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예수님도 평신도였다(신성남집사, 당당)

주방보조 2019. 2. 28. 06:47
예수님도 평신도였다
평신도교회와 맹신도교회
신성남  |  sungnam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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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2월 26일 (화) 07:21:05 [조회수 : 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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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란 말의 영어 'laity(layman)'는 헬라어 'laos(백성)'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니까 본래 이는 원어상 백성의 의미로 아무런 선입관이나 특별한 하자가 없는 매우 담백한 용어였다.

이 용어의 출현은 평신도와 성직자가 서로 구분되기 시작한 AD 2세기 경부터로 알려진다. 사실 사도들의 초기 교회 약 100년 동안은 '평신도'나 '성직자'를 구분하는 개념조차 아예 없었다. 신약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가 다 대등한 제사장(벧전2:9)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장로와 집사도 성직자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Clemens)'가 처음으로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장로, 집사, 그리고 평신도라는 세 가지 용어를 사용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오늘날과는 달리 장로와 집사 등의 직분자도 모두 성직자로 간주했다.  

이러던 것이 점차 예배 주관자와 설교자들의 교권이 강화되면서 '사제'라는 직분을 새로 만들었고 오직 자신들만이 성직자라는 흐름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중세 교회에선 '평신도'란 명칭을 성직자 계급과 구별되는 '평민'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 용어가 일반 성도들을 다분히 비하하는 의도가 있다고 하여 가급적 사용하지 말자는 의견이 크다. 마치 성도들을 하층 계급으로 깔보는 시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 대신에 '성도'라는 용어를 쓰자는 의견이 많다.

심지어 어느 신학자는 "평신도란 용어는 성도에게 주어진 가장 치욕적인 이름이다"고 까지 말했다. 물론 이는 충분히 일리가 있는 반발이다.

그동안 나 역시 이 평신도란 용어를 써야 할 때마다 크게 주저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근자에는 다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이 평신도란 용어보다 일반 성도들을 더 잘 표현하는 단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목회를 직업으로 하지 않는 보통 성도에 대해 이보다 더 실용적인 용어가 별로 없다. 게다가 이 용어는 이미 너무 오래 동안 사용되어서 그 의미가 거의 관습화하고 고착되었다.

 

'평신도'는 자랑스러운 이름

예를 들어 누가 '평신도교회'라고 말하면 우린 그 교회의 정체성을 즉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반면에 '성도교회'라고 말하면 이게 정확히 무슨 교회를 의미하는지 그다지 감이 안 온다.

더구나 요즘 많은 교권주의자나 성직주의자들은 이 '평신도'란 표현을 다분히 두려워 한다. 소위 성직자적 특권을 누려온 자신들의 입지에 저항하는 개념이 그 속에 아주 진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소심한 목회자들은 평신도라는 소리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심할 경우  "아니, 평신도를 깨워서 뭐 할 건데? 머리만 커져서 목사 잡아먹으라고?" 이런 식으로 막말하는 목회자도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만인사제설(만인제사장)'은 평신도의 성직권을 회복하기 위한 신앙 운동이었다. 인위적이며 계급적인 사제 제도를 폐지하고 교회 안에 '성도'라는 이름보다 더 높은 별도의 직분은 없다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평신도(백성)란 용어는 본래 특별히 누구를 비하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단지 중세 교회가 이를 차별적 의미로 악용했을 뿐이다. '평민'이란 말 또한 귀족과 대비된다고 해서 특별히 나쁜 용어가 되는 건 아니다. 평신도는 평민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보통 백성'이나 '보통 사람'이란 이름이 부끄러울 이유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누구나 이 '평신도'란 용어를 아무런 제약이 없이 당당하게 사용하기를 기대한다. 이는 오늘날 소위 '성직자'라는 명칭으로 계급화한 직분이나 제도를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지극히 선명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평신도교회의 회복

지금 우리에게는 왜 '평신도교회'가 필요할까. 왜 평신도가 주도하고, 평신도가 설교하고, 평신도가 관리하고, 평신도가 섬기고, 평신도가 책임을 나누는 교회가 필요할까.

그 이유는 상당수의 제도권 교회가 사실상 또 다시 사제화한 담임목사 한 사람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중세적 '맹신 교회'로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가 교황과 사제만 말하는 교회였다면, 개신교는 목사만 말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목사 직분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불의하게 과도한 교권을 지닌 제왕적 목사직과 계급적 직분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다. 현행 목사직은 신학적으로 사도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고, 회당장도 아니고, 교주도 아니다.

신약 초기의 교회엔 별도로 제사장 행세를 하는 성직자가 없었다. 천대를 받던 어부나 세리 출신의 사도들조차 아무런 신분 차별이나 특권 의식이 없이 서로 장로나 형제의 호칭으로 소통하고 친교했다.

이제 맹신의 시대는 끝났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니다. 나는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 교회가 과거 '교황교'나 '장로교'나 '감독교'나 '목사교'의 실패와 아픔을 극복하고 비로소 성도 중심의 '평신도교회'로 다시 회복되기를 소원한다. 평신도교회는 어원적으로 백성, 인민, 또는 민중으로 표현되는 우리 민초들의 거룩한 신앙 공동체다.

예수의 진리를 너무 종교화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이후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변질되기 전인 초기 200년 간의 교회는 대부분 가정에서 모이던 '평신도교회'였다. 거기엔 별도로 제사장도 없었고 성직자도 없었다.

예수님과 제자들 또한 당시에는 제도권 교회가 경시하던 평신도였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