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예장전도총회(각 교단의 공식자료) | | | 다락방(예장전도, 유광수목사) |
2006.03.07 22:46 |
그동안 류광수목사의 다락방전도운동은 기성교단과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키며 분쟁을 일으켰으며 오랫동안 이단시비가 계속 되어왔다.
이에 류광수목사는 기존 교단과 분열하여 "예장(전도)총회"라고 하는 교단을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류광수목사의 전도총회가 모든 것을 뉘우치고 회개한다고 하며, 예장합동(총회)교단으로 재가입을 시도하고 있으며, 예장합동(총회)측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발표하였다.
물론 다락방측의 재가입에 대해 찬성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음으로 인하여 많은 문제의 소지를 갖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과연 류광수목사가 진정으로 회개하였는가에 대한 것은 알 수가 없으므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류광수목사는 신학교대지 및 건물 50억 상당과 430개의 교회, 601명의 목회자의 헌신을 약속하였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점이 재가입의 조건으로서 작용되지 않았는가라는 비판이 있다.
다락방의 재가입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의 물질적인 증정과 교회수나 목회자 수가 아니라, 그의 신학과 사상이 수정되었는가의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하여야만 할 것이다.
또 그동안 다락방에서 가르쳐 온 사상과 가르침에 젖어있던 교인들에게 그 내용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다시 재교육시킬 수가 있는가가 문제의 관건이 된다.
현재 각 교단에서의 다락방전도운동에 대한 이단성의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으며, 그동안 다락방에 대한 연구발표는 해제되거나 취소된 적은 없다.
과연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알아보자.
▶ 각 교단의 연구와 발표
예장합동
1996년/80회 다락방 확산방지 및 이단성 규명에 관한 조사위원회 구성 연구돌입
1996년/81회 구원론. 마귀론에서 심각한 오류/ 이단으로 규정/ 관련자 노회별로 시벌. 답습 금지
예장통합
1996년/81회 사이비성으로 규정/ 마귀론, 기성교회 부정적 비판, 다락방식 영접/ 참여 답습 금지
기성
1997년/52회 사이비운동/ 집회참석 책자사용 가담자는 교단 특별법 따라 엄중 처벌
기감
1998년.87호 이단으로 규정/ 감리교신학과는 너무나 큰 차이 드러냄/ 참여 동조금지
기침
이단으로 규정 참여금지령
예장고려
1995년/45회 비개혁주의 사상. 비복음주의. 균형을 잃은 신앙. 사단. 축사신학 이단사이비규정
예장개혁
1995년/80회 이단 사이비의 불건전 단체로 규정 성명서 발표/ 참여. 도입 금지령
예장고신
1995년/45회 1997년/47회 불건전운동 규정/ 참여금지. 지속적 참여자 징계/ 신대원교수들에게 연구위임/ 이단으로 규정/ 관련자 권징
고신교수
1998년.8.30 고려신학대학원교수회/ 고신 총회에 제출된 교수 보고서/연구결과 이단 판정서
▶ 요약과 결론
(1) 류광수씨가 예장 합동측 부산노회로부터 목사면직 처분을 받은 것은 91년도의 일이다. 그 이유는 음주운전 사고와 뺑소니로 구속된 사실, 그리고 성락교회 베뢰아의 김기동 이단사상과의 유사성 및 관련성 등의 이유였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므로서 목회자적인 도덕성에 문제점을 나타내었다.
(2) 다락방의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구원의 단계를 몇가지로 분류하여 아는 단계, 영접하는 단계, 믿는 단계등으로 구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예수를 아는 단계에서 벗어나 예수를 재영접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락방측은 그것을 오해이며 표현상의 실수라고 부정하고 변명하였지만, 다락방의 교재와 문헌에서 는 그러한 사상이 명백히 발견되어졌다.
(3) 다락방의 교재와 문헌을 볼 때에 베뢰아 성락교회의 귀신론과 매우 유사한 주장이 곳곳에서 발견되어지며, 마귀를 결박하는 것이 구원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므로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류광수목사는 자신이 베뢰아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베뢰아 산해원(마산 소재)에 많은 교인들을 데리고 여러번 방문하였다는 증거가 있었으며, 다락방 교재에서의 류광수목사의 견해는 베뢰아의 주장과 글자까지도 동일하게 일치하는 부분들이 발견되어졌다.
그의 성경해석과 강의는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그는 구원론을 마귀와 하나님과의 이원론적인 시각으로만 보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마귀를 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알아야만 구원이 있고, 예수를 재영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의 98%가 마귀에게 사로 잡혀 있다고 하므로써 이미 예수를 믿는 자도 다시 예수를 영접하여야만 한다는 주장을 하며, 모든 문제를 다락방에서 다시 시작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4) 다락방에서 예수를 믿으면 성도들이 천사동원권, 사탄결박권, 기도청구권등의 권세를 갖게 된다는 주장을 강조하므로서, 인위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견해를 강조한다. 또한 예수를 영접한 자가 기도를 하면 3일만에 응답이 있어야 하며, 응답이 없으면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들 수가 있다. 류광수목사는 "3일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저는 3일을 넘긴 일이 없습니다"(현장복음메시지 2편 p.120)라고 주장을 한다.
또 이러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교회 다니는 사람중에 기도 응답 받지 못한 사람을 추적해 보면 예수님을 진짜 영접 안해서 그래요"(현장복음메시지 2편 p.11).
즉 다락방에서 예수를 영접하여야만 천사동원권과 사탄결박권, 기도청구권과 같은 능력을 받게 된다는 신비주의적인 주장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5) 기존교회가 그동안 잘못 가르치고 있으며, 다락방에서만 진리를 가르친다는 주장을 자꾸 강조하므로 배타적인 분열을 강조하고 있다. 기존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를 다시 영접하여야만 한다는 <재영접론>이라는 주장이 다락방에서 그동안 명백하게 강조되어지고 있었다. 다락방교리를 수용한 교회에서 다락방의 교리를 반대하는 성도들과 수용하는 목사측의 대립으로 교회가 분열되어진 실제 예가 상당히 많이 있어 왔다.
▶ 감리교의 입장 - 다음 글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공식논평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강단과 목회" 1998년 봄호, 85-87에 연재된 내용이다.
1. 경과
선교국은 기성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이단이냐, 아니면 순수한 복음 전도운동이냐의 서로 상반된 견해로 맞서고 있는 다락방 운동의 이단시비를 가리기 위해서 "교회와 사회문제 연구위원회"의 모임을 갖고 (97년) 3월부터 자료를 조사, 수집하여 지금까지 4차례(5/19, 6/9, 8/22, 9/5) 에 걸쳐 연구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양측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연구조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평가를 내리어 감독회의와 총회가 설치한 신학정책위원회에 제출 하기로 하였다.
2. 평가
첫째, 무엇보다 먼저 다락방신학은 성경 66권을 정확무오한,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성서에 표현된 모든 구절을 거리낌없이 문자적으로 사용한다. 마귀, 천사, 사탄, 지옥 등 현대인에게 낯선,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기 충분한 표현들을 주로 인용한다.
감리교 신학 역시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근거,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가르치는 일에 유익하며 그것에 반대되는 것은 책망하고 잘못은 고쳐주며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믿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감리교 신학은 종교개혁의 원리인 '성서로만'(sola scriptura)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Sola"가 배타적으로가 아니라 '일차적'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역시 주목해야 한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특별히 정신적으로 나약한 현대인들을 미혹시킬 수 있는 구절들을 거론하며 그리스도교 복음을 증언하려는 태도는 방법에 있어서 문제점이 많다고 보여진다. 성서무오설을 근간으로 하여 성서해석을 비역사적으로, 맥락 및 상황에 관계없이 초월적 신비적 존재들을 멧세지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다락방 신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현실, 세상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 논리로 이원화한다. 인간의 이성적 역할,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현실에 대해 긍정적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상의 현실은 미혹의 영이 증가함에 따라 죄악이 지배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사를 하나님의 영과 미혹의 영의 대결장으로 이해할 때 다락방 선교회의 인간이해 및 역사이해에 무리가 발생할 수 있다.
감리교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논변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요. 종교와 이성은 병행을 이루며, 모든 비이성적 종교는 거짓 종교라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구원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감리교 신학은 강조한다. 비록 하나님의 은총보다 선행되는 인간의 어떤 능력도 존재할 수 없지만 인간은 은총에 의해 회복된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다락방 신학은 인간의 범죄도 미혹의 영의 소인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말함으로 인간 자체의 자유의지를 말할 여지를 두지 못한다. 또한 선행 은총론을 말하는 감리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 밖으로 내던져져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만인구원설을 강조하는 바, 이는 이원론적 세계성을 갖고있는 다락방 신학과는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다.
셋째로, 다락방 신학은 오늘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 나를 반대하지 않은 사람은 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실현시키기는 커녕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허용하고 있지 않다.
성서 해석의 지나친 임의성과 주관적 의도성으로 인해,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전통에 대한 단편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적 해석으로 인해 다락방신학은 매시대 마다 역사적으로 독특한 방식으로 활동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고백하는데 지나치게 인색하다. 오로지 관점을 다락방 신학에 맞추어 놓고 전통을 바라보기에 모든 것이 비판 일변도이다.
과거 전통은 모두 보수. 근본주의이고 다락방 신학이외의 현대사상은 모두 급진. 자유주의로 매도 될 뿐이다. 구체적으로 다락방 신학이 지닌 카톨릭교회에 대한 편견은 지나치다 못해 분노를 느끼게 한다. 다락방 신학은 마리아를 신적 존재로 고백하고 있는 가톨릭교회를 여인(이브)으로부터 이 땅에 범죄가 들어왔던 태초 에덴동산의 현실의 재현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악마적 가톨릭교회가 전파된 곳은 모두가 가난이요, 기근이며 혼동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더욱이 감리교 신학은 가톨릭 전통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 신학 전통에도 많은 빛을 지고 있는 바 - 양심과 이성의 강조, 인간의 완전한 성화사상- 오늘날 요청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자체내에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넷째로, 다락방신학의 구원론은, 복음을 제시하여 아는 단계, 영접하는 단계, 영접기도를 통하여 자기 입으로 시인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다른 이에게 자신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것을 나타내는 단계로써 이렇게 되면 인간을 장악하던 마귀의 힘이 완전히 물러가게 된다고 말한다.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승리하는 축북이 임하는 상태를 구원으로 이해, 정의 내린다. 일견 보면, 다락방 신학은 구원론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의 구분이 애매하다.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안으로 접어 드는 것을 말하는데 그외에 영접이란 개념이 왜 필요한지 의아하다. 다락방 선교회측은 이두 개념을 나눈 적이 없다고 말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영접이란 말의 사용은 기존교회 신앙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접을 말함으로써 기존 기독교인들의 '믿음', '신앙'이 부족하며 기존 교회의 신앙관이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차별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닌가 여겨진다.
더욱이 감리교신학에서 볼 때 다락방 구원관은 다소 문제가 있다. 감리교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질서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회개가 으뜸으로 강조된다. 물론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사건으로 인함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회개를 말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가 언급될 여지를 인정한다. 그러나 회개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감리교 신학은 가르친다. '우리는 신앙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으며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감리교는 인간이 믿음의 상태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죄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되기 어려움을 인정한다. 칭의사건 이후에도 더욱 철저한 회개(고백)를 동반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칭의 이전의 회개를 율법적 회개라고 한다면 칭의 사건 이후를 복음적 회개라고 말한다.
복음적 회개를 통해서만 인간은 성화에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감리교적 구원관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회개운동에 있다. 여기에서 감리교 구원신학이 윤리적이며 복음적이고 사회 지향적인 특성을 갖게된다.
그러나 믿음과 영접을 구분하고 영접하는 행위에 강조점을 두는 다락방 신학은 회개의 필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철저한 회개의 필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다락방신학은 감리교교리에 위반되고 있다.
다섯째로, 다락방 신학의 강점주의 하나는 현장 선교론이라고 보고 싶다.
기성교회로써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학원, 공단, 사회, 직장 속으로 이전하기 어려운바, 다락방 신학은 현장 중시의 선교를 할 수 있는 강점을 얻고 있다. 아마도 초대교회의 교회관을 잘 활용하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평신도에 대한 역할 및 지위 강조도 긍정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것은 현장선교로써의 다락방 신학이 성도들에게 '핍박'만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핍박을 받지 않고서는 복음을 증거하고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가르친다. 만약 이것이 다락방 선교가 말하는 전부라면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수 밖에 없다. 오늘 무감각, 무감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상식과 논리를 넘는 사람과 희생과 봉사의 삶을 보고 놀라며,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삶들, 그들의 종교세계 및 정신에 관심하게 된다.
종교의 힘은 사랑의 능력에 있다.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은 핍박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핍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핍박이란 어휘사용 이면에서 우리는 다락방선교가 얼마나 현실을 적대적, 악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선교하는 자신들을 얼마나 의롭고 온전한 존재로서 인식하는지를 명약관화하게 본다. 선교란 선교 대상자들의 삶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 이해하는 자기비하가 없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겸손이지 핍박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핍박이란 기독교 인들이 절대적 소수였던 기독교 초기시대나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핍박이란 말보다는 사랑과 섬김, 봉사라는 말로 그 의미를 바꿀 필요가 있다. 기독교 종교가 소수자가 아니고 이미 다수자 이며 종교가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제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합리적 사회의 문젯거리가 된 종교들 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황폐케 하는 징조가 될 뿐이다.
여섯째로 다락방 신학은 교회론에 심각한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교회론은 선교학적인 측면에 있어서 심각한 위험성을 노출하고 있다. 류광수 씨의 가르침을 분석해보면 기성교회나 기성교회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가르침이 반복되고 있다. 기성교회에 대한 새로운 영적 각성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신도 포함된 범위 내에서 회개와 각성 을 요구하는 일은 당연한 겸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옳고, 자신의 교회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으나 다른 목사측과 교회들은 모두 틀렸다는 식의 이 논조는 한국교회와 목회현장을 파괴시키려는 의도로 밖에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더군다나 충분한 신학적 훈련과 이해의 준비가 결여된 평신도들에게 기성교회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가르침을 계속 듣게 한다면 그것은 교회현장을 파괴시키거나 이탈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3. 결론
다락방선교가 이단 논쟁에 휩싸이기보다는 건전하게 발전적으로 우리 시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락방 선교단체에서 나오는 글을 읽고 류광수 목사의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 우려할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서 이해, 선교관, 구원관 등에 있어서 이질적인 모습이 밝혀졌다.
감리교신학과의 차이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명확해 졌다. 자신들만 영적인 비밀을 소유하고 있는 양, 자신들이 읽고 해석하는 성서 이해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강조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다락방 선교가 그동안 도외시되고 망각된 복음의 측면을 보완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 전제하에서 그들의 역할과 사명은 긍정될 수 있다. 자신들을 향한 비판의 소리를 핍박으로 이해하고 핍박중에 복음이 더 잘 증거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 잘 일어난다는 교만은 그쳐야 한다.
감리교 목회자도 역시 교회확립의 수단으로, 혹은 목회의 도피구로 다락방 선교를 이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감리교교회의 핵심과 다른 부분이 너무도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다락방 선교의 비대해져 가는 제도를 보면서 필자는 많은 우려를 갖는다. 그 역시 조만간 하나의 섹트(교파)로 변해 버릴 것같은 예감 때문이다. 아니라 하여도 역사는 늘 그렇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류광수목사는 기존 교단과 분열하여 "예장(전도)총회"라고 하는 교단을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류광수목사의 전도총회가 모든 것을 뉘우치고 회개한다고 하며, 예장합동(총회)교단으로 재가입을 시도하고 있으며, 예장합동(총회)측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발표하였다.
물론 다락방측의 재가입에 대해 찬성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음으로 인하여 많은 문제의 소지를 갖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과연 류광수목사가 진정으로 회개하였는가에 대한 것은 알 수가 없으므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류광수목사는 신학교대지 및 건물 50억 상당과 430개의 교회, 601명의 목회자의 헌신을 약속하였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점이 재가입의 조건으로서 작용되지 않았는가라는 비판이 있다.
다락방의 재가입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의 물질적인 증정과 교회수나 목회자 수가 아니라, 그의 신학과 사상이 수정되었는가의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하여야만 할 것이다.
또 그동안 다락방에서 가르쳐 온 사상과 가르침에 젖어있던 교인들에게 그 내용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다시 재교육시킬 수가 있는가가 문제의 관건이 된다.
현재 각 교단에서의 다락방전도운동에 대한 이단성의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으며, 그동안 다락방에 대한 연구발표는 해제되거나 취소된 적은 없다.
과연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알아보자.
▶ 각 교단의 연구와 발표
예장합동
1996년/80회 다락방 확산방지 및 이단성 규명에 관한 조사위원회 구성 연구돌입
1996년/81회 구원론. 마귀론에서 심각한 오류/ 이단으로 규정/ 관련자 노회별로 시벌. 답습 금지
예장통합
1996년/81회 사이비성으로 규정/ 마귀론, 기성교회 부정적 비판, 다락방식 영접/ 참여 답습 금지
기성
1997년/52회 사이비운동/ 집회참석 책자사용 가담자는 교단 특별법 따라 엄중 처벌
기감
1998년.87호 이단으로 규정/ 감리교신학과는 너무나 큰 차이 드러냄/ 참여 동조금지
기침
이단으로 규정 참여금지령
예장고려
1995년/45회 비개혁주의 사상. 비복음주의. 균형을 잃은 신앙. 사단. 축사신학 이단사이비규정
예장개혁
1995년/80회 이단 사이비의 불건전 단체로 규정 성명서 발표/ 참여. 도입 금지령
예장고신
1995년/45회 1997년/47회 불건전운동 규정/ 참여금지. 지속적 참여자 징계/ 신대원교수들에게 연구위임/ 이단으로 규정/ 관련자 권징
고신교수
1998년.8.30 고려신학대학원교수회/ 고신 총회에 제출된 교수 보고서/연구결과 이단 판정서
▶ 요약과 결론
(1) 류광수씨가 예장 합동측 부산노회로부터 목사면직 처분을 받은 것은 91년도의 일이다. 그 이유는 음주운전 사고와 뺑소니로 구속된 사실, 그리고 성락교회 베뢰아의 김기동 이단사상과의 유사성 및 관련성 등의 이유였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므로서 목회자적인 도덕성에 문제점을 나타내었다.
(2) 다락방의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구원의 단계를 몇가지로 분류하여 아는 단계, 영접하는 단계, 믿는 단계등으로 구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예수를 아는 단계에서 벗어나 예수를 재영접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락방측은 그것을 오해이며 표현상의 실수라고 부정하고 변명하였지만, 다락방의 교재와 문헌에서 는 그러한 사상이 명백히 발견되어졌다.
(3) 다락방의 교재와 문헌을 볼 때에 베뢰아 성락교회의 귀신론과 매우 유사한 주장이 곳곳에서 발견되어지며, 마귀를 결박하는 것이 구원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므로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류광수목사는 자신이 베뢰아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베뢰아 산해원(마산 소재)에 많은 교인들을 데리고 여러번 방문하였다는 증거가 있었으며, 다락방 교재에서의 류광수목사의 견해는 베뢰아의 주장과 글자까지도 동일하게 일치하는 부분들이 발견되어졌다.
그의 성경해석과 강의는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그는 구원론을 마귀와 하나님과의 이원론적인 시각으로만 보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마귀를 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알아야만 구원이 있고, 예수를 재영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의 98%가 마귀에게 사로 잡혀 있다고 하므로써 이미 예수를 믿는 자도 다시 예수를 영접하여야만 한다는 주장을 하며, 모든 문제를 다락방에서 다시 시작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4) 다락방에서 예수를 믿으면 성도들이 천사동원권, 사탄결박권, 기도청구권등의 권세를 갖게 된다는 주장을 강조하므로서, 인위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견해를 강조한다. 또한 예수를 영접한 자가 기도를 하면 3일만에 응답이 있어야 하며, 응답이 없으면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들 수가 있다. 류광수목사는 "3일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저는 3일을 넘긴 일이 없습니다"(현장복음메시지 2편 p.120)라고 주장을 한다.
또 이러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교회 다니는 사람중에 기도 응답 받지 못한 사람을 추적해 보면 예수님을 진짜 영접 안해서 그래요"(현장복음메시지 2편 p.11).
즉 다락방에서 예수를 영접하여야만 천사동원권과 사탄결박권, 기도청구권과 같은 능력을 받게 된다는 신비주의적인 주장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5) 기존교회가 그동안 잘못 가르치고 있으며, 다락방에서만 진리를 가르친다는 주장을 자꾸 강조하므로 배타적인 분열을 강조하고 있다. 기존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를 다시 영접하여야만 한다는 <재영접론>이라는 주장이 다락방에서 그동안 명백하게 강조되어지고 있었다. 다락방교리를 수용한 교회에서 다락방의 교리를 반대하는 성도들과 수용하는 목사측의 대립으로 교회가 분열되어진 실제 예가 상당히 많이 있어 왔다.
▶ 감리교의 입장 - 다음 글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공식논평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강단과 목회" 1998년 봄호, 85-87에 연재된 내용이다.
1. 경과
선교국은 기성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이단이냐, 아니면 순수한 복음 전도운동이냐의 서로 상반된 견해로 맞서고 있는 다락방 운동의 이단시비를 가리기 위해서 "교회와 사회문제 연구위원회"의 모임을 갖고 (97년) 3월부터 자료를 조사, 수집하여 지금까지 4차례(5/19, 6/9, 8/22, 9/5) 에 걸쳐 연구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양측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연구조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평가를 내리어 감독회의와 총회가 설치한 신학정책위원회에 제출 하기로 하였다.
2. 평가
첫째, 무엇보다 먼저 다락방신학은 성경 66권을 정확무오한,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성서에 표현된 모든 구절을 거리낌없이 문자적으로 사용한다. 마귀, 천사, 사탄, 지옥 등 현대인에게 낯선,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기 충분한 표현들을 주로 인용한다.
감리교 신학 역시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근거,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가르치는 일에 유익하며 그것에 반대되는 것은 책망하고 잘못은 고쳐주며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믿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감리교 신학은 종교개혁의 원리인 '성서로만'(sola scriptura)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Sola"가 배타적으로가 아니라 '일차적'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역시 주목해야 한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특별히 정신적으로 나약한 현대인들을 미혹시킬 수 있는 구절들을 거론하며 그리스도교 복음을 증언하려는 태도는 방법에 있어서 문제점이 많다고 보여진다. 성서무오설을 근간으로 하여 성서해석을 비역사적으로, 맥락 및 상황에 관계없이 초월적 신비적 존재들을 멧세지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다락방 신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현실, 세상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 논리로 이원화한다. 인간의 이성적 역할,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현실에 대해 긍정적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상의 현실은 미혹의 영이 증가함에 따라 죄악이 지배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사를 하나님의 영과 미혹의 영의 대결장으로 이해할 때 다락방 선교회의 인간이해 및 역사이해에 무리가 발생할 수 있다.
감리교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논변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요. 종교와 이성은 병행을 이루며, 모든 비이성적 종교는 거짓 종교라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구원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감리교 신학은 강조한다. 비록 하나님의 은총보다 선행되는 인간의 어떤 능력도 존재할 수 없지만 인간은 은총에 의해 회복된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다락방 신학은 인간의 범죄도 미혹의 영의 소인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말함으로 인간 자체의 자유의지를 말할 여지를 두지 못한다. 또한 선행 은총론을 말하는 감리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 밖으로 내던져져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만인구원설을 강조하는 바, 이는 이원론적 세계성을 갖고있는 다락방 신학과는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다.
셋째로, 다락방 신학은 오늘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 나를 반대하지 않은 사람은 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실현시키기는 커녕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허용하고 있지 않다.
성서 해석의 지나친 임의성과 주관적 의도성으로 인해,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전통에 대한 단편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적 해석으로 인해 다락방신학은 매시대 마다 역사적으로 독특한 방식으로 활동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고백하는데 지나치게 인색하다. 오로지 관점을 다락방 신학에 맞추어 놓고 전통을 바라보기에 모든 것이 비판 일변도이다.
과거 전통은 모두 보수. 근본주의이고 다락방 신학이외의 현대사상은 모두 급진. 자유주의로 매도 될 뿐이다. 구체적으로 다락방 신학이 지닌 카톨릭교회에 대한 편견은 지나치다 못해 분노를 느끼게 한다. 다락방 신학은 마리아를 신적 존재로 고백하고 있는 가톨릭교회를 여인(이브)으로부터 이 땅에 범죄가 들어왔던 태초 에덴동산의 현실의 재현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악마적 가톨릭교회가 전파된 곳은 모두가 가난이요, 기근이며 혼동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더욱이 감리교 신학은 가톨릭 전통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 신학 전통에도 많은 빛을 지고 있는 바 - 양심과 이성의 강조, 인간의 완전한 성화사상- 오늘날 요청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자체내에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넷째로, 다락방신학의 구원론은, 복음을 제시하여 아는 단계, 영접하는 단계, 영접기도를 통하여 자기 입으로 시인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다른 이에게 자신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것을 나타내는 단계로써 이렇게 되면 인간을 장악하던 마귀의 힘이 완전히 물러가게 된다고 말한다.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승리하는 축북이 임하는 상태를 구원으로 이해, 정의 내린다. 일견 보면, 다락방 신학은 구원론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의 구분이 애매하다.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안으로 접어 드는 것을 말하는데 그외에 영접이란 개념이 왜 필요한지 의아하다. 다락방 선교회측은 이두 개념을 나눈 적이 없다고 말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영접이란 말의 사용은 기존교회 신앙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접을 말함으로써 기존 기독교인들의 '믿음', '신앙'이 부족하며 기존 교회의 신앙관이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차별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닌가 여겨진다.
더욱이 감리교신학에서 볼 때 다락방 구원관은 다소 문제가 있다. 감리교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질서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회개가 으뜸으로 강조된다. 물론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사건으로 인함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회개를 말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가 언급될 여지를 인정한다. 그러나 회개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감리교 신학은 가르친다. '우리는 신앙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으며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감리교는 인간이 믿음의 상태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죄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되기 어려움을 인정한다. 칭의사건 이후에도 더욱 철저한 회개(고백)를 동반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칭의 이전의 회개를 율법적 회개라고 한다면 칭의 사건 이후를 복음적 회개라고 말한다.
복음적 회개를 통해서만 인간은 성화에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감리교적 구원관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회개운동에 있다. 여기에서 감리교 구원신학이 윤리적이며 복음적이고 사회 지향적인 특성을 갖게된다.
그러나 믿음과 영접을 구분하고 영접하는 행위에 강조점을 두는 다락방 신학은 회개의 필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철저한 회개의 필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다락방신학은 감리교교리에 위반되고 있다.
다섯째로, 다락방 신학의 강점주의 하나는 현장 선교론이라고 보고 싶다.
기성교회로써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학원, 공단, 사회, 직장 속으로 이전하기 어려운바, 다락방 신학은 현장 중시의 선교를 할 수 있는 강점을 얻고 있다. 아마도 초대교회의 교회관을 잘 활용하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평신도에 대한 역할 및 지위 강조도 긍정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것은 현장선교로써의 다락방 신학이 성도들에게 '핍박'만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핍박을 받지 않고서는 복음을 증거하고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가르친다. 만약 이것이 다락방 선교가 말하는 전부라면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수 밖에 없다. 오늘 무감각, 무감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상식과 논리를 넘는 사람과 희생과 봉사의 삶을 보고 놀라며,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삶들, 그들의 종교세계 및 정신에 관심하게 된다.
종교의 힘은 사랑의 능력에 있다.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은 핍박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핍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핍박이란 어휘사용 이면에서 우리는 다락방선교가 얼마나 현실을 적대적, 악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선교하는 자신들을 얼마나 의롭고 온전한 존재로서 인식하는지를 명약관화하게 본다. 선교란 선교 대상자들의 삶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 이해하는 자기비하가 없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겸손이지 핍박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핍박이란 기독교 인들이 절대적 소수였던 기독교 초기시대나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핍박이란 말보다는 사랑과 섬김, 봉사라는 말로 그 의미를 바꿀 필요가 있다. 기독교 종교가 소수자가 아니고 이미 다수자 이며 종교가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제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합리적 사회의 문젯거리가 된 종교들 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황폐케 하는 징조가 될 뿐이다.
여섯째로 다락방 신학은 교회론에 심각한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교회론은 선교학적인 측면에 있어서 심각한 위험성을 노출하고 있다. 류광수 씨의 가르침을 분석해보면 기성교회나 기성교회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가르침이 반복되고 있다. 기성교회에 대한 새로운 영적 각성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신도 포함된 범위 내에서 회개와 각성 을 요구하는 일은 당연한 겸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옳고, 자신의 교회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으나 다른 목사측과 교회들은 모두 틀렸다는 식의 이 논조는 한국교회와 목회현장을 파괴시키려는 의도로 밖에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더군다나 충분한 신학적 훈련과 이해의 준비가 결여된 평신도들에게 기성교회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가르침을 계속 듣게 한다면 그것은 교회현장을 파괴시키거나 이탈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3. 결론
다락방선교가 이단 논쟁에 휩싸이기보다는 건전하게 발전적으로 우리 시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락방 선교단체에서 나오는 글을 읽고 류광수 목사의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 우려할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서 이해, 선교관, 구원관 등에 있어서 이질적인 모습이 밝혀졌다.
감리교신학과의 차이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명확해 졌다. 자신들만 영적인 비밀을 소유하고 있는 양, 자신들이 읽고 해석하는 성서 이해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강조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다락방 선교가 그동안 도외시되고 망각된 복음의 측면을 보완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 전제하에서 그들의 역할과 사명은 긍정될 수 있다. 자신들을 향한 비판의 소리를 핍박으로 이해하고 핍박중에 복음이 더 잘 증거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 잘 일어난다는 교만은 그쳐야 한다.
감리교 목회자도 역시 교회확립의 수단으로, 혹은 목회의 도피구로 다락방 선교를 이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감리교교회의 핵심과 다른 부분이 너무도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다락방 선교의 비대해져 가는 제도를 보면서 필자는 많은 우려를 갖는다. 그 역시 조만간 하나의 섹트(교파)로 변해 버릴 것같은 예감 때문이다. 아니라 하여도 역사는 늘 그렇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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