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에 대한 단상 [7]
- 무딘스키
칼마르크스의 주장은 유물론과 국가소멸론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칼마르크스가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은 근대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여 빈익빈 부익부가 가장 심화되었던 시기이다.
자본주의는 집적된 돈으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위치에 까지 이른 자본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고 유지되는 경제체제이다.
이 자본에 정치,경제,종교,사회,문화, 교육등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전에는 봉건주의가 사회의 구성의 기본원리였다.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고 신분에 따라 토지를 소유하며, 낮은 신분의 노동력으로 유지되는 체제가 봉건제도였다.
봉건제도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 자본주의이고,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정체성을 던져준 것 중에 종교개혁도 포함된다.
자본주의의 기본이념은 크게 세가지이다.
1. 인격평등의 원칙
2. 계약자유의 원칙
3. 과실책임주의였다.
자본주의는 봉건제 국가를 인권침해의 당사자로 보고 국가에 대하여 대립을 하였다.
국가가 침해하지 말아야 할 기본적 인권을 만들어 나간 것이 자유권적 기본권이다.
그러한 자유권적 기본권의 기본 사상은 인격평등의 원칙이다.
평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하고, 계약을 하며, 그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논리를 그들은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책임이 없는 사안에 대하여는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흐름의 국가에 대한 투쟁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들이 구상한 자본주의는 승리하였고, 봉건제도는 붕괴되었으며, 종래의 신분이 자본으로대체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종래에는 신분에 따라 사람의 차등을 규정하던 것에 비하여 자본주의는 실질적으로는 평등하지 아니한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여 더욱 모순적인 문제들을 만들어 내었다.
경제적으로 풍부한 사람과 풍부하지 아니한 사람은 사실상 평등하지가 않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평등하지 아니한 것을 평등한 것처럼 속이는 결과가 되어 약자를 또한번 울리는 결과가 되었다.
종래에는 너무 전제주의적이었다면 자본주의는 너무 개인적인 것이 되어 자본의 소유만큼 인생을 향유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신분에서 자본으로 바뀌 것 뿐 실제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봉건주의 당시에는 봉건제도와 융합하여 봉건제도의 틀을 유지하였고,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와 융합하여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주장을 성경을 총동원하여 치장하였다.
이승에서의 삶이 저승을 결정짖는다는 가정하에 결국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결과가 되어 교회로부터 소외된 사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소외된다는 결론이 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영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 마르크스의 사상이 등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경제,사회학 적이었다.
그는 복음에 관한 문제 보다는 종교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였으며, 그는 하느님의 통치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는 영벌이란 감옥에서 사람들에게 사후에는 "무"로 돌아간다는 확실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생존하는 기간동안에 향유할 자본에 관하여 말을 하였다.
노동의 착취와 이윤으로 자존하는 자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는 메시아적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신분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소멸하여 인간을 억압하지 아니하는 국가소멸이라는 유토피아를 제시하였다.
물론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는 소멸하지 아니하고 제국주의로 변한다고 주장하며 반제국주의 투쟁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었다. 그 결과 세계는 국가가 소멸하고 들어설 공산사회 추종자들과 그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옹호론자들로 나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서 대한제국도 망하고 식민지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개의 영역으로 뉘나어져 버렸다. 우리의 교회는 어떠했는가? 복음과 반공을 동일시하며,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힘을 잃었다.
거의 사탄의 현현이라고 공박해왔던 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사라지고, 교회는 자유스러운 상태로 남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신분->자본의 연장선상에서 무엇인가를 또 만들어 내야할 것인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이지 않는 관념상의 테러라는 것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주의, 관념주의, 물질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과거 칼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복음(?)이 전해질 때마다 쒸~입기만하고 있어야할 것인가?
우리가 이데올로기와 복음을 혼동하고 부화뇌동하는 사이 우리의 가난한 이웃은 얼마나 복음에서도 소외되었는가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바로 지금 나의 이웃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아니하고, 과거만을 향한 시선을 가진다면 예수님도 우리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과거로 가지 않을까?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칼마르크스는 복음을 외면하고 종교적인 권력을 추구한 교회체제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등함을 부정하고 신분과 자본을 가지고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체제에 대한 반사 작용이 아닐까?
그런데 남의 들보는 잘보고 내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그러한 교회로 남는다면?
칼마르크스보다도 못할 것이다. 반사작용도 없는 죽은 연못이 될 거이다.
안티들만 날파리처럼 윙윙거리는 그 연못...
죽은 민족이란 단어 박제품만 둥둥 떠다니는 그런 죽은 연못...
칼마르크스가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은 근대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여 빈익빈 부익부가 가장 심화되었던 시기이다.
자본주의는 집적된 돈으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위치에 까지 이른 자본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고 유지되는 경제체제이다.
이 자본에 정치,경제,종교,사회,문화, 교육등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전에는 봉건주의가 사회의 구성의 기본원리였다.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고 신분에 따라 토지를 소유하며, 낮은 신분의 노동력으로 유지되는 체제가 봉건제도였다.
봉건제도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 자본주의이고,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정체성을 던져준 것 중에 종교개혁도 포함된다.
자본주의의 기본이념은 크게 세가지이다.
1. 인격평등의 원칙
2. 계약자유의 원칙
3. 과실책임주의였다.
자본주의는 봉건제 국가를 인권침해의 당사자로 보고 국가에 대하여 대립을 하였다.
국가가 침해하지 말아야 할 기본적 인권을 만들어 나간 것이 자유권적 기본권이다.
그러한 자유권적 기본권의 기본 사상은 인격평등의 원칙이다.
평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하고, 계약을 하며, 그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논리를 그들은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책임이 없는 사안에 대하여는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흐름의 국가에 대한 투쟁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들이 구상한 자본주의는 승리하였고, 봉건제도는 붕괴되었으며, 종래의 신분이 자본으로대체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종래에는 신분에 따라 사람의 차등을 규정하던 것에 비하여 자본주의는 실질적으로는 평등하지 아니한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여 더욱 모순적인 문제들을 만들어 내었다.
경제적으로 풍부한 사람과 풍부하지 아니한 사람은 사실상 평등하지가 않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평등하지 아니한 것을 평등한 것처럼 속이는 결과가 되어 약자를 또한번 울리는 결과가 되었다.
종래에는 너무 전제주의적이었다면 자본주의는 너무 개인적인 것이 되어 자본의 소유만큼 인생을 향유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신분에서 자본으로 바뀌 것 뿐 실제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봉건주의 당시에는 봉건제도와 융합하여 봉건제도의 틀을 유지하였고,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와 융합하여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주장을 성경을 총동원하여 치장하였다.
이승에서의 삶이 저승을 결정짖는다는 가정하에 결국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결과가 되어 교회로부터 소외된 사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소외된다는 결론이 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영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 마르크스의 사상이 등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경제,사회학 적이었다.
그는 복음에 관한 문제 보다는 종교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였으며, 그는 하느님의 통치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는 영벌이란 감옥에서 사람들에게 사후에는 "무"로 돌아간다는 확실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생존하는 기간동안에 향유할 자본에 관하여 말을 하였다.
노동의 착취와 이윤으로 자존하는 자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는 메시아적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신분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소멸하여 인간을 억압하지 아니하는 국가소멸이라는 유토피아를 제시하였다.
물론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는 소멸하지 아니하고 제국주의로 변한다고 주장하며 반제국주의 투쟁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었다. 그 결과 세계는 국가가 소멸하고 들어설 공산사회 추종자들과 그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옹호론자들로 나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서 대한제국도 망하고 식민지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개의 영역으로 뉘나어져 버렸다. 우리의 교회는 어떠했는가? 복음과 반공을 동일시하며,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힘을 잃었다.
거의 사탄의 현현이라고 공박해왔던 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사라지고, 교회는 자유스러운 상태로 남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신분->자본의 연장선상에서 무엇인가를 또 만들어 내야할 것인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이지 않는 관념상의 테러라는 것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주의, 관념주의, 물질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과거 칼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복음(?)이 전해질 때마다 쒸~입기만하고 있어야할 것인가?
우리가 이데올로기와 복음을 혼동하고 부화뇌동하는 사이 우리의 가난한 이웃은 얼마나 복음에서도 소외되었는가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바로 지금 나의 이웃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아니하고, 과거만을 향한 시선을 가진다면 예수님도 우리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과거로 가지 않을까?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칼마르크스는 복음을 외면하고 종교적인 권력을 추구한 교회체제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등함을 부정하고 신분과 자본을 가지고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체제에 대한 반사 작용이 아닐까?
그런데 남의 들보는 잘보고 내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그러한 교회로 남는다면?
칼마르크스보다도 못할 것이다. 반사작용도 없는 죽은 연못이 될 거이다.
안티들만 날파리처럼 윙윙거리는 그 연못...
죽은 민족이란 단어 박제품만 둥둥 떠다니는 그런 죽은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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