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지막글 입니다.^^ [7]
- 무딘스키
1928년부터 1931년까지 3년동안 중국 대륙 복건성 협화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종교사상사'를 강의 했던 王治心 교수의 글을 대만의 보인대학에서 공부한 전명용님이 옮긴 중국 종교사상사를 올려 드립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입장에서 쓴 글도 아니고 불교 입장에서 쓴 글도 아닙니다. 다만 한나라에 전래된 불교의 상태와 그리스도교 전래의 시기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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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당시에 전래되었다고 하는 불교의 상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漢 明帝때인가?
이것역시 하나의 문제이다. 梁啓는 [불전의 번역]이란 논문에서 한명제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을 부인한 바 있다. 이는 양계초가 번역작업을 통해 연구해 낸 결론이다.
[古今佛道論]중에 매우 흥미있는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永平 14년 정월 1일 오악(五嶽)에 은거하던 도사와 불교도들간에 백마사에서 자웅을 겨루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내역을 자세히 설명하면, 도사 楮善信등이 불교를 반대하는내용의 상주문을 냈다.
임금께서 우리나라의 道法을 버리시고 멀리 오랑캐의 종교를 추구하시니 모시는 것 역시 오랑캐의 신이고 설법 역시 중국 고유의 것이 못되옵니다. 이에 청하옵건데 불교와 비교하여 진위를 가리시기를 바라옵나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이에 15일에 백마산에 모여 자웅을 겨루도록 명령했다. 도사 690명이 세개의 단을 설치하고 각 단위에 도경과 제물을 올려 놓고 불사리경을 단 서쪽에 올려 놓았다.
장작을 단 주위에 놓고 불을 질러 놓고 도사와 승려들이 기도문을 서로 외웠다. 불길은 從으로 타올라가 결국 [도경]은 불에 타 없어졌지만 [불사리경]은 오색찬란한 광채를 발했다.
이를 본 도사들은 아연질색했다. 도시 費叔才는 개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도사 여혜통 등 628명이 출가하여 봉불하게되었고,사공락의 성주인 유준 등 천여명도 출가하였으며,궁인, 부녀들중 출가한 자가 236명에 달하여 결국 10개의 사찰을 더 세워야 했다.
이 10개의 사찰중 7개는 洛城 밖에 세워 승려들을 기거하도록 했고 나머지 3개는 낙성안에 세워 비구니들이 머물었다.
한나라가 불교를 중흥시킨 것이 이 때부터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구약성서중 이리야와 바리가 제사시합을 통해 진위를 가린 내용과 매우 흡사한데 혹시 유태경전속에서 따온 것이 아닌지는 우리들로서는 증명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남을 누르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조작된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84∼85p)
[그리스도교의 중국전래시기]
명나라 天啓 5년 서안에서 출토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당나라 정관 9년에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이고 실제로는 당나라 이전에 여러차례 중국에 전래되었다 한다.
路得改敎始末記에는 1세기 즉 A.D. 34년에 바빌론이 유태인을 살육하자유태인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 졌는데 馬援이 交지를 정벌할 때 서로 만나 그리스도교도도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燕京開敎略에 의하면, 서기 65년에 네로가 그리스도교 교도들을 학살하고 69년에 예루살렘이 패망하자 그리스도교 교도들은 재난을 피해 동으로 왔다고 한다.
이 때가 바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와 같은 때이다.
전하는 말에는 관운장(關雲長)도 기독교를 믿었다 한다.
또 머라버 주교의 저작인[迦勒底史]에 의하면,"천국의 복음이 도처에 확산되어 결국은 중국에 이르렀다. ······중국인과 아리아인이진리를 믿게 됨은 성 도마에 의해서이다." 이는 곧 도마는 동쪽으로 전교를 했으며, 바오로는 소아시아에서 전교활동을 했음을 의미한다.
또 어떤 사람은 도마는 인도에서 전교활동을 했고 베드로가 중국에서 전교활동을 했다 한다(中國基督敎四大危急時期 참조)
이렇게 많은 주장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나 믿을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만 전설 정도로 인정되고 있을뿐이다.······이 문장의 내용으로부터 7세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40∼14p)
이는 그리스도교입장에서 쓴 글도 아니고 불교 입장에서 쓴 글도 아닙니다. 다만 한나라에 전래된 불교의 상태와 그리스도교 전래의 시기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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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당시에 전래되었다고 하는 불교의 상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漢 明帝때인가?
이것역시 하나의 문제이다. 梁啓는 [불전의 번역]이란 논문에서 한명제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을 부인한 바 있다. 이는 양계초가 번역작업을 통해 연구해 낸 결론이다.
[古今佛道論]중에 매우 흥미있는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永平 14년 정월 1일 오악(五嶽)에 은거하던 도사와 불교도들간에 백마사에서 자웅을 겨루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내역을 자세히 설명하면, 도사 楮善信등이 불교를 반대하는내용의 상주문을 냈다.
임금께서 우리나라의 道法을 버리시고 멀리 오랑캐의 종교를 추구하시니 모시는 것 역시 오랑캐의 신이고 설법 역시 중국 고유의 것이 못되옵니다. 이에 청하옵건데 불교와 비교하여 진위를 가리시기를 바라옵나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이에 15일에 백마산에 모여 자웅을 겨루도록 명령했다. 도사 690명이 세개의 단을 설치하고 각 단위에 도경과 제물을 올려 놓고 불사리경을 단 서쪽에 올려 놓았다.
장작을 단 주위에 놓고 불을 질러 놓고 도사와 승려들이 기도문을 서로 외웠다. 불길은 從으로 타올라가 결국 [도경]은 불에 타 없어졌지만 [불사리경]은 오색찬란한 광채를 발했다.
이를 본 도사들은 아연질색했다. 도시 費叔才는 개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도사 여혜통 등 628명이 출가하여 봉불하게되었고,사공락의 성주인 유준 등 천여명도 출가하였으며,궁인, 부녀들중 출가한 자가 236명에 달하여 결국 10개의 사찰을 더 세워야 했다.
이 10개의 사찰중 7개는 洛城 밖에 세워 승려들을 기거하도록 했고 나머지 3개는 낙성안에 세워 비구니들이 머물었다.
한나라가 불교를 중흥시킨 것이 이 때부터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구약성서중 이리야와 바리가 제사시합을 통해 진위를 가린 내용과 매우 흡사한데 혹시 유태경전속에서 따온 것이 아닌지는 우리들로서는 증명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남을 누르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조작된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84∼85p)
[그리스도교의 중국전래시기]
명나라 天啓 5년 서안에서 출토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당나라 정관 9년에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이고 실제로는 당나라 이전에 여러차례 중국에 전래되었다 한다.
路得改敎始末記에는 1세기 즉 A.D. 34년에 바빌론이 유태인을 살육하자유태인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 졌는데 馬援이 交지를 정벌할 때 서로 만나 그리스도교도도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燕京開敎略에 의하면, 서기 65년에 네로가 그리스도교 교도들을 학살하고 69년에 예루살렘이 패망하자 그리스도교 교도들은 재난을 피해 동으로 왔다고 한다.
이 때가 바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와 같은 때이다.
전하는 말에는 관운장(關雲長)도 기독교를 믿었다 한다.
또 머라버 주교의 저작인[迦勒底史]에 의하면,"천국의 복음이 도처에 확산되어 결국은 중국에 이르렀다. ······중국인과 아리아인이진리를 믿게 됨은 성 도마에 의해서이다." 이는 곧 도마는 동쪽으로 전교를 했으며, 바오로는 소아시아에서 전교활동을 했음을 의미한다.
또 어떤 사람은 도마는 인도에서 전교활동을 했고 베드로가 중국에서 전교활동을 했다 한다(中國基督敎四大危急時期 참조)
이렇게 많은 주장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나 믿을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만 전설 정도로 인정되고 있을뿐이다.······이 문장의 내용으로부터 7세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40∼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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