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신사도운동에서의 중보기도라는 용어 오용에 대하여(이인규)

주방보조 2012. 5. 13. 01:40

신사도운동과 그 유사단체가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

  

                                                                        

우리는 신사도운동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요엘의 군대, 다윗의 장막. 임파테이션등)에 대해서 살펴 보았으나, 그 용어들은 모두 비성경적이며, 오히려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모두 잘못된 해석에 근거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에 성경을 짜맞추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사도운동에 주장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에 대해서 살펴보자.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사실 성경에 없다. 그래서 어느 장로교 교단은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남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볼 때에 필자는 (비록 중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고 하여도) 중보기도를 부정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그리스도인에게 중보기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에 신사도운동이 사용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아주 잘못된 용어이며, 비성경적인 내용이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용어들은 왜 모두 비성경적인 내용이며, 비성경적인 내용일까? 바로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것이다

2) 중보기도가 은사라는 주장

3) 중보기도가 영적전쟁이라는 주장

4)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주장

5) 중보기도가 예언기도라는 주장

 

(1)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한 이유는 그 죄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중보자가 있었다. 그래서 ‘중보’와 ‘중보기도’는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점은 신사도운동에서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중보기도는 예언을 뜻한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을 하는 자들은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증거로 구약성경구절만을 주로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약에서도 ‘중보자’가 있다는 성경적인 증거를 단 하나도 인용하지 못하고 있다.

 

- 오늘의 중보자들이 증거하듯이 중보사역의 가장 큰 상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중보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선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30쪽)

 

- 오늘의 중보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충성스러운 중보사역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지 않으실 때가 많은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31쪽)

 

물론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자가 필요하였으며, 그 중보자들이 곧 기름부음을 받는 제사장이었으며, 선지자였으며, 사사와 예언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중재하는 중보자였다. 그는 허락된다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위탁하기도 하였다.(출32:30-34).

 

출 32:30-32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사야 역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는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요청하였다(사6장).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선지자는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숯불로 입술을 지지는 정화적인 절차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그러나 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그로 인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신사도운동은 왜 언급하지 않을까?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가 대제사장이 되시므로 이제는 구약의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또 예수가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므로 이제는 구약의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신사도운동에서는 부정을 하는 것이며, 즉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이 곧 제사장이며, 중보자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또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모세의 중보자적 사명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로 제한된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요1:17, 갈3:19-20)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를 세워 당신의 멧세지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임을 말하고 있다.

 

히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더욱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사람 예수라는 것이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왜 신사도운동에서는 구약의 성경구절만을 인용하면서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고 주장할까? 신사도운동은 자신들이 사도이며 선지자라고 주장하는데, 동시에 자신들이 중보자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지금도 중보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온전한 중보자로서 부족하다는 내용과 같으므로 큰 오류가 된다. 그 내용이 바로 히브리서 1:1-2가 된다.

하나님은 선지자나 예언자, 사사를 통하여 혹은 천사를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말씀을 전하여 왔다. 그러나 이 모든 마지막에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계시의 종결이 되어지며, 성경이 곧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한 것이다.

 

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만 한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듯이 중보자가 된다는 주장은 그것 하나만으로 이단이 되고도 남는 참람한 주장이다.

  

2) 중보기도가 은사라는 주장

 

피터와그너는 중보기도가 은사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중보기도를 할 수 없다는 뜻인가? 그런 주장은 어떤 성경을 근거로 하는가?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드릴 수 있듯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누구든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 기도일 뿐이다.

 

- 다른 몇가지 은사는 이 세 주요부분(롬12장, 고전12장, 엡4장)이 아닌 다른 구절에 흩어져 있다. 그 중에 다섯가지는 명백한 것이다. 독신의 은사(고전7:7), 청빈의 은사(고전13:3), 순교의 은사(고전13:3), 대접하는 은사(벧전4:9-10), 선교사의 은사(엡3:6-9)가 그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기록된 은사는 모두 25가지가 된다.... 어쨌든 나의 은사 목록은 지금까지 살펴본 25가지의 은사에 두가지 은사를 더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 두가지는 귀신을 쫓는 은사와 중보기도의 은사이다. 이 두가지를 첨가한 이유는 그 은사의 나타남을 통해 결정한 것이다(방패기도, 49-50쪽)

 

은사라는 것은 공동체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에게 나누어 주는 성령의 선물이다. 그들은 아무 단어에나 은사라고 정의하고 있다. 독신이 은사인가? 순교가 은사인가? 게다가 귀신쫓는 것과 중보기도도 은사인가?

피터와그너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이 그저 은사의 나타남을 보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아래와 같은 설명은 왜 필요한가?

 

- 오래 기도한다. 최소한 하루에 한시간 이상씩 기도하고 많은 경우 하루에 2시간에서 5시간까지 매일 기도한다

- 훨씬 더 강도있게 기도한다

- 기도를 즐기고 개인기도 시간을 만족해 한다

- 기도응답이 많고 또 극적인 편이다

-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많은 경우 예언의 은사를 함께 갖고 있다.

(피터와그너, 방패기도, 56쪽)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인위적이고 자력적으로 오래 기도하고, 강도있게 기도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오래 기도를 하거나 강도있게 기도를 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결국 신사도운동에서는 사도라고 불리는 자신들만이 특별한 중보의 은사를 갖었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예언의 은사를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은사”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뜻한다. 은사가 훈련에 의하여 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선물인가?

중보라는 개념에 대해서 신디제이콥스의 “대적의 문을 취하라”(죠이선교회)라는 책을 통하여 살펴보자. 그는 중보의 훈련이 제1기부터 3기까지 있다고 주장한다.

 

- 저의 중보 훈련 제1기에 해당되는 그 당시 동안...(24쪽)

- 제 2기의 훈련의 또 다른 측면으로 E.M.바운즈나 엔드류 머레이 같은 분들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만 그립이 쓴 <중보기도의 사람, 리즈 하월즈>라는 책을 통하여 의미있는 것들을 말씀하셨습니다.(31쪽)

- 중보자로서의 저의 훈련 3기는 1985년 어느 조용한 날 시작되었습니다.(33쪽)

 

신디 제이콥스는 중보에 대해서 훈련이라는 용어와 함께 1기, 2기, 3기라는 표현을 스스로 정의하고 있다. 그 내용은 제1기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눈물을 흘린 일과 항공사에서 해고를 당하여 갑자기 웃게 된 경우를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자신의 울음에 대해서는 챨스 스펄전의 “눈물은 액체기도”라는 책을 적용시키고, 자신의 웃음에 대해서는 시편126:1-2절을 적용시키고 있다.

 

시 126:1-2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위 시편 본문이 “중보자는 웃게 된다”는 뜻인가?

기독교인이라면 집회에 참석하여 눈물을 한번쯤 흘려본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중보 훈련 제 1기인가? 성경 시편126편1-2절에 해고를 당하여 웃었던 일이 언급되어있는가? 신디제이콥스는 제 2기 훈련기간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성경이 아니라 책을 통하여 중보자로의 훈련을 쌓았는가? 그녀의 제3기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 우리가 지금 응답하고 중보자로 훈련받고 세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영적인 아기들이 믿음으로 태어나기는 해도, 그들이 자라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무너진 대를 막아설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 열방들이 복음의 영광스런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도록 돕는데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중보)할 사람을 ....찾다가 내가 얻지 못하는고로....”(겔22:30)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을 위해 훈련합시다. (42쪽)

 

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성경본문 앞 구절을 보라.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는 현재 신사도운동이 행하는 것과 같이,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이상과 거짓 복술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즉 거짓선지자들의 거짓 이상과 거짓 예언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를 하였기 때문이다.

 

겔 22:28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과연 하나님의 은사가 훈련과 연습에 의하여 세워진 것일까?

아래 모세의 때에 칠십장로는 제1차, 2차, 3차의 훈련과 연습을 하여 예언을 하게 되었을까?

 

민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성령의 은사는 모두 훈련과 연습에 의한 것인가? 그들이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울고 웃었는가? 혹은 서적을 읽고 공부를 하였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는가?

 

고전 12:6-7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디 제이콥스는 그 ‘대적의 문을 취하라’는 책을 통하여 딕 이스트만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중보자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활동이며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훈련에 의하여 예수그리스도와 동일시 되는가?

 

- 중보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신 싸워 주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중보는 우리 자신을 가장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활동이다. 중보가 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중보하는 삶으로 일관 사셨다(딕 이스트만)

 

‘중보자’(히, 멜리츠, 헬, 메시테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는 인류의 죄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죽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를 세웠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서 입술을 숯불로 정화하는 정결의 과정을 거치고 중재자가 될 수 있었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멧세지를 인간에게 전하는 모세나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중보자가 존재하여야만 했다. 자칭사도라고 부르는 신사도운동의 사도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자신들이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중보자라고 자신을 추겨 세우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더이상의 중보자는 필요하지 않으며, 예수만이 유일하신 중보자가 된다. 구약의 중보자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중보기도가 영적전쟁이라는 주장

 

피터와그너는 개인의 체험을 통해서 이러한 이상한 결론을 만들고 있다.

과연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전쟁인가?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의 책 38-39쪽에 의하면 제인이라는 사람이 밤에 잘 때에 가위에 눌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가위에 눌리기도 한다. 그러나 와그너는 이것을 흑암의 세력과 싸운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신디제이콥스가 제인에게 전화를 하여 어젯밤에 당신의 방에서 흑암의 세력을 보았고 함께 중보기도를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피터 와그너는 중보기도가 영적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인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 나는 에드윈 스투브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한다. “중보기도는 전쟁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다. 영적전쟁은 먼저 기도로 이기고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방패기도, 39쪽)

 

이러한 성경적인 증거가 없음을 피터와그너는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복음에 힘쓰던 여인들을 돕고”(빌4:3)에 대해서 피터 와그너는 바울이 “나를 대신하여 영적인 싸움을 싸웠도다 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번역성경은 모두 “애쓰다, 수고하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그 헬라어 단어는 빌1:27에서 “협력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복음에 힘쓰는 사람은 모두 영적전쟁을 하는 것인가? 게다가 그 구절이 중보기도인가? 본문은 누가 보아도, "복음 전파사역에 함께 애를 썼다"는 내용이다.

 

- 하나님은 오늘날 중보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추수를 위한 커다란 그물을 만들고 계십니다. 전례없는 엄청난 숫자의 중보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롯과 나오미,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드보라와 바락들을 함께 불러 마지막 시대의 전투를 감당하게 하고 계십니다(신디제이콥스, 대적의 문을 취하라, 96쪽)

 

중보자들이 매우 많다는 주장도 이상하지만, 왜 중보자들이 추수의 그물을 만들고 있는가? 중보자들이 사람들의 죄를 선택적으로 용서하거나 구원 사역이나 심판 사역에 참여하는가? 게다가 중보자들이 마지막 시대의 전투를 감당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중보자’라는 단어 mediator는 전투를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리 사절, 화해자, 중재자”를 뜻하며, 화해와 평화의 언약을 중재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신사도운동에서는 성경과 정반대의 뜻을 언급하고 있다.

 

- 하나님은 이러한 예언적 중보자들을 깨우셔서, 기도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종종 ‘접전지역’으로 나아가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견고한 진을 파하기도 하고 나라들을 덮고 있는 정사와 권세들과 싸우기도 합니다. 그들은 적의 방어 진지에 틈새를 내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부흥을 일으킬 수 있게 하거나,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있게 하기도 합니다. 현대 군 전략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어떤 지역에 주님의 목적을 위한 통로를 예비하기 위해 먼저 들어가는 것입니다.(신디 제이콥스, 대적의 문을 취하라, 107쪽)

 

신디 제이콥스가 말하는 중보자는 성경이 언급하는 화해와 평화의 언약을 중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공대이며, 성경에는 그런 중보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특히 중보기도도 하나의 기도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나 신디 제이콥스를 비롯한 신사도운동은 중보기도를 견고한 진을 파괴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부르고 있다.

 

피터 와그너는 기도로 에이즈감염률이 33.3%에서 5%로 떨어졌다고 말하며, 그는 광우병이 없어진 것도 그의 중보기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모든 악이 사탄이 원인이며,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결론적으로 사도의 체제로 바꾸어서 중보자들이 중보기도를 하면 이 세상의 악과 재앙과 질병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4)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주장

 

비성경적이고 황당한 주장은 사도라고 불리는 자들의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여 자꾸 추가되고, 만들어진다.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해괴망칙한 주장이다. 이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은 무언가 대외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곤란한 내용을 기도하는 것 같다

 

- 비밀을 유지하는 은밀함 : 신디 제이콥스는 개인 중보기도자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이 비밀을 유지하는 은밀함이라고 말한다. 내가 처음 중보기도 동역자로 짝을 맺은 사람들은 대개가 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오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바비 벌리와 처음 중보기도를 하게된 때를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바비는 우리가 서로 나눈 기도 제목들을 극비로 할 것을 거듭해서 내게 부탁했다. 바비는 개인 기도제목을 비밀로 유지하지 않아서 결국 구설수에 오르고 중보기도도 동역자 개인과 사역에 악영향을 끼쳤던 경우를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이행했다.....더불어 우리가 알게된 사실은 중요한 서류를 은행개인 보관함에 맡겨 놓은 것 만큼이나 중보기도를 의한 정보를 나누는 일이 비밀리에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밀은 목사나 지도자가 위급시 긴밀한 기도를 필요로 할 때에 한해서 누설할 수 있는 것이다.(210-211쪽)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그 중보기도가 서로에게 비밀로 유지되었는가, 아니면 공개적으로 기도를 하였을까?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가 비밀유지를 하면서 행하여졌다는 언급이 없다. 사도바울은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공개적으로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가?

 

골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히 13:18-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살전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야고보서는 서로 공개적으로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다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성경은 서로 비밀유지를 하면서 기도를 하라고 언급하지 않으며 합심하여 기도를 하라고 말하고 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5) 중보기도가 예언이라는 주장

 

중보기도는 은사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중보기도가 왜 예언기도인가?

 

- 모든 중보기도자들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지만, 때때로 예언적인 중보기도를 하기도 한다. 일부 중보기도자들에게 있어서 예언적 중보기도는 그들이 은사로 받은 중보기도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203쪽)

 

-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손드라 존슨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보기도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적 기도를 하는 대부분의 중보기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어떠한 일의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204-205쪽)

 

신사도운동은 어떤 사람들은 중보기도를 비밀유지를 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중보기도를 예언기도로 하라고 하니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기도가 성령께 받은 은사이며 영적전쟁인가?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가 왜 예언기도가 되어야 하며, 왜 신약시대에 예수님과 다른 중보자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