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충현뉴스 등록일: 2016-02-08 12:33:01 조회: 2,645 추천: 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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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에서 순교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주로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를 꼽는다. 물론 그 외에도 무수한 순교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에서 성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누가 떠오르는가?. 성자라고 불릴 수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최흥종 목사이다.
1880년에 태어난 최흥종은 1904년 겨울, 유진 벨(가끔 방송에 나오는 세브란스병원 인요한 소장의 외증조부) 선교사가 광주 양림동에 들어 왔을 때 선교사의 집을 출입하다가 광주의 첫 교인이 되었다. 1909년 4월, 광주 선교사 오웬(Owen)이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일 때 목포에 있던 의료 선교사인 포사이드(W.H. Forsythe)가 연락을 받고 배를 타고 영산포로 거슬러 올라왔다. 영산포에 마중을 나갔던 최흥종은 광주를 향하여 같이 오던 도중 한센병(나병, 문둥병)에 걸린 여자 걸인을 만났다. 포사이드는 자기가 타고 가던 말 위에 피고름으로 얼룩진 환자를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갔다. 최흥종은 자신도 손대기를 두려워하는 문둥병자를 서양 선교사가 자기 자식처럼 만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포사이드 선교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였다. 선교사가 나병환자를 데려다 치료한다는 소문으로 광주 인근의 나병환자들이 찾아오자 선교사들은 1912년 무등산 인근 양림동에 있는 최흥종이 기증한 땅 1,000평에 정식으로 요양원 건물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 나병원의 출발이다. 최흥종은 광주 나병원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광주 시민은 나병환자를 업고 광주천을 건너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1919년 3월5일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주동자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1년 후 출옥한 최흥종은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 단기과정을 거친 뒤 목사안수를 받았다. 광주 북문밖교회 초대 당회장을 거쳐 시베리아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27년에 광주로 돌아온 후 광주기독교청년회(YMCA)와 사회구제사업에 전념하였다. 그가 시베리아선교사로 광주를 비운 사이 광주 나병원은 몰려 든 나병환자들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항의로 여수로 옮겨 갔다. 바로 여수 애양원이다. 나병환자들이 치료를 받은 후에도 생활터전이 없어 극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최흥종 목사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윤치호, 조병옥, 안재홍, 김병로 등 저명인사들과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만들어 총독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총독부가 반응을 안 보이자 나병환자를 불러 모아 시위에 나서기로 하고 광주에서 백오십 명 정도로 출발하였는데 소문을 듣고 전국 나병환자들이 따라 나서 열하루 후 서울에 도착할 때에는 4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막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환자들과 총독부 안마당까지 들어가 총독과 면담하여 소록도 갱생원을 대폭 확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932년 나환자 행진이다. 또한 광주 양동 장터에 있던 움막이 철거되어 거리로 쫓겨난 걸인들을 경양 방죽에 움막을 만들어 걸인들을 수용하고 북문밖교회 교인들과 기독교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걸인들을 먹이기 시작했다.
해방직후 “혼란스러운 광주를 조용하게 할 인물은 최흥종 밖에 없다”라는 광주시민의 요청으로 전남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미군정 도정고문을 잠시 맡은 적도 있지만 그의 관심은 여전히 걸인과 나환자들이었다. 나주 삼포에 음성 나환자 자활촌 호혜원, 빈민 자활촌 삼애원을 만들었다. 한센병과 마찬가지로 결핵도 사회의 기피대상이었다. 치료가망이 없는 환자들을 최흥종 목사는 무등산 골짜기에 움막 같은 토담집을 지어 같이 살게 하고 자신도 복음당이란 토담집을 지어 함께 살면서 결핵환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1966년 소천하자 광주사회장으로 엄수된 장례식에는 걸인들과 결핵환자들, 나병환자 수백명이 몰려와 “아버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며 통곡하였다. 그는 진정한 나환자의 아버지였으며 낮은 자들과 삶을 함께 한 진정한 성자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최흥종 목사를 거리에서 보았던 소설가 문순태는 그의 일생이 너무 놀라워 소설로 재구성하는 것을 포기하고 98% 이상이 실제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술로 그의 일대기인 ‘성자의 지팡이’를 썼다. 2009년 6월 광주시는 그를 기념하여 방림동에 최흥종 목사의 호를 딴 ‘오방로’거리를 지정했다.
신학수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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