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베리칩소동에 관한 고찰 (김명도 교회와신앙)

주방보조 2013. 8. 24. 21:44

[특별기고] 소위 ‘베리칩’(Verichip) 소동에 관한 고찰
2013년 02월 15일 (금) 02:36:55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미국 ‘튤립교육선교회’(www.tulipministries.com) 대표 김명도 교수님의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전면 게재합니다. 최근 국내외를 휩쓸고 있는 소위 “베리칩 소동”에 대해 귀한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편집자주>


김명도 교수 / 미국 Los Angeles 소재 칼빈신학교대학원 원장

요즘 기독교 교계에는 미증유의 이상한 교리와 운동이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어서 성경지식과 신학지식이 부족한 일반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교회의 목회자들도 대부분이 다른 교리들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목사들이 Fuller신학교 C. Peter Wagner의 신사도운동이나 Brian McLaren의 Emergent 교회운동, Mike Bickle의 국제기도의집(IHOP) 운동, 워런 목사의 PEACE운동, Nicky Gumbel의 Alpha Course, Richard Foster의 Renovare 등에 가담하여 자신들이 속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목회하는 많은 성도들, 주께서 피 흘려 값 주고 사신 양무리들을 오도하고 있다. 이는 매우 슬픈 일이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번 쯤 이 글을 읽으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기원 140년에는 ‘예언운동’을 펴던 몬타누스(Montanus)가 소아세아 Phrygia 지방의 Pepuza과 Timion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면서 Pepuza에 전도 본부를 두고 Priscilla와 Maximilla 등 두 여전도사와 함께 토굴에서 생활하던 일이 있다. 이들은 환상과 계시를 보며 방언을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며, 방언 못하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 칭하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성도들을 두 부류로 분류하여 차별했다. 놀라운 것은 Tertullian 같은 정통 신학자도 한 때 여기에 빠져서 Montanus를 지지했던 일이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고 또 속아 넘어가는가? 오늘날의 순복음이나 오순절 또 신사도운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 Montanus운동은 AD 177년 정통 신학자 Apollinarius 감독이 주재한 공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사실이 있다. 속이는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도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다.

1884년엔 침례교 목사인 William Miller가 자기 기호에 맞게 자기 멋대로 성경을 풀이하여, 주님의 재림 일자를 1884년 10월로 잡았다가 다시 수정하여 이듬해 1885년 3월로 수정했으나 실패하게 되자 그는 병들어 죽었고, 그를 사랑하고 따르던 무리 중에 Joseph Bates 와 Ellen G. White 가 뒤를 이어 “주님은 1884년에 지상에 재림하지 않고 하늘의 지성소에 재림하여 지금 거기서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여부를 심판하는 소위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ment)을 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안식교를 세워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는가?

과연 주님이 재림하여 지금 하늘의 지성소에 내려와서 성경에도 없는 ‘조사심판’을 하고 있다고? 이런 억지 주장이 어디 있는가?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그의 택함 받은 백성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면서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아 주셨고,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입어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자녀의 특권을 주셨다. 과연 예수님은 1884년부터 하늘의 지성소에서 다시 조사 심판을 하시는가?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다. 빙판에 넘어져서 히프를 다쳐 고생하던 Mary Eddy Baker는 야고보 1:5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소위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교단을 만들었고(이 교단은 교주가 설교한 내용을 전 세계에서 전수 받아 동일한 메시지로 예배한다. 오늘은 영상을 통하여 시청하고 예배가 그런 형식으로 진행된다. 오늘도 영상을 통해서 예배드리는 모 교단이 있는 것과 같다), 성경의 한 구절을 고립시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면 온갖 교리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1938년 10월 30일에는 미국 굴지의 CBS 방송이 Halloween Radio drama 프로로 당시 H,G, Wells의 소설 “War of the Worlds” 라는 fiction을 당시 21살이던 Orsen Wells가 각색하여 드라마로 방송했는데, 화성에서 외계인들이 지구를 공격하여 오는 내용이며 New Jersey 주 West Windsor Township 근처에서 파죽지세로 Trenton을 향하여 진격해 오는 중이라는 보도와 가상 실활중계를 당시 Dan Seymour 라는 아나운서가 생동감 있게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청취자들은 물론이고 청취자들의 입을 통해서 퍼져나간 hoax(거짓말)로 인하여, 온 미국이 “지구 종말” 에 대한 공포에 떨었던 일이 있다.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일들은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그러기에 요즘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똑똑하지 못하면 항상 남에게 속아 살게 마련이다. 목사들도 속아 넘어가는 세상이 아닌가?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복사들이 거짓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가를 눈여겨보라. 그러므로 지금은 자기 신앙은 자기가 지켜야한다. 믿고 의존할만한 사람이 없다. 신앙을 지키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고 신학을 알아야 한다. 좋은 신앙고백서들을 옆에 두고 열심히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서 하는 말을 듣지 말고 내가 성경을 몸소 읽어야한다.

지난해 5월과 10월에는 Family Radio Station, Inc.(Oakland, CA 본부) 국장 Harold Camping 이라는 분이 2012년 5월 21일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Judgment Day May 21”이라는 van을 만들어서 미국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필자와도 친숙한 사이이며, 그가 목회하던 교회 즉 Alameda Reformed Church는 San Francisco Bay Area에 있는데, 방송국 직원들과 이웃 동리 사람들이 약 200 명 출석하고 있었다. 필자는 1998년 8월 하순 그 교회에 가서 “Theological Climate within the Reformed Circle”이라는 주제로 이틀간 사경회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방송국장 Camping 장로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밤늦도록 성경해석법에 관하여 토론한 적이 있다. 성경해석이 바르지 못하면 온갖 소동이 벌어지고 또 신앙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주께서 피 흘려 사신 성도들을 미혹한다. 그는 성경 대부분을 풍유적으로 해석했다(allegorical interpretation). 그런고로 그런 엄청난 실수를 범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한 것이다. 고령이며 이번 두 번의 실수로 다시는 방송으로 그런 미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마이얀 칼렌다(Mayan Calendar) 소동”에 의하면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의 종말이 꼭 온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기원전 3114년 8월에 시작된 마야 달력이 “정확히” 2012년 12월 21일에 끝나게 되며, 따라서 지구에 큰 이변이 생겨 결국 지구는 종말을 고하고야 만다는 이론이다. NASA가 아무 일이 없다고 안심을 시켜도 종말론자들은 여전히 그 문제를 크게 떠들며 세상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과연 2012년 12월 21일은 지구 종말의 날인가? 두고 볼 일이지만 지구의 종말이 오늘 온다 해도 우리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나그네 세상을 살아가며 본향을 사모한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주님의 재림이다. 우리는 매일 그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오늘 당장 주님이 오신다 해도 무슨 걱정인가? 아니 주님이 오시는 것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만일 죽는다면 죽는 그 사람에게는 죽는 그날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기고 하루하루를 주님의 뜻을 이루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벌써 여권이 “리얼 아이디”로 바뀌었고, 미국도 2017년까지는 모든 운전면허증을 “리얼 아이디”로 바꾸도록 결의하고 실천단계에 있는데, 1965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2015년까지 면허증이 모두 새로운 “리얼 아이디”로 갱신될 예정이고, 그 이전에 출생한 사람은 2017년 12월까지 모두 바뀐다고 한다. 이것도 “짐승의 표” 인가? 나라에서 범법자(犯法者)를 막기 위해서 시행하는 시책에 불과하다. 개인의 모든 신상 정보를 타인에게 공개하는 일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나라의 법이다. 싫으면 각자 그 지방출신의 상원의원이나 하원에게 진정서를 낼 것이며, 의회에서 논의할 일이다. 그러나 분명이 이것이 “짐승의 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분은 지금 미국 Georgia 주 Elbert County 언덕에 서 있는 에 새겨진 “세계 인구를 5억으로 제한하자” 라는 문구를 문제 삼아 소동을 벌이지만 이것 자체가 짐승의 표는 아니다.

베리칩에 관하여 오늘날 시끄러운 소위 베리칩(verichip) 소동도 마찬가지이다. 베리칩은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Chip 의 약자로 어떤 이는 Positive Chip 이라고 도 한다. 약자로는 RFID 라고 불린다. 좁쌀보다 좀 큰 크기의 작은 칩을 팔이나 신체 어느 부위에 주입한다.

그러면 <베리칩>이란 무엇인가? <짐승의 표>인가?
사람들은 성경보다 사람들(특히 선동을 좋아하는 언필칭 ‘신학자’들)의 말을 더 믿는다. 소위 신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말을 모두 믿으면 큰일 난다. 가짜 신학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영향을 받는 것은 사람과 책인데, 서적도 best seller라고 하면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은 아랑곳없이 그 책의 내용을 여과 없이 액면 그대로 수용하며, 성경과 배치되어도 그 책의 내용이 진리라고 고집한다. 목사들도 Rick Warren의 책이나 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란 책을 사서 보라고 권한다. 얼마나 무식한가? 그리고 얼마나 교인들의 영혼을 망치는가? 그래서 교계에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항상 시끄러워진다.

우리는 이런 소동을 과거에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신학사조(神學思潮)가 들어오면 아무런 비판이나 판단이나 여과(濾過)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보급”하는 경향이 미국 사람들보다 더 현저하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이단 사상들은 마치 연못가에 던져진 돌처럼 파장을 더해가며 계속해서 전국으로 펴져간다. 오늘 한국의 어지러운 교계를 보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시달리다가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가? 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해오는 성도들이 매일 수십 명에 이르러도 이들에게 권할만한 바른 교회가 드물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데 이는 아주 위험하다. 세대주의자는 주님이 두 번 오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주의 날, 하나님의 날, 심판의 날은 오직 한번뿐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마지막 날’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39절, 40절, 44절,54절 등) 모두 “he eschate hemera”로, 이는 마지막 날 이란 뜻으로 단수 명사가 쓰였다. “날” 이란 단어가 모두 단수란 말이다. 주님 재림의 날은 한번 뿐이다. 세대주의자가 말하는 것처럼 한 번은 몰래 와서 잘 믿는 성도들을(그들의 말대로 하면 ‘교회’를) 휴거하고 (성도들을 부활시켜서) 지상에 “7년 대환난”이 오고, 전 삼년 반에 유대인들이 모두 자동적으로 구원 얻고 후 삼년 반에는 성도들에 대한 극심한 핍박이 오며,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건되고 주님 다시 와서 예루살렘 성전의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왕 노릇한 후, 악한 자들을 부활시켜 심판하며 최후의 곡과 마곡과의 아마겟돈 전쟁이 있은 후, “백보좌 심판”에서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교훈으로, 이들은 항상 성경의 문자적 해석, 그리고 유대인중심적인 신앙을 주장하며, 천년왕국 중심의 신학을 말한다(Dallas신학교 창시자인 Lewis Sperry Chafer의Systematic Theology 참고).

한편 개혁주의는 성경의 모든 곳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가령 요 2장의 “성전을 헐라. 그러면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큰일난다. 요한 사도 자신이 그 다음절에서 그 말이 상징적 표현인 것을 설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즉, 주님의 죽으심과 사흘 후에 부활하실 것을 말한다고 하지 않는가?

계시록은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쓰고 있다. 정말 바다에서 뿔이 열인 괴물이 올라오는가? 정말 땅에서 그런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 올라오는가? 모두 상징적이다(Patrick Fairbairn의 Typology of Scripture, William Hendricksen의 More Than Conquerors, Vern Poythress 의 The Returning King: A Guide to the Book of Revelation 등 건전한 개혁주의 서적 참고).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면 7장의 144,000명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구원 받은 성도의 수가 14만4천뿐인가? 여호와의증인은 이 숫자가 여호와의증인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라고 믿는다. 오늘 여호와의 증인의 숫자가 전 세계적으로 14만 4천명뿐인가? 이 숫자를 어떻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가? 상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혁주의 학자들은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묵시문학 (Apocalyptic Literature)은 그 장르 (genre)대로 해석함이 옳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책 별로, 장르대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계시록을 사도행전처럼 해석할 수 없다(Louis Berkhof 의 Principles of Bible Interpretation 참고).

계시록 13:15~18 말씀으로 인하여 세간에 떠도는 말들이 흉흉하고, 교회에 가면 목사들이 매 주일 연거푸 “베리 칩을 받지 말라”고 외치는 말을 들은 어느 성도는 필자에게 찾아와서 “나는 지금 죽는 것이 짐승의 표가 사실로 판명되어 그때 짐승의 표를 받고 죽어 지옥에 가는 것 보다 낫겠다”라고 하소연하는 분도 보았다. 이 문제로 인하여 주를 믿는 성도들이 서로 반목하고,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며 분열을 초래하는데 이는 건전하지 못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Verichip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RFID, 일명 Positive ID) 의 용도는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신분확인용으로 ② 사람이나 동물의 위치추적 ③ 병원에서 의료 기록용으로 쓰일 수 있다. 쌀알만 한 크기의 작은 반도체 (chip) 이 몸에 들어가서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 예수를 믿던 사람도 사탄을 믿게 되고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전원을 공급받아 충전된다는 둥, 666이 짐승의 표에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은 확고하여 요지부동이며, 계 13장15~18말씀을 달리 해석하면 “사탄”이라고 노골적으로 총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다.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에게 독배를 마시게 한 당신들이 행복한지 아니면, 당신들에게서 독배를 마신 내가 행복한지 죽은 다음에 결판 짓자”라는 말이다. 오늘 베리칩이 666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것이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할 일 많은 이때에, 이런 문제로 성도들 간에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현 미국 정부는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대로, 2010년 3월 23일에 “건강보험 개혁법”을 미국민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문서에는 “by use of device implantable”이라는 구절이 들어있어서, 이 글을 본 사람들은 “몸에 이식가능한 장치를 사용하여”라고 했으니, 재빠르게 666과 연계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게다가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사람들의 줄기찬 “지지 홍보 발언”과 수많은 세미나를 통해서 사람들은 점점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게 된 것이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futurist(종말론자)들은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앞서 언급한 Miller가 그러했고 1914년에 재림을 예언했던 여호와의증인이 그러했고, 2011년의 Camping이 그러했다.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그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방송국에 헌납하고 지금은 빈곤에 허덕이는가? 이들 모두가 성경을 잘 못 해석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하나님에게 얼마나 책망을 받겠는가?

베리칩이 과연 666인가?(요 13:15~18의 해석)
독자는 계시록 13:15~18 본문을 읽어 보기 바란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13장 1절 이하에서 뿌리가 열이고 머리가 일곱인 짐승이 올라와서 나중에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짐승이 이번에는 땅에서 올라오는데 그 짐승이 첫 짐승의 권세를 받아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한다고 말하면서 이 짐승은 심지어 불이 하늘로서 내려 오게 하는 이적기사를 행하며 백성들을 우롱한다고 했다.

15절의 “모든” 이란 말은 “every human being”의 의미가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총망라하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16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즉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빈궁한자, 자유한 자나 종 등 인류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말함이 분명하다. 이런 방식은 계시록 다른 곳 이를테면 11:18; 19:5; 19:18; 20:12 등에서도 그렇게 쓰이고 있으니 여기서 이 처럼 해석해도 무리가 아니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란 말은 무슨 의미인가?
고대 중동의 풍습은 어떤 권위(Authority)를 부여할 때 흔히 “오른손” 혹은 “이마”를 사용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시대의 문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어떤 성경구절을 단지 그 시대의 문화로 간주할 것인가? 아니면 교리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교리는 문화와 관계없이 불변이다. 교리를 문화라고 일축할 수 없다. 또 문화적인 요소를 교리라고 고집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오른손”, “오른팔” 등은 성경에서 중동지방의 풍속을 따라서 성경에서도 “위엄” 혹은 “권위”를 나타낸다.

가령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9에 보면 “오른 손”(right hand)란 말이 무슨 의미로 쓰였는지 알 수 있으리라. 영문성경을 보라. James, Peter and John, those reputed to be pillars, gave me and Barnabas the right hand of fellowship when they recognized the grace given to me.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라고 한 것은 “같은 일을 하는 동역자”란 의미이며 그 직책을 존중하는 의미이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말하는 ‘오른손에 표를 받는 것’은 “사탄의 일에 동역하는 자”를 말한다. 즉 “사탄의 일에 동참하는 부역자”란 의미이다. 오른손에 표를 받는 것이 틀림없는 베리칩이 666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해석과 다름을 알 것이다. 성경해석의 원칙을 알아야 한다.

베리칩 지지지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오른손”이 아니라 “손이나 이마에”라고 해야 마땅하다. 왜 성경은 오른손이라 하여 ‘오른’이란 형용사를 강조했는가? 위에서 방금 언급했듯 오른손을 권위를 나타낸다. 예를 성경에서 들어보자: 마 25:33(양은 오른편 염소는 왼편), 출 15:6(주의 오른 손이 권능으로), 신 33:2(그 오른 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그 외에도 이사야 41:10, 41:20, 출29:20, 레 8:23, 잠 27:16, 겔 21:22, 전 10:2, 눅 22:50, 엡 1:20, 계 5:1, 계 2:1, 계 1:16, 계 10:5, 계 13:16 특히 행 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등 수많은 예를 성구사전에서 찾아, 이런 성경구절에서 “오른 눈”, “오른 팔”, “오른 발”, “오른 손” 등이 모두 권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성경 전체에서 “오른 손”은 권위를 나타냄을 알라.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는 그런 권위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머리로 짐승을 경배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는 말이다. 진정으로 짐승을 따른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며 손으로 행하는 것이며 모두가 짐승을 경배하는 일에 몰두한다. 왜 계 13:15~18에서 ‘손이나 이마’가 아니고 “오른손과 이마에”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라. 더구나 베리칩은 반드시 “오른손”에만 맞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사람들은 왼손에도 맞는다. 그럼 왜 “왼손”에 맞는가? 성경에는 “오른손”에 맞으라고 하지 않는가? 모순이 아닌가?

“표”를 받은 자의 해석이 문제다
“표”가 무엇인가? 표라는 말은 계시록에 여러 번 나온다. 14:9, 19:20, 20:4에 모두 표란 말이 등장한다. 14:11에 보면 이 표를 받는 자는 짐승에게 “먼저 경배하고 나서” 그 표를 받게 된다. 먼저 표를 받은 다음에 짐승에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짐승을 경배하기 때문에 (손으로 이마=머리로) 표를 받는 것이다. 또, “짐승에 경배하거나, 혹은, 표를 받는 자” 중 어느 하나도 아니다. 본문의 내용은 반드시 “경배한 후에 표를 받는 자”임이 확실하다. 이 구절을 문법적으로 보면 짐승에게 경배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사람은 표를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아, 예수를 믿는 성도가 고의적으로 사탄을 경배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요한일서 2:19 말씀대로 원래부터 예수를 믿는 성도가 아니었는데 성도로 가장하고 있던 거짓 성도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짐승에게 경배하며 짐승을 따르며 짐승을 생각하고 짐승의 영광을 위해서 손을 놀리는 사람들이 짐승이 표를 받듯 계시록 7:3을 보면 예수를 주로 모시고 주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는 “이마에 인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마에”란 말을 깊이 생각하라. 여기서도 짐승의 표를 이마에 맞는다는 말의 이마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표”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짐승의 표는 사탄숭배의 결과이고 어린양의 인침을 받는다는 말은 구원의 “표”임은 두말 할 것 없다.

성경말씀이 두 군데 모순될 수 없다. 짐승을 경배하는 자는 짐승의 표를 이마에 맞고 예수를 믿는 성도는 어린양의 그 이름을 “이마”에 인침 받는다. 즉,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 경배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권세를 부여 받으며, 이마=머리 와 손으로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도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인침 받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성도의 이마에 “나는 어린양의 이름을 이마에 인치고 다닌다”라고 이마에 기록하여 모든 사람이 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도 눈에 보이게 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뒤에서 숨어서 보이지 않게 역사한다. 불신자나 사이비신자의 이마에 “나는 짐승의 표를 받았다”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베리칩 처럼 몸에 붙이고 다니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라.

18절의 666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위에서 언급한대로 계시록은 고도의 상징문헌이다. 13장 초두부터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란 정말 동물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교훈인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정말 동물인가? 상징인가? 스스로 판단해 보라. 상징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666은 왜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는가? 666은 문자 그대로 666인가? 아니면 다른 상징적 의미가 있는가? 만일 상징성이 있다면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이다. 무엇이든 완전을 나타날 때 7을 쓴다. 반면 6은 7보다 모자란다. 사탄은 하나님과 필적(匹敵) 할 수 없다. 사탄은 아무리 애써도 결단코 7에 이르지 못한다. 아무리 하나님을 닮아 보려고 모방해도 결국은 조금 모자라는 “6”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사탄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도 7일, 또한 지성소 안에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 백성의 죄를 속죄할 때도 “수송아지의 피를 일곱 번 뿌렸고”(레위기 16:14, 19),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하나님은 명령하시기를 여리고성을 7번 돌라고 했고, 마지막 날에는 제사장 7명이 나팔 7개를 가지고 7번 성을 돌라고 했지 않은가? “7”은 하나님의 숫자이며 완전수이다. 한편 “6”은 사탄의 수이다. 다시금 성구사전을 보면서 숫자 “7”과 “6” 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자세히 관찰하라.

뿐만 이니라, 계시록 13:18에 보면 “6”이란 숫자는 “심판”을 상징한다. 계시록을 보라. 6번째 인을 마치고, 6번째 나팔, 6번째 진노의 대접이 끝날 때마다 사탄의 사역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므로 666은 사실은 6666666666666666…. 이렇게 무한대로 계속된다. 즉, 사탄의 계교는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666은 어느 매체나 어느 반도체도 아니고 사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 사탄은 마지막 때, 특히 주님의 재림이 다가올수록 단말마적 발악으로 성도들을 시험하고 해친다. 방법도 다양하다. 그는 “거짓의 아비이면 살인자”이다(요 8:44).

그러나 계시록 17:14에서 말하듯 성도는 반드시 이긴다. 계시록 17:14은 계시록 전체의 요절(要節 key verse)이다. 계시록은 이 한 구절을 전개시켜 나간 것이다. 베리칩이 짐승의 표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갈 1:8~9).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간다고 모두 구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 제61문).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 즉 진정으로 중생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만 섬기며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만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을 얻은 성도는 절대로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구원을 얻었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요한일서 3:9 말씀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상습적으로, 고의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이 않는다고 가르친다 (요 3:9 원문 참조). 그러므로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죄에 대한 아픔이 없이, 회개도 없이 죄에 무관심한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다고 자처해도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다.

계시록의 사데교회는 “살아 있다고 하나 죽은 교회”라고 주님이 책망했다. 오늘도 사데교회 같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순교할 정신으로 예수를 사랑하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참된 성도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래서 주님은 눅 18:8에서 인자가 올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는가?”라고 탄식하시지 않았는가? 원문에서는 ‘믿음’이란 단어 앞에 여성 정관사 단수 목적격 ten 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서 “ten pistin”(the faith)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성경적 믿음”을 말함이 분명한데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런 성경적 믿음을 이 땅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씀이다. 말세론자들의 베리칩이 문제가 아니라 참다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진정 거듭난 사람은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한 그의 백성을 아시고 “아무도 내게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요한복음 10:28에 분명히 그의 언약백성에게 약속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진리 그 자체이시므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베리칩이 666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조직신학이 약하거나 성경해석법을 몰라서 생겨난다고 보여진다. 앞서 말했듯 한 번 구원을 얻은 성도는 절대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엡 2:8을 보라. “te gar chariti este sesosmenoi dia pisteuws”인데, 여기서 “구원한다”라는 말은 ‘sozo’동사의 남성 복수 주격 완료분사이다. 헬라어에서 완료형은 ‘과거에 이룩된 어떤 동작의 결과나 효과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뜻일 때 만 쓰인다(Ernest De Witt Burton 의 Syntax of Moods and Tenses in the New Testament Greek [rep. Kregel Classics, 1976]; A.T.Robertson의 A Grammar of Greek New Testament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orig. Nashville: Tenn.: Broadman Publishing Co., 1920, rep. B&H Academic, 1947], 등 참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엡1:4) 창세전에 선택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은 성도는 “한 번 구원 받은 그 사실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실패하여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포기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요한복음 10:28에서는 “저희 [구원을 얻은 자]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요한복음 10:29절에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고 아주 명명백백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치는 분들은 이 말씀을 왜 안 듣는가? 주님은 창조주이시고, 믿는 성도들을 그의 피 값으로 사신 분이며,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주의 날, 즉 마지막 날에 사탄을 불 못에 던지시고야 말 분이다. 베리칩을 받고 말고에 따라서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해 주신 자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실 분이 결코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4을 읽어보라.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불변하시다”라고 가르쳐 주지 않는가? “베리칩”을 받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변개되는가? 창세전에 택한 성도도 베리칩을 받으면 버리시는 하나님인가?

또한 로마서 8:38~39을 읽어 보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고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베리칩 소동” 에 현혹되거나 두려워 말고, 매일 매일이 나의 마지막 날인 양 옷깃을 여미고 주의 나라 위해서 전도하며 부지런히 선교해야 할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천국의 개념을 이 세상에서의 성취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영적인 왕국이라는 점이 세대주의자들과 다른 신학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것으로 세상은 종말이며 이 세상에서 지상낙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종교통일 운동을 통해서 이 땅위에 Maitreya가 지배하는 왕국을 건설하려고, WCC를 통하여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 basileia tou theou, basileia ton ouranon)은 영적인 나라이다. 주님 자신이 빌라도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는 문제의 “건강보험개혁법” 제정의 위헌여부를 토의하고 있다. 3일간 토의를 끝내고 지금은 deliberation 기간이다. 연방판사 9명이 어떻게 투표하느냐에 따라 그 법은 폐기될 수도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그 법이 2015년부터 시행되건, 수정되건, 폐기되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도의 구원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어려운 핍박의 시대가 도래 한다. 오늘 21세기에도 중동지방에서는 매일 많은 기독교 성도가 순교하고 있지 않은가? “베리칩” 때문이 아니다. 종말은 생각보다 속히 다가오고 있다. <베리칩> 말고도 실제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국에 체포되어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날이 오고 있고, 지금 벌써 우리 눈앞에 와 있다.

순교할 때가 되면 순교하여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참 성도 이다. 한 번 구원을 얻은 백성은 구원을 잃지 않는다. “짐승의 표”는 우선 짐승에게 경배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하다면 참 성도로서 짐승에게 경배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성도의 소망은 마지막 주의 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개혁주의 신앙이다. 주님은 “감람산 강화”(마24장)에서 “미혹을 받지 말라”고 여러 번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우리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자, 금년 12월 21일이 지구 종말의 날이라는 Maya Calendar를 믿을 것인가? “베리칩 소동”을 믿을 것인가? Post Tenebras Lux !

오늘 성경해석의 난맥상은 위험수위에 달하고 있다. 누구나 아무렇게나 성경을 해석하여 다른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 성경해석에는 성경해석의 원칙이 따로 있다. 옛날 기원 12세기에 이태리에 Joachim da Fiore (Joachim de flore 라고 하기도 함)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제법 당시로는 공부도 많이 한 분이었지만 중세사람 대부분이 그러했듯, 극도의 신비주의에 빠져 있어서 수도사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책을 몇 권 썼는데, 그 중에서 문제가 된 것은 그의 <계시록 강해>였다. 철두철미한 신비주의자였던 그는 삼위일체의 교리(Tertullian이 처음으로 사용한 성경적인 용어)를 생각하면서, 인류의 역사를 3시대로 분류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구약은 성부시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었다고 했고, 예수님의 초림부터 1260일 까지는 “성자시대”라고 했고, 기원 1260일부터는 평화롭고 번영하는 “성령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 없다고 했다. 過去에 함석헌((咸錫憲) 옹(翁)이나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도 그렇게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구원을 얻은 성도의 유기체이다. 구원을 얻으면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 같이,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수직적 유기적 관계를 가진다. 또한 수평적으로 모든 중생한 성도들 간에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서로 서로 짐을 나누어지며 서로 우는 자와 더불어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더불어 즐거워한다. 성도가 유기체에서 벗어나면 다른 지체가 고통을 받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고통을 받는다.

Joachim이 주장하기를 1260년부터 ‘성령시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던 근거는 무엇인가? 그는 계시록 11장 3절에 나오는 “1260일”이란 말을 문자 그대로 기원 1260년으로 착각했다. 이 말의 짝은 계시록 11:2의 “마흔 두 달”과 계시록 11:11 의 “삼 일 반”, 그리고 12:14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와 더불어 해석해야 한다. 이는 모두 구약 다니엘 9:27의 “마지막 이레의 절반에 제사가 그치고…”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말이다. 다니엘 9장의 70 이레의 마지막 이레의 절반에 제사가 끝나는데, 이때가 신약의 시작으로 이레의 반은 공 수학적으로 “3.5”의 개념이다. 그것은 42 달 (3년 반)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3일 반”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1260일”로 나타낼 수도 있다. 모두가 “3.5”의 개념인데, 신약시대 전반, 즉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체의 기간을 나타낸다. 신약시대 전반에 걸쳐서 사탄의 역사가 (짐승으로 상징되는) 계속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짐승(사단)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화가 있다고 성경은 13:4 과 14:11에서 분명히 말하는데 13:8에 보면,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하게 되지만, 반대로 녹명된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능히 끝까지 구원해 주신다. 앞서 초두에 언급했지만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라고 말하며 택함 받은 백성의 구원의 확신을 준다.

Joachim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결국 Arle 공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파면 당했다. 그는 교회사에서 이단자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 밖에도 한 사람의 그릇된 성경해석에 따른 그릇된 신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는가?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Plymouth Brethren 운동을 효시로 세대주의를 시작한 John Nelson Darby가 미국의 Cyrus I. Scofield 나 Lews Sperry Chafer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그 결과, 오늘 한국이나 미국이나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신학교와 교수 및 목사들이 전체 개신교 성직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천년왕국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회복, 예루살렘의 성전 재건, 혈제부활 등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신앙생활 한다. Joachim 은 후에 Arle 공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세대주의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앞서 언급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않고 범죄 하는 나라는 “염병”(렘 50:32, 레 26:25), 그리고 “악한 짐승 특히 시량”이 서식하는 처소로 나타낸다(예레미야 51:37, 62, 이사야 34:11, 13-14, 예레미야 36:29, 예레미야 50:39). 반면에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곳에는 항상 “악한 짐승이 없다”는 것으로 나타낸다(렘 36:29, 이사야 35:9 등 참고). 이런 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가 멸망할 것으로 사나운 짐승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성취 되었다(사 34:16). 알렉산더 대왕은 323 BC에 죽었지만 그가 죽은 이유는 인도까지 점령하고 마게도냐로 돌아오는 길에 바벨론에 들려 원형극장을 재건하려다가 열병으로 33세에 요절했다. 바벨론은 예레미야 선지가 여러 번 힘주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파사 나라 고레스 왕에게 망했다.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사람의 말로는 항상 좋지 않다.

계시록의 짐승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짐승을 이용하여 상징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절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는 책이다. 에스겔처럼 고도의 묵시문학이다 묵시문학 형태의 성경은 그 genre 대로 이해해야 한다. 묵시 문학을 다른 성경 책, 이를테면 사도행전처럼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666에 관해서도 앞서 언급한대로 13장만 생각하지 말고, 계시록 전체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666이란 숫자는 아무리 길게 계속해도 하나님의 숫자 “7”에는 결코 절대로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자.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그것을 강조한 것이다. 계시록의 열쇠는 17:14 한 구절이다. 이 한 구절을 사도 요한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묘사를 통해서 전개해 나가며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과거에 얼마나 많은 세대주의자들이 이상한 교리로서 세상을 미혹했던가? 오늘이 신사도 운동도 세대주의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 문제는 단지 <베리칩> 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는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음모가 숨어 있다.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해치려는 운동이 어찌 베리칩 하나뿐이겠는가? 지금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한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신사도 운동이나 이머징 교회 운동이 그 대표적인 운동일 것이다. 그 외에도 늘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서 눈을 외계로 돌리게 하는 UFO의 출몰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나, 과연 UFO 가 존재하는가? 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두 사람은 이단 사상이나 밀교(occult)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인데, 이들에 의하면 모두가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뉴이에지 운동>의 일환으로 사탄의 계교라고 단언한다(Encylopaedia of New Age). Austin, Texas에서 Power of Prophecy Ministries를 운영하는 Texe Marrs 목사도 그의 책 Dark Secrets of the New Age 라는 책에서 같은 결론을 짓고 있다).

현세의 혼란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리라. 앞으로 온갖 희한한 운동이 더 많이 등장하리라. 모두 주님 재림의 전조(前兆) 이다. 주님 재림 전에는 “미혹의 영을 조심하라”고 주님이 감람산 강하(마24장)에서 강조하신 것을 한시도 잊지 말자. 오늘의 베리칩 소동, 신사도 운동, 그리고 오는 12월 21일로 예정된 지구 종말을 알리는 소위 마야 칼렌다에 의한 지구 종말론, 이머징 운동, IHOP 운동 등을 눈 여겨 보기 바란다. 지금 우리는 고도의 경계심과 분별력이 필요한 때에 살고 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이렇게 말씀이 혼란스런 때는 없었다. 사탄은 말씀을 혼잡하게 하여 어느 것이 진리인지 분간 못하게 하고 있다. 본 선교회는 평신도들의 영 분별력을 함양(涵養)하여 바른 개혁주의 신앙생활로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충성스럽게 살아가도록 사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8상) 이 말은 부활신앙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는 말이지만 proof texting 을 떠나서, 오늘 때 아닌 <베리칩 소동>으로 불안에 떨며 성도들 간에 서로 반목시하는 우리들에게도 분명히 해당되는 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