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of Life (30): "베이브"와 "욥"
10월1일. 또 새 달이 시작됐습니다.
한달 단위로 삶을 세며 살아가는 저로서는
새달 첫날이 주는 감회가
항상 색다릅니다.
예정대로 주치의를 만나러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갔습니다.
닥터 매스트리아니와는 그다지 낙관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곳 저곳의 통증 이야기와 별로 자신 없는 치료계획 이야기가 다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갔다오는 길에
정희씨와 나눈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우리는 주로 영화 "베이브(Babe)"와 성경의
"욥(Job)"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처음엔 두서없이 시작한 이야기였는데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동안 궁금하거나
안타까웠던 의문들이 꽤 정리가 됐습니다.
돼지 영화 "베이브"에 보면
농장에서 키우는 동물들이 차별대우 받는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한번은 베이브가 개들을 따라서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엄마 개가 가로막았습니다.
-얘야,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난 들어가면 안돼요?
-미안하지만 안 된단다. 개와 고양이만 들어갈 수 있단다.
-왜요?
-그건....
그냥 그런 거야.
어설퍼 보이는 대답이면서도 또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농장주인이 정한 질서를 받아들여야 하는 동물들의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영화에는 농장의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도 나옵니다.
식탁에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오리 요리가 올랐습니다.
창 밖에서 돼지 베이브와 오리 페르디난드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니, 네가
여기 있다면 식탁에 올라간 건 누구야?
-로잔나.
-그 성격 좋은 로잔나 말이야?
-그래.
-왜 로잔나였을까?
베이브의 질문에 페르디난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행복하고 싶으면 세상이 으레 그런 거라는 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
암 진단을 받고 5년 동안 치병을 해 오는 동안
돼지 베이브처럼 "왜"라는 질문을 참 많이 가졌습니다.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마 끝까지 알아내지 못할는지도
모르지요.
상당히 앞서 있다는 미국의 의료계도 아직 암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담배 때문일 거라도 하고 식사 습관
때문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유전일 거라고도 하고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남다른 식사 습관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집안에 암 경력도 없고 담배는 입에 대 본적도 없습니다.
또 제가 딱히 다른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암에 걸렸습니다.
과학으로 원인이 잘 밝혀지지 않으면
우리는 손쉬운 대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돼지 베이브가 들었던 대답입니다.
-세상은 으레 그런 거야. 따지지 마.
-그렇고
그런 세상 이치를 받아들여야 해.
-그래야 그나마 행복할 수 있어.
그 정도의 대답에 만족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저로서는 한 걸음 더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화두(話頭)인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내가 암에 걸린 것과 하나님의 뜻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건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이렇게 된 것일까?
이것은 내가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다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병에
걸린 것일까?
다른 분들이 이런 생각을 들으신다면 좀 우스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무척 심각한 문제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뜻 때문이라면
이건 아주 심각한 실존적인 신앙의 문제라는 거지요.
지금까지 많은
분들로부터 위로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말씀이 "욥"에 대한 말씀입니다.
병원에 다녀오는 차안에서도
욥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나눴습니다.
저 역시 평소에 "욥기"에 대한 의문이 많았던 터라
정희씨의 생각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까지 완전한 의인이었던 욥,
그가 엄청난 시련을 당했습니다.
전 재산을 순식간에,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잃었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한 자리에서 횡사했습니다.
온몸에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벅벅
긁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조차도 하나님과 욥을 비난하면서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통과한 욥은 하나님께 다시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욥기가 주는 교훈은 그렇습니다.
때로는 의인도
어려움을 당한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허용범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런
의인의 시련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전조이기도 합니다.
주위 분들로부터 욥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저는 욥의 이야기에
그다지 큰 감명을 받지 못한 편입니다.
우선 저는 욥만큼 의인이거나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무언가 제 잘못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 경험을 욥의 경험과 같은
것으로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욥기의 교훈은 분명 일리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교훈은 욥에게 초점을 맞췄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초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맞춘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욥의
자녀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그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요?
욥기를 읽어보면 그 자녀들이 아버지 같은
의인이었다는 말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렇게 급사를 당해야할 만큼 나쁜 짓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졸지에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 아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또 욥의 재산을 지키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욥의 양과 염소와 낙타를 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처럼 의인이었는지 아니면 죄인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기가 쉬울 것입니다.
적어도 가축을 치는 자기 직무에 충실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벼락을 맞거나
침략자들의 칼에 맞아 졸지에 죽었습니다.
욥을 시험하시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세상을
떠야 했던 것이지요.
욥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일이 해피엔딩입니다.
그의 재산은 회복됐고 자녀들도 다시 생겼습니다.
욥의 신앙은 "귀로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자랐습니다.
욥을 신뢰하셨던 하나님의 신뢰가 옳았던 것이
증명됐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고 마귀가 졌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 됐습니다.
그러나 그 해피엔딩은 어디까지나 욥의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죽은 욥의 자녀들,
열 명이나 되는 그들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또
욥의 재산이 약탈당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던 종들,
적어도 수십 명은 되었을 그들의 죽음에는 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시험이 끝난 후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심지어 천국엘 갔는지 지옥엘 갔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냥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들의 목숨은
성경의 주목을 받을 만큼 중요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수 천년 동안 유대인 랍비들과 탈무드의 저자들은
욥의 자녀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또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욥의 종들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제 성경 공부가
모자랐기 때문이겠지만
그 동안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욥의 시련이 하나님의 뜻인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그 점을 거듭해서 분명히 밝혀 줍니다.
욥이 시련을 받는 동안 목숨을 읽은 수십 명의 죽음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요?
"욥의 몸, 그의 생명에는 손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던 하나님께서
욥의 자녀들과 종들의 생명이 버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째서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으셨을까요?
욥의 시련 동안에 죽은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자꾸 관심이 가는 것은
제가 욥같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욥의 자녀들이나 종들에 더 가까운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들의 죽음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신앙 검증을 위해서 죽어야 했던 자녀들,
주인의 의인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은 종들,
그들의 죽음은 전적으로
욥의 완전한 신앙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또 한편으로는
욥이
생각만큼 그다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괴로움에 못 이겨 자기가 난 날까지 저주하던 욥의 모습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한 것은 아닌지 몰라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느라고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욥의 그런 점을 야단치시기도
하셨지요.
그런 야단을 맞은 후에야 욥은 비로소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승화하게 됩니다.
결국 욥은 완전한 신앙인,
진정한 의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전 지금 괴롭습니다.
몸도 아프지만 마음도 아픕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어떤 존재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약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저는
욥 같은 사람일까요?
저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뇌 때문에 자꾸 하나님께 "왜"냐고 묻고 싶습니다.
수천 년 전에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 여러 가지 고통에 시달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저는 욥 같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욥의 시련을 빛내기 위해서 희생당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욥의 자녀들과 욥의 종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대 위의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서
대사도 없이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조연 배우들처럼.
제가 욥
같은 사람일는지, 아니면
욥의 자녀나 종 같은 사람일는지는 두고 보아야 알 수 있겠지요.
제가 이 지옥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갑절이나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면
그때는 제가 욥 같은 사람이라고 보아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저는 주연배우라기보다는 단역의 조연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주연이 아니었다고 해서 서러워하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연극의 성공을 기뻐하는 것은 주연이나 조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화려한 조명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겠지요.
사실 저는 조연에 아주 익숙합니다.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에서도 항상 독주보다는 반주에 자신이 있습니다.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의 역할에 만족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제 인생은 그렇게 준비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으레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주연이 있으면 조연이 있게 마련입니다.
조연이 있으면 주연이 있게 마련이고요.
그리고 대체로
주연은 적고 조연은 많아야 하는 법이겠지요.
오리 페르디난드는 결국 "으레 그런 질서"에 신물을 내면서
농장주가 정한
농장의 질서를 뒤로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그렇게 도망친 페르디난드가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았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한편
베이브는 "으레 그런 질서"에 오히려 순응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지요.
더러 더러 실수도 하지만 주권자인 농부의 뜻을 알려고 애씁니다.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때로는 주위 다른 동물들의 경멸과 조소를 받아가면서까지.
그러더니
급기야는 "양치기 돼지(sheep-pig)"가 됩니다.
양치기 개보다 훨씬 더 나은 양치기 돼지로 성장합니다.
욥과 그
자녀들, 그리고 종들....
주연과 조연....
오리와 돼지....
이번만큼은 주연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욥
처럼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바램은 목숨이 걸린 바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연이 된다해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다만,
농장을 박차고 나가버린 오리처럼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점을 하나님께 간절히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당분간은 "욥기"를 더 읽고 싶지 않은 기분입니다.
생각이 자꾸 복잡해지고 불안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베이브"나 한번 더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장미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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