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미국 6.25참전 결정에 빌리 그래함이 있었던가 | |
[[제1476호] 2015년 9월 26일] | |
이 글은 6.25사변 당시 미국이 그렇게 빨리 참전을 결정한 데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공헌이 컸다는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국에 다녀간 세계적인 부흥사요 한국교회의 부흥은 말할 것도 없이 현대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촉발한 거대 동력의 촉발자로서도 유명한 인사이다. 그런데 그의 부인 루스 벨 그래함은 중국 넬슨 벨 선교사의 둘째 자녀로서 평양의 감리 선교사 셔우드와 장로교의 베어드가 세웠던 평양의 외국인학교 출신이다. 그 부인은 11세 때부터 6년간 이 학교를 다닌 것으로 돼 있다. 빌리 그래함 목사와 한국과의 관계는 이처럼 오래 전부터 있어온 셈이다. 더러는 그 부인이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의 딸이고 함흥에서 태어나 거기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다닌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 부인의 이름이 루스여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50년 6.25사변이 터지자 6월 26일 저녁 한국군을 돕기 위해 공군의 파견을 명령하였고, 6월 30일에는 한국 전선을 시찰하고 온 맥아더 원수의 건의를 받아서 지상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고 파병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미국 역사상 이렇게 신속한 파병 결정을 한 사례는 한두 번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해외 참전은 의회의 결정을 거쳐야 하는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하는 중대사건이다. 그것이 하원의 군사위원회라든가 하는 소분과위원회를 거치고 하원 본회의에 상정되어 토론을 거치고 야당의 강력한 반대를 표결로 이겨야 하고, 다시 상원의 군사위원회 그리고 다시 본회의 토의 의결을 거치노라면 한두 달이 쉽게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이틀에 대통령이 결정하고 파병하였던 것이다. 참 기적 같은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 후에 백선엽 장군이 트루먼을 만나 어떻게 그런 신속한 결심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정말 <잘 모르겠어>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한국은 실제 이런 결정을 통해서 오늘 생존해 있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미국 욕하기인가. 그런데 이런 결정을 하게 한 배후에 빌리 그래함의 영향이 컸다는 지적이 있다. 빌리 그래함은 이미 세계적 부흥사로 알려져 있었는데 세계 제2차대전의 종결 후에 공산주의 강대국 소련의 전쟁 위협을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예언자로서 그는 종전 후의 세계 역사의 이데올로기 양립 구도를 영국의 처칠 만큼이나 예리하게 투시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독실한 신앙은 이렇게 역사의 흐름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6.25사변이 터지자 빌리 그래함의 메시지가 트루먼 대통령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이다. 더구나 한국을 부인을 통해서 고향처럼 느끼던 그에게 한국의 수호는 곧 기독교와 자유의 수호라고 보였다. 이 거대한 20세기 역사의 격동기에 한 목사가 서 있었다. 민경배 목사<백석대학교 석좌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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