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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장미혜님 글15

주방보조 2005. 2. 26. 09:48

Love of Life (27): 풀피 냄새 진동하는 칠월  


칠월이 왔습니다.
벌써 칠월의 둘째 날입니다.
유월만 해도 여름이 아니라고 우길 수 없는 날씨였지만
(5월 중순에도 눈이 내렸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망설여지기는 합니다.)
칠월은 빼도 박도 못하는 한여름입니다.

여름이 되면 저는 괴로운 일이 한가지 생깁니다.
에어컨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저는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습하고 무더운 한국의 장마기간에도
차라리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 견디고 말았습니다.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면 몸에 이상이 생기곤 했습니다.
쉽게 감기에 드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화도 잘 안되고 화장실 사업(?)에 조차 차질을 빚곤 합니다.

문제는 정희씨는 에어컨을 꺼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다지 에어컨 바람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고 해도
기온이 치솟으면 더위를 참지 못합니다.
추위는 꽤 잘 견디면서도 더위에는 맥을 못 춥니다.

그래서 여름이 되기만 하면 정희씨와 저는
같이 집에 있거나 차를 타는 데에 갈등의 소지가 있습니다.
에어컨을 틀자니 제가 불편하고
창문을 열자니 정희씨가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집에 있을 때에는 그나마 좀 낫습니다.
제가 있는 방이나 거실의 에어컨 바람구멍을 막아놓으면 되니까요.
차를 타면 문제가 좀 더 심각합니다.
차안의 좁은 공간은 금방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에어컨을 틀면 금방 차가워집니다.
바람 나오는 구멍을 닫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차가워진 공기 자체가
정희씨에게는 '쾌적함'이지만
제게는 '불쾌함'이기 때문입니다.

여름, 특히 한여름은 정희씨나 제게
누구하나의 희생(?)을 강요하는 잔인한 계절입니다.

알바니의 한여름은 '잔디'에게도 잔인한 계절입니다.
뜨거운 햇볕과 간간히 쏟아지는 시원한 소나기 덕분에
잔디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릅니다.

그러나 잔디는 어느 정도 이상 자라지 못하게 '통제'받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모우잉 (mowing)'을 당합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의 관리꾼 아저씨들은 부지런해서 그런지
일주일에 두 번씩 잔디를 깎습니다.
잔디 깎는 기계가 지나간 자리에는
칼날에 꼭대기를 잘린 채 아직 생명을 부지한 밑동과
그 사이사이에 널브러진 이파리들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위를 떠도는 짙은 수액 냄새.....

풀이 깎인 뒤에 나는 그 냄새를
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냄새를 '풀피 냄새'라고 부릅니다.
잔디 이파리를 꺾으면 나오는 수액을
'피'라고 부른 것은 원래 정희씨였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징그럽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만
생각할수록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깎인 뒤의 잔디밭은 제게
한차례의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전쟁터를 연상시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그린 영화 '게티스버그'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싸움을 그린 영화 '브레이브 하트'나
일본 막부시대의 전투를 그린 아키라 쿠로사와의 영화 '가께무샤'에
그런 장면들이 더러 나옵니다.

넓은 들판은 죽은 병사들의 시체로 덮이고
피는 강을 이뤄 흐르는데
부상당한 병사들의 신음과 고함 소리가 처절합니다.
그런데도 그 위로 흐르는
한 줄기 바람....

잘 깎여서 다듬어진 잔디를 바라보면
'정갈하고 상쾌한 느낌'을 받기보다
아수라 같은 전쟁터를 연상하거나
풀잎의 수액 냄새를 가지고
비릿한 피 냄새를 연상하는 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일이 아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 그런지 모르게
깎인 잔디만 보면 그런 게 생각납니다.

물론 잔디는 깎아 주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아이들 놀기도 좋고
가문 여름날 물도 아낄 수 있습니다.
선들바람 부는 여름 석양에 저문 해를 바라볼 때에는
무성하게 우거진 것보다는
깔끔하게 다듬어진 잔디밭이 훨씬 제격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일상적인 유용함과 상쾌함의 이면에 깔린
잘리고 피흘리는 '듯'한 풀들의 아우성을 기억하는 것도
삶을 돌아보는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얼마 전부터
풀잎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높이 솟은 나무나 화려하거나 예쁜 꽃보다는
키도 작고 별 볼품이 없는 풀잎에 관심이 자꾸 갑니다.
산이나 들에 야생으로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됐습니다.
휘트먼의 '풀잎'도 새삼 다시 들여다보고
오래 전에 읽었던 김수영의 '풀'도 다시 기억해 봅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Love of Life의 표지 그림으로
아침 이슬 머금은 풀잎으로 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슬 머금은 풀잎은 '작은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새벽의 신선함을 가리키는 시어(詩語)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풀잎의 이슬이
제게는 눈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김수영 시인의 '풀'에 나오는 풀들도
눕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바람이 불면 발목까지, 발 밑까지, 아니 풀뿌리까지 눕습니다.
날이 흐리고 비를 몰고 오는 동풍이 불면
아예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풀은 그대로 누워 있지만은 않습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웠다가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군요.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합니다.

김수영 시인은 풀잎을 보고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문학적인 감수성이 퍽으나 모자라는 저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풀잎은 이름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래서 때로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기도 하고
사람과 짐승의 발에 밟혀 꺾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생명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도 풀이 연약한 백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이사야 40장 6절, 표준 새번역)

풀 같은 사람의 육체는 바람만 세게 불어도 말라버립니다.
이처럼 약한 존재가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이사야 40장 7-8절, 표준 새번역)

오늘도 가지런히 잘 깎인 집 앞 잔디밭을 바라보면서,
풀 같이 연약한 내 속에도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가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장미혜 드림.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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