 58장과 비교)
47. 소외 계층을 위한 선교는 하나님이 선교의 중심이라는 확신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어 창조와 구속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운행을 스스로 담당하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소외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잘 이해되어지고, 또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그 시대적 억압의 대가를 감수하심으로 못 박히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차별당하는 사람들과 주변화의 구조적 문제의 논쟁에 대한 의식적인 전략이 필요함을 말하여 준다.?
48. 소외를 당하여 본 모든 자들은 무엇이 삶을 확신하게 하고 그것을 부정하게 하며 무엇이 공동체에 유익하며 해가 되는지 그리고 무엇이 양질의 삶에 기여하며 그렇지 못한지를 알고 있다. 그들과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세력들의 실체를 밝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잡다한 관습에 얽매인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체계화한다. 그들 모두에게는 무력함에서 답습되어지는 특징이 있는데, 삶의 기회나 또는 정의로의 추구를 부정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평생의 투쟁을 통하여 약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들 스스로가 주체적인 소망을 품는 저수지와 집단적 저항 그리고 인내 그리고 약속된 하나님 통치에 순종할 필요가 있는 사명집단이고자 하는 바램을 갖는다.?
투쟁과 저항으로서의 선교
49. ‘하나님의 선교’의 확신은 시간과 상황의 확고한 관계를 기반으로 역사와 창조를 주관하시는 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암시하는 것인데, 그 분은 정의와 평화와 화해를 통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충만함을 추구하신다. 그러므로 해방과 화해라는 성령에 의해 행해지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착취하고 노예화하는 사단을 분별하고 그 실체를 밝히는 것임과 동시에 압제와 폭력과 학대와 파괴의 출처와 문화들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선교는 악마의 폐쇄된 카스트 제도와 같은 낡은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말하는데. 이는 그 사회적 악습에 경종을 울림으로서 그 사회의 희생자를 옹호하며; 토착민에게 자율결정권의 권리와 문화 표현의 자유 그리고 창조 중심의 영성과 제국주의의 죄를 인내하였던 패배자들을 위한 재건을 포함한다.
50.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의 약속된 충만함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이 표현이 종말론적 실체를 생각나게 할지라도, 이 말세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우리의 현세적 참여를 진실로 북돋우며 일깨워준다.
5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이 결코 사회-정치적 집권에서 발견되는 지도력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고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나와 있듯이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려 오신 예수를 따르는 길임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복음 1장 46-55절에서 말하는 예수가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낮추고 낮은 자들을 높이신다는 고백으로 그의 사랑이 상호관계와 상호의존과 상호존중의 특징이 있음을 보인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피조물 모두를 위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세상 권력에 대한 투쟁과 저항을 위한 헌신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기독교 지형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정의와 존엄과 생명을 생성하는 데 일조하는 운동과 권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치유와 온전함으로서의 선교?
52.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선교에 속한다는 것은 치유와 모든 생명체의 온전성을 증진하는 것이다. ?치유는 예수의 사역의 주된 양상일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을 계승하도록 하는 그의 부르심의 특징이기도 하다(마10:1). 치유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 중에 하나이다(고전 12:9, 행3).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교회에게 살리는 선교를 행하게 하는데, 이는 기도와 목회자의 돌봄, 전문적 치료, 고난의 원인에 대한 예언적 충고, 그리고 과학적 연구의 추구 등의 총체적 치유의 모든 면들을 포함한다.
53. 건강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 풍요를 넘어서는 것이며, 치유는 일차적인 의학적 치료가 아니다. 건강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성서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한 인간을 다양한 영역에서 하나이며 몸과 혼과 마음이 상호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인 생명력을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은 한 개인이나 전 인격체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생태학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고난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와 ?하나님 은혜의 능력으로 증거하는 것을 실제화 하신다.
54. 온전함이라는 의미에서의 건강이란 현재의 실질적인 가능성 뿐 만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온전함이란 조화에 대한 굳건한 균형보다는 하나님과 사람들 그리고 창조물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개인주의나 불의는 공동체 형성 곧 전체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에이즈 바이러스나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포함하는, 의학적 상태나 장애에 판단기준을 두는 편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각 개인을 느낄 때마다, 잊었던 우리 개인과 협동체 삶의 모든 부분들이 다시 되살아나고,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던 자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마다, 우리는 땅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을 볼 수 있다.
55. 사회는 장애나 질병을 죄의 결과나 해결되어야 할 의학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의학적 관점은 한 개인의 결점으로 추정되는 것에 대한 교정과 치료를 강조한다. 그러나 소외당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결점이 있는 자나 병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이 각종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고치는 많은 예들을 드는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공동체의 조직 안에서 적재적소로 회복시켜 복귀시킨다는 것이다. 치유가 결점으로 인식되는 무엇인가를 고치는 차원을 넘어 전인격적인 회복을 가리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나뉜 부분들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치유자체에 대한 집착은 성경적 강조점을 증진시키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선교는 교회와 사회의 삶에서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전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야한다.
56. 치유는 전체 공동체의 선과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녀노소 모두는 어떤 차별도 없이 최고수준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건강이 인간의 누려야 할 권리가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 중 다수가 그러한 권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 의료선교는 지구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질높은 건강관리에 접근하는 의미에서 모두를 위한 건강을 추구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단체적 봉사를 통해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대중들을 돕거나 상담서비스나 의료봉사단과 보건 프로그램의 제공 뿐 아니라 의료관련 직업들과 진료소 그리고 선교의 목적으로 세워진 병원들을 만들어내고 지원하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러한 목표에 기여할 것이다.
57. 넓은 의미에서 보면 보건과 치료를 위해서 교회들이 참여할 수 있거나 참여하고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치료의 과정들에는 예배, 성찬, 병든 자들을 위한 기도, 회개와 용서, 안수, 기름을 바름,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고전 12). 그러나 치료하는 사람이 하나님 대신에 영광을 받는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치유집회를 포함하는 기독교예배의 부적절한 형태들에는 주의를 귀울여야만 하며 이런 것들은 잘못된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의 개입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치유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문제나 고통이 없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집단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는 서로의 많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동정심과 사랑, 소망을 가지고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로 고통속에서 신음하는 창조세계의 일부로 ?해방을 갈망하며, 기독교공동체는 희망의 표지가 되며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다(로마서 8:22-24).
공평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
58. 포용성은 기독교 초기부터 나타난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세례는 배타와 분리를 촉진하는 문화적 장벽들이 허물어졌음을 의미하였다(갈 3:27-28). 복음은 외국인 혐오증, 인종주의, 계급주의, 카스트주의(castism), 성차별, 장애인차별, 노인차별과 종교와 성적성향, 언어, 신체장애, 무능력과 같은 환경 에 처한 사람들이나 에이즈 양성반응의 의학적 상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는, 배제하는 것보다는 포용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가 된다. 포용성은 인간 개개인과 피조물에 대한 상호인식과 각자의 신성한 가치에 대한 상호 존중과 유지 속에서 인류와 피조물의 공동체 안에서의 바른 관계를 촉진시킨다. 이러한 포용성은 또한 각자가 공동체의 생활속으로 깊숙한 참여를 돕는 역할을 한다.
59. 우리가 ?돌보는 작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버림을 받은 자들의 범위까지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현존을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속에서 소외되어 버린 사람들에 대한 극단적인 접대를 실천하는 범위까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가치를 구현하는 우리의 헌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스스로 버리는 만큼만 우리는 ?우리의 존재속에 스며든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상호작용들과 경제적, 정치적, 사회체제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이고 영적인 나타남 속에서의 폭력을 단념하는 범위만큼 우리는 세상의 사건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60. 선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에게 특정한 기대를 갖도록 한다. 교회는 변방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충분한 참여를 확실하게 한다는 사실을 단언하게 하는 포용성이 있는 기관이다. 교회는 복음전파의 장소일 뿐 아니라 복음이 구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삶을 긍정하는 오늘날의 계획을 구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또한 교회는 공동체의 파괴를 야기하는 가치들과 관습들을 거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차별의 형태들의 죄악된 본성을 인식하고 불공평한 구조들을 개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는 대항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역할은 하지 않고 대신 교회의 지위에 압제하는 권력들을 숨겨주는 일을 거부해야만 한다. 신구약성경속에서 언약공동체에 주시는 성서적 지상명령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마태복음 20:26)라는 명령으로 특징지어진다.
61. 언약공동체의 내적인 삶의 윤리적 진실성은 교회는 중요한 선교적 표현 즉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살아있는 증언이라는 사실을 요청해왔다. 기독교인의 삶은 회심(메타노이아)에 기초한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해야 하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죄악성의 조건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는 교회의 침묵과 억압하는 구조에 동참한 죄를 회개하도록 부름받았고, 과거의 죄악들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보상과 정의와 화해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전을 받아왔다. 이러한 사실은 압제로 인한 희생자들과 가해자들 모두에게 치유와 변혁을 가져오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
6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겔47:12) 에스겔 선지자는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강해지도록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공동체를 치유하고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적 정체성들의 과도한 주장과 박해에 의해 위압당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복음과 삶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한 부르심,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것을 향한 하나님이 의도하는 방법을 우리는 어떻게 재상상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치유하고,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물과 같이 복음이 흘러가기 위해서 장애물이 아닌 통로가 되기 위해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화를 위한 부르심
63.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복음이라고 믿는다. 증거(Martyria)는 온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온전한 복음의 소통인 전도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 자체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한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과 부활의 명확하고 분명한 중심인 선교활동이다. 그것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의 경험으로 그들을 초대하는 것이다.?64. 반면에 “전도”는 선교의 다른 차원을 배제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과 개인적인 회심과 제자도로의 초대를 포함한 복음의 명확하고 의도적인 표현이다.
65. 성령님이 어떤 이를 전도자로 부르시는 반면에(엡4:11) 우리 모두는 우리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나누도록 부르셨다.(벧전3:15). 개인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복음화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마16;15; 벧전2:9). 교회가 말로나 행위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복음화를 멈출 때 , 세상에서 존재하는 그 자체의 우선적 이유를 잃게 된다.
66. “전도는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의 넘쳐남이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행2:4;4:20).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충만과 “너는 나의 증인들”이라는 말씀을 복종해야할 명령이 아니라 약속의 충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
67. 전도는 개종이 아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설교와 좋은 소식을 나타내는데 함께 동역하신다.(참조 롬10:14-15,; 고후4:2-6), 하지만 새 생명을 창조하고 거듭남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시다.(요3:5-8;살전1:4-6). 한편, 전도는 하나님의 사역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들에게 인간적인 행동이나 강한 압력을 준다고 생각함으로 우리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복음이 왜곡되고 그 자체의 신뢰성이 잃어버린 때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기독교인은 폭력의 수단 또는 권력의 남용에 의해 “개종”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는 강압적인 개종에 대한 비난은 지배적인 집단들이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억압된 정체성과 비인간적인 조건들 가운데 사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
68. 전도는 다른 사람과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나누는 것이고, 그들이 다른 종교적 전통에 집착하든지 아니든지 그들을 제자도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이 확신과 겸손으로 우리의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 급박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우리의 이웃에게 나누거나 소개하는 것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은 없다.?
69. 전도는 회개와 믿음과 세례로 이끈다. 죄와 마귀에 맞서 진리를 듣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응답을 요구한다.(요4:28-29, 참조 막10:22). 그것은 태도와 우선순위와 목적의 변화와 관련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 결과는 잃어버린 자의 구원, 병의 치유와 억압받는 자와 모든 창조물의 해방이다.
진정한 전도
70.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은혜, 사랑, 심판의 메시지를 가지는 복음은 반드시 언제나 사랑과 진리 그리고 연민가운데 선포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을 확장하기 위한 전도는 영적이며, 생명을 주는 행위이다.71. 전도는 말씀과 행위 모두에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구술적 선포 또는 복음의 설교를 통한 복음화는 성경적으로 심오하다. 예수님은 매우 뛰어난 언변가였으며 베드로와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00년 넘게 예수님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좋은 소식은 전해지고 또 전해졌으며 세계의 모든 영역의 대부분의 언어들로 해석되어지고 번역되어졌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언어들이 우리의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전도는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구술적 선포와 시각적 행동의 조합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증인을 낳는다.?
72.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복음 선포의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요1:1,14; 히1:1-4)이며 “그가 우리 가운데 은혜와 진리로 충만히 살아계심”(요1:14)을 확신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이 사랑을 위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전도의 많은 방법들과 실천들이 복음을 성육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전도는 겸손히 행해지지 않은 행동과 복음을 듣는 자들을 향해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정치적 목적 또는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오용된 복음의 원인이 되는 악함에 대한 회개에서 시작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마22:34-40; 요14;15).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은 다른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확언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미끼나 어떤 미혹을 제공함이 없이 인간존엄을 온전히 존중하며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이를 섬기고 섬김의 실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참조 막 10:45; 마 25:45)
73. 진정한 전도는 겸손과 모든 사람을 존중함에 근거하고 대화의 상황을 풍성하게 한다. 그것은 말과 행동에서 복음의 메시지,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증진시킨다. “연대가 없는 전도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오실 통치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과 관련되지 않는 기독교 연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람 사이에 그리고 공동체 관계성을 세우는 것에 영감을 준다.?
74.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에로의 초대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하나님의 화해와 회복과 치유를 증거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치유와 회복을 갈망하는 깨어진 세계에 이런 치유의 메시지를 가져온다. 진정한 전도는 사회에서 정의와 인권에 대한 성서적 부르심에 대한 메아리이며 또한 모든 인간과 창조물에 대해 사랑이다. 진정한 전도는 약화되고 주변화된 사람들뿐만아니라 권력자들, 정치가들과 경제구조에도 전하는 것이다.?
75. ?그것이 행해지는 어떤 형태에서든지 진정한 전도는 가치를 확언하는 생명에 의해 처리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1) 폭력과 차별의 모든 형태와 심리학적 또는 사회학적 권력의 남용을 포함한 세속적 권위에 의한 억압에 대한 거부?(2) 종교의 자유를 실천하고 보복이나 협박의 두려움 없는 믿음을 확언하는 것. 상호적인 존중과 정의와 평화 그리고 모든 것의 공통의 선을 증진시키는 연합.(3) 모든 사람과 인간문화에 대한 배려, 또한, ?우리 문화 안에서 인식되어지는 요소들을 분별하는 것, 예를 들어 가부장, 인종차별, 카스트제도 등의 것들은 복음의 도전이 필요한 것들이다.(4) 상호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위해 잘못된 증언과 경청의 거부.(5) 의사결정의 부분으로 사람들이나 공동체에 의한 계속적인 분별을 위한 자유를 확언하는 것?(6) 공공의 선을 위해 깊은 상호적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믿지 않는 사람이나 타종교인들과 관계를 세우는 것.
전도, 타종교간의 대화와 기독교적 현존
76. 선교에서 우리는 순례를 하면서, ?많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 이데올로기, 확신과 대화 속에서 그들과 관련을 맺게 된다. 대화는 우리의 일반적 삶을 확언하는 길이며 생명의 확증과 창조의 온전함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진다. 대화는 우리의 앞에 가셨으며 사람들의 문화적 상황과 확신안에서 관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대로 시작한다면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기전에 거기 계시며(행17)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대화는 정직한 만남을 위해 개방, 인내와 배려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테이블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77. 전도와 대화는 분리가 아닌 상호관계적인 것이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있는 지식으로 오기를 소망하고 기도할지라도, 전도는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대화는 역시 “상호적인 헌신의 만남”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것이 그 안에 적절하게 위치하게 된다. 더욱이 진정한 전도는 삶의 대화의 상황과 행동 그리고 “대화의 정신” 즉 “배려와 존중과 우정의 태도” 안에 있다. 전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확신의 필연적 선포일 뿐만 아니라 타자의 경청과 관련있는 것이며 타자에 의해 풍성케 되고 도전되어지는 것이다.(행10장). 인간으로서 타자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없는 전도는 그저 잡답 또는 소음이 된다. 이웃의 현존을 자각함이 없이 전도의 가치는 없어진다.(고전 13:1)
78. 우리는 특별히 다른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 대화의 중요성을 확인한다. 이것은 다종교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류의 특정한 신앙공동체에게도 중요하다. 이것은 소수집단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와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위한 헌신하도록 하는데 필수적이다. 종교적 자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의 인간의 창조에 근거하는 인간의 존엄성의 본질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지지되어야 한다.(창1:26). 모든 종교와 믿음을 추종하는 자들은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가졌다.?
79. 전도는 연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의 표현이다. (요13:34-35) 반면 분열은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다.(고전 1). 대화는 성령안에서 양육하는 태도와 존중, 신뢰, 더 큰 공동목표에 근거한 관계에 의해 복음의 목적에 기여한다. ??
80. 모든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예수님을 나타냄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의 부르심을 받았다(마 5:13-16). ?때때로 침묵은 은둔적인 삶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증거의 강력한 형태이다. 기독교 증거는 언행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자신 생명의 위협이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단지 복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도, 예언과 선포
81. 우리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물질주의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도전하는 다른 사상들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비록 복음이 긍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그것은 거짓과 불의와 억압을 조장하는 세력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복음을 확장하기 위해 전도는 예언적 소명인데 그것은 소망과 사랑 안에 능력을 향한 진리를 외치는 것이다.(행26:25; 골1:5; 엡4:15) 복음은 해방적이고 변혁적이며 의롭고 포용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관점에서 문화의 변혁을 포함하는 선포이다.
82. 악과 불의에 대해 맞서는 것과 선지자적 존재는 때때로 고통과 폭력을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고통과 억압 그리고 심지어 죽음으로 이끈다. 진정한 전도는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연약함을 포함한다. (빌2:5-11). 순교자의 피가 로마 박해아래 교회의 씨앗이 된 것같이 오늘날 정의와 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강력한 증인을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자기부인과 영원한 구원을 결부시킨다.(막 8:34-38)
83. 복음은 세속주의에서는 다소 모호한 것처럼 보인다. 유다-기독교 종교에 의한 영향으로 전도의 많은 형태들이 세속과 삶의 실존적 현실로부터 영적인 것을 분리하는 표현들을 발견된다. 그러나 성서적 증인들이 “예배는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행위”라고 주장하듯이 오늘날 복된 소식의 설교는 힘과 부의 우상, 소비주의와 생명을 거부하는 힘을 고발해야만 한다. 복음의 선포는 그것이 어떤 경험주의적 과학의 방법들과 분석적 도구들을 차용한 사람들의 영적세계와 초월적인 삶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거부할 때 세속주의에 도전을 준다.
전도와 문화
84. 전도의 현재적 상황은 많은 문화들이 서로 서로 중첩되고, 상호작용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복음은 특수한 문화, 정치 그리고 종교적 현실과 연계된 여러 다른 상황에 뿌리를 내린다. 사람과 그들의 문화와 상징적 삶의 세계에 대한 고려는 복음의 더 좋은 수용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또는 “특별한 공동체 또는 문화에 말씀이 구현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복음의 근원과 영감은 성육신의 신비 안에 있다.” 동서남북 어느 곳에든지 복음은 표현되어진다. 그것은 특별한 상황 안에서 특별한 사람과 창조를 다루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인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85. 선교역사 가운데서 식민지적 힘과 전도의 결탁은 서구적 기독교의 형식은 다른 이들이 따라야하는 표준으로 간주되어지는 전제를 낳았다. 경제적 권력이나 문화적 헤게모니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한 전도는 복음의 왜곡의 위험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반드시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소수자들과 협력을 구해야하고 그들의 신학적인 자료와 비전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86. 때때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들의 복음적 사역의 결과를 조정하기 위한 충동을 받는다. 이것은 그들의 교회와 결과적으로 그들의 힘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그들의 강제적인 시도로 비쳐질 수 있다. 또는 어떤 사람을 복음화하기 꺼리는데 특히 다른 민족적 배경으로부터 온 사람들, 가난한 자들과 주변부에 있는 자들이다. 이는 그런 선택이 기존의 권력구조와 회중 안에 있는 현상유지에 지각변동을 초래할 것이라는 위협의 두려움에 기인한다.?
87.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만의 왕국, 우리 자신만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독립이라는 협소한 관심에서 나오도록 부르셨다.(행1:6) 성령님은 우리에게 더 큰 비전을 보여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유와 평화의 시간과 공간의 각 상황 안에서 증인으로서 “땅끝까지” 가라 하셨다. 우리에게 위임된 복음사역은 우리자신이나 우리의 교회보다는 예수께 모든 초점이 맞추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것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여야 한다. (참조 빌2:3-4)
88. 획일성의 강요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형상 안에서 창조되어진 각 개인의 유일함을 실추시키게 된다. 바벨은 획일성을 강요하기 위한 시도인데 반해서 오순절날 제자들의 설교는 개인적인 개별성 안에서 연합을 이루었고 공동체의 정체성은 손상되지 않고 존중되었다. 즉 모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되었다.
변화의 바람: 움직이는(전진하는/활동하는) 교회
89. 우리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성령으로서 역동적인 거룩한 삶을 보여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Deus caritas est, 요한일서 4:8). 선교는 창조와 구속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초대하였다” (Caritas Christi urget nos). 이러한 교제 (Koinonia)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눈다는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안에 녹아있다 (고후 5:18-21). 이 사랑 안에 살아가고 있기에 교회는 이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첫번째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더불어 그의 답례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존재 그 자체로 또한, 궁극적인 목표로서 교회는 화해와 정의, 평화 안에서 모든 인류와 창조물에게 생명의 풍성함을 제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나눔은 선교와 전도의 근원이 된다.
90. 성령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시간과 장소 속에서” 그리고 모든 문화와 상황에 적합한 영감을 주는 선물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강한 임재하심은 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생명의 풍성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성령은 그것을 증거하는데 우리들보다 앞서가신다. 이 모든 사실은 교회의 선교 활동보다 앞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고,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세상에 그의 증인으로 보내셨다 (요 20:19-23).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위한 그의 목적들을 드러내 보이시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그의 목적들이 실현되는 것에 참여하도록 능력을 더해 주시고 가능하게 하시는 모습으로 교회에 내재하신다. 교회가 그 원천으로부터 방향을 분별하고 힘을 끌어낼 때, 교회는 창조물이 번성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과 가능성들을 불러오는 변화의 바람이 된다.
세계 기독교 환경의 변화
91.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교회가 속해있는 오늘날의 세계 기독교의 환경은 지난 1세기 전의 모습과는 눈에 띄게 다르다. 한 예로 기독교의 세계 인구 통계의 의미 있는 변화를 들 수 있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세계 선교대회는 서방의 기독교 문명이 짧은 미래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독교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권한과 방법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낙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남반구나 동반구에 살고 있거나 그 곳 출신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세계 종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대는 어느 정도 실현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우리가 이전에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던 나라는 눈에 띄는 쇠퇴를 보여주고, 이제는 재복음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92. 생계를 위하여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사람들이 이동하게 되는 이민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국수주의적인 태도와 인종차별의 아집과 결부된 우익 보수진영의 발생은 이민자들에게 적의를 갖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여자들과 아이들, 불법 체류 근로자들은 모든 이민자들 중에서 가장 약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민은 또한 기독교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이민자 기독교인이 다른 사회에 정착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주류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이민자 공동체에게 도전이 된다. 이민자 공동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역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혹은 “이민” 교회 혹은 “다문화” 교회들과 같은 새로운 조직이나 모임을 만들 수도 있다. 기존 공동체는 이민자와 이주자들과 관계를 맺고 상호문화적 사역에 적합한 형식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새로운 교회의 선물이자 도전은 선교와 전도, 그리고 교회됨에 새로운 모습을 요구한다. 또한 어떤 형태의 협력과 어떤 종류의 상호문화적인 교회적 관계와 구조가 그러한 적합한지에 대한 고민이 요구된다.
93. 선교적 관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또 다른 현상은 강력한 오순절과 성령운동 형태의 기독교의 등장이다. 이미 세워져있던 전통적인 교회들 내에서 오순절 운동과 성령운동단체들의 급격한 성장은 강한 선교의 열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북/서방의 교회가 활기를 잃어버린 곳에서 번성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공동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의 선교 활동은 종종 규모가 큰 민중 운동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남반구부터 시작된 몇몇의 오순절 운동은 자신의 지역 뿐 아니라 북반구를 전도함으로 전통적인 선교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전도 활동은 특별히 한 교회가 다른 교회의 손실가운데 성장할 때, 다른 교회들 사이에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는 기독교 종파의 수에 전례없는 성장을 이끌어왔다. 세계 기독교의 다양성은 오늘날 연합하여 선교할 때 중요한 도전이 된다.
94. 기독교 선교라는 이름 아래 개인과 모임, 조직들의 활동은 꾸준히 다양해지고있고, 그 수의 증가는 교회에 의해 후원되어지는 선교 사역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의 대부분이 선교의 시작과 독창성의 표현인 반면에, 그런 종류의 선교단체 활동이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더 넓은 교회 공동체와 교회에 대한 책임을지지 않을 때 어려움들이 생겨난다. 선교 활동의 새로운 형태 중에 단기 “선교 여행”은 세상의 다른 곳에 있는 교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을 가난한 지역 교회들에게 주게 되거나 기존교회를 모두 경시하게 되기도 한다. 과제는 모든 부분에서 전체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 것이다. (고전 12-14)
95. 오늘날 세계 속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은 이 세상이 성령에 이끌리는 더 나은 곳이 되게 하기 위한 바람(wind)이 되도록 교회를 부른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모습(re-imagination)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교회가 새롭게 성육화되어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별히,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가지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주류나 소외계층을 넘어 남반구 교회의 목소리와 의제가 국제 선교나 전 기독교 협력 단체의 구조 안에서 충분히 인식되어지지 않고 있다.
겸손과 존중 안에서 선교
96.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제자로서 우리는 겸손한 섬김과 단결, 사랑,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인간과 창조물을 포용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복음을 증거함으로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서 살아나신 부활의 주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결말에까지 이르셔야했던 성육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우신” (빌 2:7)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힘이나 재물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을 비우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겸허한 이해는 단순히 우리의 방법을 구체화시키진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자 진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선교적 교회는 자신을 비운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97. 기독교 증언은 생명을 잉태하는 부활의 메시지를 통하여 섬김과 교제, 선포 안에서 하나님과 모든 창조물과 함께 교제하게 하는 초청장이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예배와 예전 안에서, 영적이고 거룩한 삶 속에서, 사회 활동 중에서, 모든 인류와 창조된 모든 세계와의 연합 속에서,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중에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은 예전이 교회의 선교의 근원이자 시작점이 되게 한다. 교회는 예배와 기도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자신의 강점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전은 선교를 위한 출발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현현과 모든 세상을 위한 봉헌과 감사의 표현이다.?
98. 어떤 선교운동은 승리주의라는 유혹의 희생물이 되어왔다. 21세기의 선교는 겸손함 안에서 공동증거를 통해 “승리자”와 “정복자”라는 모습을 극복해야한다. 진실된 증인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모든 것이 그들에게 속해있다는 선교정신을 전제한다. 진실된 증인은 세계의 기독교인의 수적 성장만을 위한 확장주의적인 수단 혹은 경쟁적인 태도와 양립할 수 없다.
99. “기독교의 사랑의 영을 부인하고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며 교회의 기독교 증인 안에 있는 믿음을 작게 만드는” 방법과 수단을 통하여 그들의 특정 교파에 대한 헌신을 바꾸려고 하는 이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의 유혹은 그리스도로의 진실된 개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라는 책무를 포용하고 따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류애의 초석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속박, 죽음이라는 인간의 최후의 속박으로부터 모든 창조물들을 자유케하셨다.?
100. 우리는 무한 성장과 다른 사람과 적대하며 그들을 이겨야하고 그들과의 경쟁하는 모습을 갖도록 촉구하는 자유시장의 고도로 경쟁해야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많은 교회들과 선교단체 운동의 선교적 관점에도 역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옛 “고객”들을 잘 지키면서 새로운 고객을 모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과 상황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에 근거한다기보다 개종한 사람들과 교회의 수적 성장에 근거하여 선교의 성장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선교 안에서 교회를 움직이신다.
101. 하나님의 선교(missioDei)는 교회의 근원이자 기초이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과 같다. 이 하나님은 온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시고, 우리를 그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그의 형상을 따라 모든 인류를 지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구원의 역사의 계획을 성취하기위해 아들을 보내셨다.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깨우치고, 선교적 사명을 위해 필요한 능력을 ?주시기 위해 성령이 보내심을 받았다. 이러한 거룩한 삼위일체안의 역동적인 교회는 교회의 연합의 근간이 된다.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세 인격이 그 안에서 하나의 하나님으로 내적으로 연합하신 것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또한 다른 이들과 교제를 경험하도록 초청하는데 있다.?
102.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교회의 참여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라는 배경 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선교학적 관점에서 역사 속에서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선교를 위해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와 선교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의 기원과 목적에만 근거하여 교회와 선교를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의 선교적인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왜냐하면 선교 안에서 교회에 능력을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의 생명과 같은 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상에 보내실 때 성령을 교회에 불어넣어주셨다 (요 20:19-23). 그러므로 마치 불이 연소됨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에 의해 존재한다. 만약에 교회가 선교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되기를 멈추는 것이다.??
103. 하나님의 선교와 함께 시작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교회론적 접근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귀납적인, 교회 신학의 환경적인 이해, 세계 기독교의 환경의 변화와 교회적 현상에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고무한다. 이러한 접근 안에서 교회가 선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선교가 교회를 가지고 있다고 보게 된다. 선교는 교회를 확장하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체화 하려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교회의 사도적 성격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가 따라오는데, 사도적 성격이라는 것은 대대로 걸친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려는 것 뿐 아니라 사도직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로 그리고 첫째로 선교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4. 신학적으로 또한 실질적으로 교회와 선교가 연합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1961년에 이루어졌던 IMC 와 WCC의 연합은 이 방향에서 의미있는 일보였다. 이 역사적인 경험은 우리가 선교와 교회는 함께 가야한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하였다. 그러나 이 목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교회가 진정한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며 우리 세대에 이 여정을 계속해야한다.
105. 교회의 선교적 본질은 교회와 선교단체 구조가 더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선교단체 구조들은 필연적으로 선교를 추구함으로 교회에 정착되어졌고, 이것은 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었다. 이에 더해서 교회들은 선교단체의 사역이 가능하도록 도와주고 책임을 제공함으로 그들의 구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선교단체 구조는 교회가 그들의 역동적인 사도적 특성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IMC와 WCC의 연합은 교회 연합과 선교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들여왔다. 그러나 일치와 관련된 토론은 구조적인 질문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에 선교단체 (mission agencies)들은 선교에 있어서의 융통성과 보완성을 진술한다.
106. 교회는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선교를 충분히 구체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날 인식했다. 때때로 여전히 선교와 교회를 분리하는 생각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교 안에서 완전하고 실제적인 연합의 결핍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의 실현에 대한 신뢰성과 진실성을 해치고 있다. 우리 주님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와 일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결과적으로 교회와 일치에 관한 우리의 사상을 더 넓은 의미의 일치, 즉 가난하고 빈곤한 이들과의 일치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와의 우주적 일치까지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양성 안에서의 공동증언
107. 선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하는 여정 중에 주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교는 “타자”를 선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상”이 아닌 동료로 만든다. ?기독교 증거가 주어지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동료로 여기게 한다. 그들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라는 성경적 진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 경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해 성령 사역의 실현을 돕는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풍성함을 소중이 여긴다. 기독교 증거의 많은 형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선포를 구하지만, 반면 이것이 모든 창조물 도처에 하나님의 영이 역동적으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된다.?
108.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선교에 동참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조직화 되었던지 비공식적인 모임이든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됨 없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모이기를 권하라” (히 10:25). 그리고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포괄적인 공동체이다. 말씀과 행위, 그리고 그것의 존재 자체를 통하여 교회는 하나님이 오셔서 다스릴 비전을 미리 맛보고 증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신실한 자들의 함께나옴 (coming together)이고 평화로 나아감 (going forth)이다.?
109. 일반적으로 이 세상 그리고 특별하게 인류가 역사적이고 다양한 문화의 배경 안에서 표현되어진 다양하고 상호보완적인 많은 다양한 선물들로 축복 받았을때, 이러한 색깔이나 다양성이 분열인 적개심이 아닌 상호의존과 화합으로 인도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110. 사람들의 다양성 안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협동과 협력의 영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전도의 모습을 통하여 공동 증거의 방법을 밝히고 실행하도록 부름받았다. 공동 증언은 교회가 심지어 분리되어 있을 동안에라도, 특별히 협력을 통해, 그들이 이미 공통으로 나누고 경험한 진리와 생명의 신령한 선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교회가 그것을 함께 품는 것이다.??
111. 겸손을 갖춘 섬김은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선교의 역사 가운데 선교 완수의 영광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돌아가는 동안, 낯선 사람에 의해 전달된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토착민들의 환대는 무시되어져왔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환대가 어떻게 행해졌었는지, 특별히 다종교와 다문화 배경에서 공동증언이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112. 신앙의 공동체로서 우리는 교회가 이민이라는 미사여구(rhetoric)를 재구성하고 사람들을 떠나게 한 원인들을 밝혀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 스스로 개방하여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던 교회들과 공동체들은 격려와 후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포괄적이고 협력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선교와 세계교회주의 (ecumenism)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는 말씀을 들어보았다. 기존 교회와 선교 단체가 이민 공동체에게 자신들의 삶, 계획, 사역 안에서 동반자로서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하는 것은 필연적 명령이다. 교회는 인종과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기 위해 하나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다양성 안에서 공동 증거의 실제적인 표현 방식으로써 다문화 사역과 선교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113. CWME의 기본 구조 안에서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선교 안에서 연합을 표현하고 강화하는 방법들을 찾는 조직들을 가지고 있다. ?CWME는 선교 안에서의 연합에 대한 추구를 촉진하기 위한 1910년 에딘버러에서 이루어졌던 발의권의 직계 상속자이다. WCC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CWME는 새로운 선교의 이해와 그리스 정교회, 영국 성공회, 개신교, 복음주의, 오순절, 그리고 지구촌의 모든 원주민 교회의 연합을 경험할 수 있었다. WCC의 상황은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가까이 일할 수있는 관계를 만들어주었다.?
114. 복음주의진영에서의 협력의 고양, 특별히 2010 에딘버러 백주년 프로젝트에서 주최측을 대표했던 WEM과 로잔위원회는 일치가운데에서의 선교에 대한 에큐메니칼 신학적 숙고를 풍성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비록 일치가운데서의 선교에 대한 우리의 접근들이 ?다른 초점을 가지고 있지만 CWME가 복음주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구성원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함께 전도에 관한 공통 관심사를 나누고 모든 교회는 온누리에 온전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115. 일치의 영인 성령은 다양성 안에서의 연합을 주도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인 측면에서 기뻐하기 위해 사람들과 교회들을 연합시킨다. 성령은 다름의 문제를 다양성을 기뻐해야하는 이유로 바꾸셨다. 성령은 사람들이 포괄적이고 상호간에 책임있는 공동체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기위해 안전하고 긍정적이며 배양하는 환경 안에서 다름을 탐색하도록 역동적인 환경과 필요한 재료를 공급한다.
선교라는 교회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116. 교회 역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해치는 분열과 배척으로 오점이 남겨져있다.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의 일원에게 능력을 주시고 활기를 북돋우시며 교회에 내재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삶의 완전함을 나누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뿌리 깊은 요구에 기인한, 그리스도 안의 진실된 삶을 위한 시험과 기준, 기독교인들을 위한 긴급한 내적 충동(고전 9:16)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특정한 개인들이나 특별한 모임에게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기도 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오늘날에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을때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도 가득차게 한다. ?
117. 인류와 모든 창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담은 기독교의 메세지를 신자와 다른 종교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은 한 목소리로 우리 안에 있는 희망(벧전 3:15)에 관해 말하며 공동 증거를 하는 것이다. ?만약에 기독교인들이 그들과 다른 공동체와 문화들 사이에서 그들이 선포하는 것을 행하고 자신들 사이에서 연합을 실천한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 길잡이가 될 것이고 다른 종교의 신자들에게는 모범이 될 것이다 (요 13:35). 동시에 종교의 자유에 대한 약속은 전 기독교적인 행위들과 다른 신앙과의 관계 안에서 신뢰성을 쌓아나가는 열쇠를 제공한다.??
118. 모든 사람으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교회는 연합중인 교회와 연합된 교회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 풍부한 공동 선언문 그리고 치유와 화해의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 안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연합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화를 만들어내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으로서의 치유와 화해는 자기 자신과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모든 창조물들과의 치유와 화해의 근원이다. 오늘날의 선교 신학의 중심에 있는 치유와 화해를 통한 성령의 사역의 재발견은 세계교회주의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19.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구조적 연합을 향한 노력과 연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연합은 조직의 구조의 단계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역시 언급되어져야한다. 선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하나님의 선교의 동인을 도울 수 있도록 분별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선교 안에서의 연합은 교회의 구조적 연합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연합을 위한 시도는 때때로 침묵하고 압제하는 잘못된 연합을 깨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정의를 추구하는 성경적 부르심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120.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갈구하는 깨어진 세상에게 치유의 메세지를 가져다준다.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치유를 가져다주기 위해 교회는 첫째로 하나님의 치유와 능력과 은혜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치유와 회복의 사역의 신뢰성은 생명의 부활의 진술, 즉 회복되어진 완전함과 그 안에 있는 연합에 근거한다. ?
생명의 축제 : 결론적 확언?
121. 우리는 ?창조세계 모든 사람들 특별히 생명의 온전성을 바라며 압제당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할 사명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공동증거하는 것으로서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눅 14:15)로의 초대이다. 교회의 선교는 잔치를 준비하여 사람들 특히, “가난한 자, 불구자, 눈먼 자, 그리고 저는 자”들을 생명의 축제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 축제는 창조와 풍성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결실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의 목표인 전 창조세계의 회복과 해방의 표지이다.?
122.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이 생명의 풍성함(요 10:10)이며 이것이 선교를 분별하는 기준임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압제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해방과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과 전 창조세계의 회복의 견지에서 풍성한 생명으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을 구별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다른 문화 가운데 현존하는 생명을 긍정하는 영에 감사하고 생명을 긍정하고 보존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또한, 우리는 어디에서 죽음의 힘과 생명을 거부하는 악한 영을 ?만나든지 간에 그것을 분별하고 맞선다. ?
123. 우리는 선교가 성령께서 주시는 생동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행동과 함께 시작되고 재창조 가운데 지속되는 것을 확언한다.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부어진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끔 하였다.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성령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어 자기를 비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하고, 말씀과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한다. 진리의 영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고,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세력과 대항하며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구속받은 공동체로서 우리는 생명의 생수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전 창조세계를 치유하고 화목하게 하고 갱신하는 일치의 영을 추구한다.?
124. 우리는 영성이 선교의 동력의 근원이며 성령안에서의 선교는 변혁적인 것임을 확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와 영성과 창조사이의 우리의 관점을 재조정하려고 한다. 예전과 예배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교적 영성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또한 창조물들과 연결시킨다. 우리는 선교에서의 우리의 참여, 창조세계에서의 우리의 존재, 성령의 생명 가운데 있는 우리의 실천들이 상호적인 변혁성을 가지기에 그것들은 함께 엮여져 있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생명을 찬양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125.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는 전 창조세계를 갱신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생명의 하나님은 자연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며 창조세계의 보전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이다. 자연의 계속적인 파멸을 야기하는 끝이 없는 욕망과 무제한의 소비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 창조세계의 갱신과 분리된 인간적인 구원만을 선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목표를 넘어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생명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새로운 방식의 선교를 행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위해 기도하지만, 또한 지금 행동해야 한다. 선교의 중심부에 창조세계가 있다.?
126. 우리는 오늘날 선교운동이 다방향적이고 많은 측면이 있는 남반구와 동반구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확언한다. 남반구와 동반구로의 기독교의 중력이 옮겨지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들, 문화들, 영성들안에 있는 뿌리 박혀 있는 선교적 표현들을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상호성과 파트너쉽을 더 발전시키며,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상호의존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교실천은 고난받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누는 것으로서의 전도는 자기를 비우는 겸손으로 행해지며 다른 사람을 향한 존중과 다른 문화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가 수반된다. 이런 환경은 하나님의 통치의 가치와 모순되는 비인간화와 압제의 문화와 구조와 대항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127.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이 선교의 수행자이며, 모두를 위한 생명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훈련해야 함을 천명한다. 사회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주된 동역자들이다. 소외되고, 압제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떤 소식이 그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고, 어떤 소식이 위험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나쁜 소식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수여의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명을 긍정하는 것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듣는 소외받은 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방향을 소외된 자들이 행하고 있는 실천과 맞추어야 한다. 정의, 연대, 포괄성은 주변부로부터의 선교의 핵심적 표현이다.?
128.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는 모두를 위한 사랑과 정의의 가치에 근거하며 변혁적인 선교는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우상에 저항함을 천명한다. 경제적 지구화는 생명의 하나님의 자리를 효과적으로 빼앗고 그 자리에 세상의 힘이 과도한 부와 번영의 축적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시장자본주의의 신인 맘몬을 갖다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선교는 반(反) 문화적이거나 이러한 우상적인 비전에 대하여 대안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교는 생명,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며, 사람들과 자연에게 고통과 비참함을 주는 사악한 신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는 탐욕의 경제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나눔과 정의의 경제를 구현하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12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연령들과 모든 곳에 좋은 소식이고 사랑과 겸손의 영 가운데 선포되어져야 함을 천명한다. 우리는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메시지의 중심임을 천명하고, 또한 그 진리안에서 전도해야 한다. 따라서, 전도는 제도보다는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됨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이 소리가 들리어져야 할 때에 침묵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복음을 설득과 영감과 확신 가운데 전달하는 전도의 방식을 갱신하도록 부름받았다.?
130. 우리는 생명을 위한 대화와 협력이 선교와 전도에 있어 필수적인 것임을 천명한다. 진정성있는 전도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에 관점에서 행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개종, 경제적 대가를 주거나 힘을 남용하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와 반대된다. 전도를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경과 신뢰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와 모든 인간의 문화에 대하여 가치있게 여기며, 복음은 어떤 그룹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을 어디에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행 17:23-28). 성령과 연합하여 우리는 생명을 향하여 함께 일하기 위하여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131. 우리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분이시고, 선교하는 교회에 힘을 주시는 분임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역동적이고 변화함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계속해나간다. 이것은 공동증거의 다양한 형태를 낳으며 세계 기독교로서의 다양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교회는 움직이는 존재가 될 필요가 있으며 선교와 함께 여행하며, 사도적인 선교를 계속해 나간다. 실제적으로, 교회와 선교는 하나되어야하며, 이는 다른 교회적이고 선교적인 기구들은 생명을 위하여 함께 일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132.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요 10:10)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사65:17)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의 비전을 확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전 창조세계를 생명의 축제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겸손 가운데 함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여야하며, 모든 것을 재창조하시며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출처] WCC 새 선교선언문 (안티와 예수의 대화) |작성자 왕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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