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헬조선, 교회는?(김기대, 뉴스M)

주방보조 2015. 10. 1. 12:23

'헬조선', 교회는 책임없나?사랑의 교회와 서울의 작동 원리

김기대  |  gilbert@new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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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30  14: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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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Hell Chosun)'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뉴스를 검색해 보면 9월 29일 기준으로 모두 400여개 이상의 신문 기사에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쓰이고 있다. 헬조선은 말 그대로 지옥같은 조선이라는 뜻이다. 헬조선이 더이상 네티즌들이 커뮤니티에서나 쓰는 속어가 아니라 버젓이 언론에도 등장한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외교 전문지인 디플로마트(The Diplomat)도 헬조선에 대한 소개 기사를 썼다. 이 기사에서 ‘헬조선은 젊은이들의 꿈이 박살난 19세기 봉건 왕조 같은 의미’라고 설명했다.

   
 

디플로마트도 지적했듯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말에 이미 헬조선의 의미가 담겨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이지만 조선시대와 다름없는 신분장벽, 기회 균등 박탈 등의 뉘앙스가 ‘조선’에 담겨 있다. 청년실업, 노동시장 유연화의 탈을 쓴 쉬운 해고, 풀지 않은 돈인 기업보유금을 500조원이나 가진 자들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덜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는 임금피크 정책 등이 한국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젊은이들은 ‘지옥같은’ 한국을 떠나려고 한다.

OECD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삶의 만족도에 있어서 32개 국가중 29위며 지난 6월 갤럽에 따르면 삶의 질 만족도에 있어서 전년 75위에서 117위(조사대상국 145개 나라)로 떨어졌다. 9월 5일 대학생 800명을 대상으로 한 <경향신문>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매력 순위는 41.8위로 나타났고, 70.4%가 이민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여유가 없고 경쟁적인 삶이 60.4%, 취업난이 15.7% 신분상승 어려움, 7.9% 기회의 불평등 차별 7.7% 등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시민이 귀족을 심판한 뒤 그들이 주도하는 변혁을 꾀한 프랑스혁명과 달리 한국은 일제라는 강압에 의해 신분해방을 이루면서 모두 양반이 되려고 했다. 그 여파로 생겨난 상승지향적인 ‘왜곡된’ 평등의식으로 인한 비교 의식이 '조선 백성'들에게는 심한 편이다. 명품백 문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에서 일반 시민들이라면 꿈도 못 꿀 제품들을 한국 사회는 빚을 내서라도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선의 명품 백이 ‘평등하게’(?) 많은 이들의 팔을 장식할 때 상류층들은 ‘배제의 원리’를 작동시켜 그들만의 리그로 피신해 간다. 결국 그저 그런 명품백을 가진 사람들은 만족감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과다한 비교의식으로만 헬조선 현상을 분석하기에는 부족하다. 한국 사회가 지난 10년 동한 언론자유, 정책 투명성, 남북관계, 재벌 정책 등 모든 분야에서 퇴행하면서 청년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인 나라로 인식되지 않은 탓이 더 크다.

"헬조선과 지옥의 다른 점은?  지옥은 나쁜 사람들이 가는 곳이지만 헬조선은 착한 사람이 고통받는 곳이다". 어느 네티즌의 자조다.   

   
네티즌들이 그린 헬조선 지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헬조선의 중심지는 모든 경쟁과 차별이 살아있는 서울이다.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코난북스, 2014년)는 "서울에 관한 책이지만 서울에 관한 책만은 아니다"(273쪽). 서울은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이 안고 있는 모순의 대명사일 뿐이다.

 

'공산주의의 이념'이라는 놀라운 제목의 컨퍼런스에 참가하러 온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코엑스몰이 어느 쪽인지부터 물었다고 한다. (중략) 이렇듯 무시무시한 제목의 컨퍼런스를 버젓이 서울의 강남 한 복판에서 열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한편에는 소득 분배만 얘기해도 '좌파'로 내몰리는 현실이 공존한다. 이것도 비동시성의 동시성일까(42쪽)

 

서울은 자본주의의 압축적인 모순이 드러나는 곳으로 그곳에는 근대와 중세, 포스트 모더니즘이 공존하기에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간이다. 진짜 '공산주의'의 토론이 허용되지만 분배를 이야기하면 '빨갱이'가 되는 세상이다. 계몽주의 이전과 이후가 이처럼 막 섞여 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때는 나를 성자라고 부르더니 왜 가난하냐고 물었더니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는 그 유명한 브라질 카마라 대주교의 말과 달리 한국 사회는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자고 해도 좌파로 몰리는 형국이다.

저자가 지적한 서울의 작동원리 중 또 다른 것으로는 추격(모방)과 배제가 있다.

상대적으로 서민들이 사는 동네의 연립주택일 수록 언덕을 의미하는 하이츠나 힐이 많이 붙는다. 부유층을 추격하는 심리인데 이럴 수록 부유층은 서민들을 배제해 나간다(24쪽).   

스타벅스가 소비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면 이런 일반화가 싫은 사람들은 '스타벅스 리저브'라는 고급 브랜드를 이용한다. TV 쇼에서 조차 연에인들은 강남은 세련, 강북은 촌스러움이라는 배제의 원리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또한 부유층들은 자본을 독점한 채 '평민'들의 추격을 불허한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 버리는 이 엄혹한 현실은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지옥같을 수 밖에 없다. 현실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젊은이들에게 열정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일은 배제시키는 자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옥같은 현실을 물리적으로는 바꾸지 못할지라도 정신적으로라도 바꾸어야 할 교회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저자 류동민은 서울의 작동원리와 잘 맞아떨어지는 곳으로 '사랑의 교회'를 든다. 

좁은 공간에 점점 더 많은 신도를 수용해야 '비즈니스'로서  생존이 가능한 교회는 고층에 지하예배당까지 갖춘 대형건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밤하늘에 빽빽하게 들어찬 붉은 빛 십자가가 수많은 교회들을 독점적 경쟁 상황을 나타내주는 상징이라면, 점점 더 위압적인 숭고미를 갖춘 화려한 외관의 대형교회는 그 경쟁에서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요소인 동시에 경쟁을 이겨냈음을 자축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125쪽)

 

저자가 드는 서울의 특징, 비동시성의 동시성, 추격과 배제가 잘 드러나는 곳이 사랑의 교회가 아닐까?  건물은 초현대적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시대를 관통한다. 막강한 '사제'의 권리가 중세적이라면, 고대 사회의 사제 숭배 같은 현상들도 일어난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조무래기' 교회들의 추격을 피해가며, 십일조 법제화(무산되기는 했지만) 등으로 사람들을 배제해 나간다.   

이윤추구와 세속적 성공을 위한 고투의 장소에서 지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화려한 성장(盛裝)을 하고 교통 정체를 유발하는 에너지 소비적 방식으로 성스러운 곳에 가서는 죄사함, 정확하게는 죄사함의 느낌, 그 물신을 소비하는 것이다. (중략) 위안의 장소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쾌적하고도 화려한 곳이어야 한다. 그 옛날 만국 박람회가 근대의 생산력을 과시하는 물신의 장소였듯이 대형교회가 하드웨어를 중시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권력의 장소인 법원, 검찰청 앞에 압도적인 외형과 대등한 스카이라인으로 맞서게 된 서초동 사랑의 교회는 그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도로의 통행을 장기간 막으면서 지하의 공유공간까지 점유하는 것은 군사정권 시절 국가권력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제 그것을 교회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26~17쪽)

경제학자인 저자의 눈에 비친 교회는 영혼이 정화되고 구원을 약속받는 곳이 아니라 ‘물신’을 섬기는 공간이다. 물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루저’들은 지옥같은 조선을  탈출하고 싶어 한다.

20세기 교회가 ‘하면 된다’의 긍정의 신앙으로 한 몫 챙겼다면 21세기 서울의 대형 교회는 값싼 희망이나 위로조차 주지 않는 오직 물신숭배에 성공한 자들을 위한 ‘도피성’이 되고, 도피성에 편입하지 못한 이들은 조르조 아감벤의 개념인 ‘호모 사케르’가 되어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인 복지와 최저임금의 사각지대로 밀려 난다. “추격자가 스스로 그 가능성 없음에 절망하여 추격을 포기”(278쪽)하는 사회야 말로 지옥에 다름 없다. “추격의 과정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공공성을 강화”(279쪽)하면 된다지만 저자 스스로도 이 일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제 나라를 지옥같이 여기는 이들에게 교회가 해 줄 일은 전혀 없을까?  모순적인 자본주의 구조를 대체할 새로운 상상력을 제시하는 것이 교회가 품어야 할 최소한의 사명일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원칙”(132쪽)이 작동하는 교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디즈니랜드에는 미국이 없고, 코엑스몰에는 서울이 없듯이 교회에는 기독교가 없”(133쪽)다는 저자의 말이 틀리지 않은 현실이 서글프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