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강병송님의 글 모음

죽음...

주방보조 2008. 7. 10. 15:26
  • 번호 110044 | 2007.10.08 IP 61.3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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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체가 고통자체라고 볼 때 죽음은 쉼입니다.

 

영원의 시간(ages to age) 안에서 한 개인의 생명은 먼지 티끌만큼이나 적습니다. 개인이 많이 산다고해야 논에 추수하는 것 80번 보면 대충 인생을 마감짓게 되어 있습니다. 80 × 365일을 계산하면  29,200일정도를 살겁니다. 달수로 따지자면 80×12개월이니까 960달 정도 될겁니다.

 

한 개인은 이렇게 유한한 인생을 삽니다. 그것도 직선적 시간개념속에서 살아갑니다. 죽음에서 출발하여 생을 거꾸로 살아서 출생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

 

그 유한한 삶은 의식주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의 확보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하는 과정이고,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해야 겨우 살아 남는 눈물의 여정입니다.

 

그 눈물겨운 여정속에서 건강의 상실과 신분을 통한 사람의 사람 지배라는 구조가 개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 신분은 토지의 강탈과 생존기반의 붕괴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구약성경의 주제입니다. 힘으로든, 신분으로든, 돈으로든 어느 것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주제입니다.

 

구약 성경은 토지무르기제도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돈이 없어서 토지를 팔았다하더라도 친인척이나 보호자가 댓가를 지불하고 토지를 물러 줄 것을 요구할 때는 당연히 돌려주어야한다는 제도 입니다.

 

이는 자신의 세상을 연원한 현재인 자존자에게 대적하는 자에게 넘겨주고, 그 대적하는 자의 지배구조속에서 신음하는 인류를 대신하여 구세주가 댓가를 지불하고 인류 원래의 것을 회복하는 원칙을 예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고가 동방교회들과 정교회의 흐름과 서유럽(로마가톨릭 및 개신교)와 다릅니다. 원래 기독교의 발상지가 예루살렘이며, 그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입니다. 이 교회들은 지금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에 의하면 원죄는 연좌제와 다릅니다. 각 개인이 짖지도 아니한 죄를 묻는 그러한 원죄의 개념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처한 "절대자로부터의 분리"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예수가 죽은자들의 세계에 내려갔고, 거기서 선포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가 절대자와의 관계회복이 되는 것을 바랍니다.

 

사람이 스스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이미 그걸 달성하였을겁니다. 그러나 생래적으로 절대자에 대적하는 자의 지배구조속에서 하나가 되어 버린 인류는  어느 누구도 절대자로부터의 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해골산위의 십자가...

 

해골들이 모인 죽음의 산, 그 위에 조물주가 십자가라는 극형을 당하고 죽는 그 모습은 조물주가 스스로 인류를 대신해서 감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식 십자가에서 잘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감상꺼리가 아니라 나 개인과 인류공동체의 실존문제입니다.

 

돈이 있는 자, 높은 신분유지가 확실한 자에게는 인자한 미소가 배어 있습니다.그러나 땅 한 조각도 소유하지 못한 자는 항상 불안합니다. 절대자에게는 인자한 미소가 통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의 웃는 모습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누가복음 1장 15절에 "소주"라는 단어도 나오지만 웃는 모습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기부행위와 이른바 '가진 자들'의 나누어주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자의 각 개인을 수단으로 삼는 비인간적 지배구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감사의 성찬례(유카리스트)와 성령의 은사입니다.

 

원래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의탁한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고, 물에 3번 잠기는 세례를 통해 시작합니다. 그 세례는 장례풍의 곡으로 시작하여 기쁨의 노래로 끝납니다.  죽음와 재생을 겪는 절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생을 한 인류가 절대자의 살과 피를 가지고 "현재" 절대자가 이루어 준 생명을 나누는 잔치인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성찬례를 위해 원로와 감독이(교회의 직제)가 생겨난 것이며, 그러한 직제는 아무나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계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직제의 족보가 동방쪽의 교회에서는 "딥디크"라고 하여 지금도 내려오며, 현재그 딥티크에 로마교황은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전쟁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전쟁은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십자군이 침공한 경로를 보세요. 이슬람의 본거지와는 상관이 없는 지역입니다. 고대의 기독교 총대주교청이 있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치오키아, 예루살렘, 그리고 이슬람과는 상관이 없는 콘스탄티노플이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이라는 허상을 만들어서 프랑크 국왕을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하기 위해 로마교회가 교황대리권을 주장하자 전체교회가 부정하였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예루살렘,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을 무력으로 침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수느 동로마제국 황제가 서로마제국을 잃어버린 땅으로 간주하고 그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하엿던 것 아닙니까?

 

죽음, 그 죽음의 세계질서에서 종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각개인의 죽음 뿐 아니라 인류공동체의 죽음의 과정에서 종교가 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생들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테오 후서 6장]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인 그대는 이런 것들을 멀리하고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시오. (중략)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정하신 때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복되신 주권자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고 군주 중의 군주이십니다.


그분은 홀로 불멸하시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사람이 일찌기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영예와 권세가 영원히 그분에게 있기를 빕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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