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찬양이 심각하다. 최근 내가 사는 곳에서도 몇 교회가 연합하여 한국의 유명한 찬양 사역자를 초청하여 찬양 집회를 열었다. 모든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에 우려하였던 것처럼, 왜 이런 노래를 왜 불러야 하는지 회의가 드는 순간이 있었다. 성도들이 모여서 찬양하게 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언제나 복음의 진리는 살아있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바른 도전을 주지 못하면서 바른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이나 거짓 영의 터치에 미혹되어 있는 사람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는 찬양 집회는 아무 유익도 없고 오히려 손해만 초래한다. 사탄이 기도를 더럽히기 위해 24/7이라는 것을 퍼뜨린 것처럼, 찬양 속에도 사탄의 술수가 이미 들어와 있다.
사탄이 행하는 일을 칭송하는 기막힌 술수
어떤 찬양을 분석해 보면 그 실상이 참으로 끔찍하다. 찬양을 드린다고 함께 모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뜨겁게 노래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노래 속에 사탄의 가증한 이론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심각한 사실을 모르고 그런 노래에 취하여 감정이 심히 고조되고, 크게 열광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눈에는 당장 보이지 않으나, 그 실상은 자명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귀신들의 놀이터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 일을 상습적으로 주도하는 사람은 미혹되어 사탄의 종 노릇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뭐가 뭔지 전혀 모르고 느낌이 좋으니 사람들이 부르도록 인도하는 단순한 실수일 수 있지만, 결코 곱게 보아주어서는 안 될 참혹한 실수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고 사람들을 모아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엄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런 엄청난 사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 주시해야 한다. 그들의 영적인 성향이 건전해야 한다. 노래 잘한다고 그냥 마이크를 맡길 일이 아니다. 어떠한 영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인지 검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와 예배 속으로 침투하는 귀신의 미혹을 돕는 어이없는 자살골이 잘 일어나도록 그들이 돕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가장 엄히 경계해야 할 찬양은 신사동운동가들에 의해서 지어진 찬양곡들이다. 신사도운동 사상을 가진 찬양사역자들이 지은 노래에는 사탄이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으로 표현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칭송하게 만든다. 순진한 성도들을 분위기와 감정으로 요리하여 교묘하게 사탄을 칭송하게 하는 가증한 노래들이 많은 교회들의 예배를 더렵혔다.
한국 교회에서도 '창조의 아버지'(Let Your glory fall)라는 이름으로 널리 애창된 노래의 작곡자 데이비드 루이스(David Ruis)는 마이크 비클이 세운 캔자스시티선지자교회(Kansas City Fellowship)에서 일하였고, 후에 빈야드운동이 왕성했던 토론토(Toronto)의 '웃음운동'의 중심지였던 토론토공항교회의 존 아놋과 동역하였던 찬양사역자, 즉 신사도운동가이다.
'이 노래를 누가 지었는지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 작곡자가 무슨 뜻으로 지은 노래이건, 내가 좋은 뜻으로 부르면 되지'라면서 가리지 말고 잘 부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자. 모여서 예배한다고 항상 하나님이 경배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원한다. 우리가 힘써 부르는 찬송의 내용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사탄의 벌이는 장난을 높이는 내용이라면, 그 예배의 주인은 사탄이 되는 것이다. 사탄이 하는 일을 힘써 노래하면서 칭송하는데, 사탄이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래도 여기는 내 교회니까 '하시며 자존심을 굽히고 그 예배를 구걸하듯 받으시겠는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예배를 인도하는 담임목사 모든 성도들이 일어서서 사탄의 장난을 칭송하는 노래를 힘써 부르면 하나님은 사탄의 수준으로 격하되거나 그 예배의 실제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더러워지고, 성도들의 영혼에 사탄의 독이 들어가고, 이후에도 사탄의 미혹이 계속 역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근거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멋진 노래 가락 속에서 교회는 황홀하게 더럽혀진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찬양이 좋고 분위기가 좋은 교회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
찬양은 반드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일들을 노래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출애굽기의 미리암의 찬양(출 15:1~21)을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미리암은 찬양하였다. 이처럼 모든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높이고 기리는 노래이어야 한다.
데이비드 루이스가 지은 이 유명한 노래도 겉보기에는 아주 좋은 찬양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노래의 내용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정체불명의 일들에 대한 칭송이 들어있다. 이 노래 속에 담겨진 그 정체불명의 일들을 칭송하는 내용들 몇 가지를 살펴보자.
1)'택하신 세대 일으키어'라는 내용은 우리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신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 땅을 고치기 위해 택하신 세대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말씀이 전무하다. 이것은 분명히 신사도운동의 거짓 하나님, 즉 사탄을 높이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이 세상을 영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종말에 한 특별세대가 일어난다고 한다. 밥 존스(Bob Johnes)같은 거짓 선지자는 1973년 이후 출생한 세대가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세대라고 하였다. 겉보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령한 노래인 것 같으나, 이 노래는 우리를 구원하신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사도운동가인 데이비드 루이스의 거짓된 하나님, 사탄을 숭배하는 노래이다.
2)'주 영광 여기 임하사'라는 부분도 그렇다. 주의 영광이 임한다는 것은 신약의 시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구약 시대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든 성도의 몸과 교회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결코 구약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일이 없다. 그러면 데이비드 루이스는 왜 이러한 가사를 지었을까.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는 지금도 구약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을 때에 그 흔적으로 안개, 구름, 금가루, 금이빨 등이 나타난다고 신사도운동가들은 믿는다. 실제로 그러한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귀신들의 장난이지 우리 구원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아니다. 이 노래가 말하는 '주'라는 단어는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다. 신사도운동가들을 지배하고 속이며 장난하는 사탄을 경배하는 노래인 것이다.
3)"만물이 사모하는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다는 내용도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성경의 하나님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성령이면 성령이지, 성령의 기름은 또 무엇인가. 성령의 기름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다. 성경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구약식으로 '기름부음'(요일 2:20,27)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이것을 왜곡하여 성령으로부터 anointing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이 흘러나온다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신사도운동가들이다. 이 거짓 개념은 80년대에 일어난 빈야드 운동을 통하여 등장하였고, 신사도운동가들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념도 없이 입에 담는 말이 되었다. 특히 쓰러지거나, 웃거나, 짐승소리를 내거나, 몸을 비트고 꼬는 현상, 이상한 소리(방언)까지도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우리의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정교하게 사탄을 칭송하기 위해 고안된 가증한 노래인 것이다.
특히 데이비드 루이스가 지은 원 가사를 보면 성령이 'releasing' 된다고 표현되어 있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release라는 단어와 outpouring 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되어 나타나는 영적인 '힘', '에너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 이해는 현대의 뉴에이지(new age) 사상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의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연결된다. 영지주의는 영적세계에 관한 '앎'(knowledge), 즉 단순 이론이 아닌 영적세계에 대한 경험되어지는 지식(gnosis)을 가질 때 인간에게 구원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 사상이 기독교와 접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divine)에 연합되는 신비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고대의 기독교 영지주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신사도운동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출'(releasing)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요설은 바로 이 사상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도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release된다고 가사를 지었다.
4)'주의 향기 머무소서'라는 부분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이 뜻은 하나님이 임하실 때 특별한 향기가 함께 임한다는 내용인데,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향기를 동반한다는 내용이 없다. 이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때에 안개, 구름, 금가루, 보석 등이 흔적으로 나타나고, 때로 향기도 동반된다는 그들의 요설이다. 이 노래가 칭송하는 신은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작곡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거짓된 하나님, 즉 사탄인 것이다.
무아지경,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술수
찬양에 관하여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무아지경으로 황홀경으로 빠지게 하는 사탄의 음모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와 정체성을 실종시켜 버리는 사탄의 또 다른 모략이다. 사탄이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마라"라고 사탄이 윽박지르거나 외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도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하지 않고 노래나 다른 것을 통하여 감성과 느낌을 탐닉하다가 결국에 종교적 황홀경(ecstasy)을 좇아가는 병든 신앙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DNA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에서 생명과 복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역사와 생명이 시작되므로 언제나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기를 당부하셨다. 인간이 말씀을 바르게 받아야 생명과 복이 시작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다. 성경은 수 없이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들으라"(사 44:1)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 7:23)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겔13:2)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나"(마 13: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 4:9)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행 22:1)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11,17,29;3:6,13,22)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순종하고 회개해야 한다. 개인, 가정, 국가, 민족,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전파되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이 과정이 바르게 진행되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말씀을 중시하는 자세와 말씀을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기독교인에게 동반되는 당연한 것이 맑고 마음과 건전한 이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비추어서 볼 수 있어야 하고, 말씀에서 벗어난 부분을 고치는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심으신 christianity이다.
사탄은 이 중요한 기독교의 DNA를 변질시키고자 쉬지 않고 일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여전히 예배로 모이되, 거룩한 말씀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느낌과 주관적인 감정이 충만하게 고조되는 것을 추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종교적 황홀경이 예배의 성공의 척도가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찬양이라는 노래이다.
특히 요즘의 찬양은 동원되는 악기와 가사와 박자의 특성상 사람들에게 쉽게 빨리 감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술이나 마약으로도 일으킬 수 있는 감정적 고조와 흥분을 예배 시간에, 여러 종류의 악기와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의 도움을 입어 조금 다르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성령충만', '은혜',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음의 찬양 영상을 보고 계속 이야기하자.
많은 교회들이 오랜 동안 불렀던 '주의 자비가 내려와'(Mercy is falling)라는 이 노래도 신사도운동가 데이비드 루이스(David Ruis)가 작곡하였다. 이 노래의 가사의 내용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mercy)가 위에서 내려온다고 반복하고 있다. 작곡자가 무슨 의미로 Mercy라는 단어를 썼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 봄비처럼 위에서 내려온다는 내용이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어떤 사역과 연관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동아줄을 타고 나무꾼에게 내려오는 천상의 선녀와 같이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어떤 역사하심이나 성령의 은사가 있는가. 모르겠다.
물론 노래를 꼭 이런 식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거하시고, 교회 속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왜 굳이 위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하는 것인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주의 성령이 내려와 나를 덮네" 이런 표현이 어떻게 성경의 성령님의 사역을 묘사하는 것인가. 작곡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거짓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신사도운동가인 점을 생각하면 어렴풋이 실마리가 풀린다. 집회 중에 천정으로부터 금가루가 내려오고, 위로부터 안개와 구름이 내려와 자욱하게 깔리고, 보석이 내려오고, 위로부터 특이한 향기가 내려오는 그들이 가증한 현상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루이스가 위에서 내려오는 '주의 자비'라고 표현하는 것이 실은 신사도운동 집회에 나타나는 거짓된 영들의 역사, 즉 anointing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mercy is falling"이라는 가사가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어떠한 성령의 역사와도 연관되지 않는다.
우리 도시에서 열린 찬양집회에서도 이 찬양을 불렀다. 그냥 부른 정도가 아니라 일어서서 크게 박수를 치면서, 뛰면서, 웃으면서, 열광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그 노래가 다 끝나기 전에 나와 집으로 왔다. 이 노래의 작곡자의 사상도 불건전하고, 이 노래를 가사도 수상쩍은데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성도들이 그렇게 열광한다는 것이 불쾌하였다. 그것보다 더 싫었던 것은 교회의 분위기를 조금 건전하고 술 냄새 풍기지 않고 열광하는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그런 노래와 분위기가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찬양한답시고 재미나게 노는 것이 아닌가. 아주 흥분하며, 아주 몰입하며, 아주 감정에 깊이 취하여서, 아주 깊은 황홀한 느낌으로 성도들을 몰아가는 것이다. 술, 마약으로 일으킬 수 있는 감정의 흥분을 악기와 조명과 노래를 통하여 교회에서, 예배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성령', '주', '자비'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하여 저것이 다 은혜이고 성령충만이고 하나님의 임재인가.
가창력이 뛰어난 여러 singer들이 앞장서 노래를 부르고, 사람의 감정을 터치하는 위험스럽고 전문적인 악기들이 함께 가동되면 분위기는 하나님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 진다. 그 분위기에 자극되어서 함께 흥분하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서로에게 최고의 최면제이고 흥분제가 되어 버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서 진행되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감정에 깊이 몰입되어서 즐기는 것이다. 법궤를 맞이할 때 다윗이 바지가 흘러내릴 정도로 춤을 추었다는 성경의 기사를 여기에다 갖자 붙이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이다. 그것과는 다르다.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와 구원을 칭송하면 찬양과 스스로의 흥분과 감정에 취하여 빨려 들어가는 무아지경과 종교적 황홀경은 구분해야 한다.
구약의 바알종교가 그랬고, 다른 많은 이방종교들이 저랬다. 고대의 유명한 이방 종교들의 사제들이 술이나 최면제 등으로 황홀경에 빠지면서 그들의 신을 만났다. 무당들도 굿을 시작할 때에 먼저 악기와 노래로 자신들의 감정을 흥분시킨다. 부족하면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대나무가 흔들리는 신 내림의 환경과 여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증한 일이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귀신의 장난이 심했던 빈야드 운동과 함께 지금 문제가 되는 찬양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귀신의 역사를 부리면서 그것을 anointing이라고 하고 power evangelism이라고 하였던 존 윔버가 그런 노래를 교회에 앞장서 도입했었다. 경배와 찬양이라는 노래 사역을 시작한 온누리교회에도 더러운 빈야드 영성이 자리를 잡아 버렸다.
문제는 맑은 정신과 건전한 이성의 예배가 빛을 바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성장을 이루어가는 기독교의 진리와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사람의 흥분과 느낌과 주관적인 감정과 황홀경과 무아지경이 대신하고 있다. 그 고약한 사탄의 포도주를 교회 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 찬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젊은이들을 붙잡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런 열광주의를 젊은이들을 위한 기독교로 고착시켜 가고 있다. 내일은 더욱 더 이러한 현상이 심해지게 되어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분들은 다시 한 번 아멘!"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오른 손을 들고 아멘!"
세상 광고의 문구보다 더 멋지게 선동하는 말들이 가미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고 뛰면서 노래한다. 찬양이라는 미명하게 기독교의 생명이 자랄 토양을 변질되어 간다. 그래서 미혹하는 귀신들의 장난에 무감각해지고 준비되어진 교회들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좀 모인다는 교회들 대부분이 목사들이 앞장서 기타를 메고 강단에서 뛰거나, 찬양팀을 잘 살려서 뛰고 춤을 추게 하는 교회들이다. 이를 어찌할꼬. 모든 사람들이 마다하지 않는 이 달콤한 늪에서 교회들이 헤어 나올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교회들은 더 즐거운 노래를 만들고 부를 것이다. 젊은이들을 위한다면서 더 흥미롭고 즐거움을 주는 사탄의 부어주는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주관과 감성을 고조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맑은 마음과 이성으로 말씀을 받아 순종하며, 말씀에 합당하게 행동하며,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의 결단을 내리면서 살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을 훼방하거나 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노래는 찬양이 아니라 사탄이 교회에 부어주는 가증한 포도주이다. 그것을 받아 마시고 먼저 취하여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노래를 인도하며 성도들을 열광에 빠지게 하는 찬양인도자들에게서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것이 때로는 참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며, 교회를 더럽히는 장난이다.
새로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의 숫자는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그런데 남아 있는 교회들은 이러한 노래를 더 열심히 부르며 취하여 간다. 말씀과 이성이 조화되고 화합되는 참 믿음의 영성이 약해지면서 감성과 느낌과 찬양의 황홀경이 가치가 되는 교회로 변해가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들의 미래가 참 어둡다. 이러한 때에 목회로 부름 받아 진리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분위기에 합류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좇아 외로운 길을 간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릴 방주를 외로이 지어갔던 노아처럼 외로이 좁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목회와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찬양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찬양에 합당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찬양하고, 예배를 더욱 온전하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찬양을 잘 인도하고, 찬양을 잘 부르는 분들이 앞장서 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