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디제잉 하나추가...(심재용, 뉴조)

주방보조 2015. 7. 26. 19:31

초라한 찬양 문화, 디제잉 하나 추가되는 게 뭐 대수인가

철저히 개인 감정으로 소비되는 예배, 은혜받았다는 말의 공허함

심용환 newsnjoy@newsnjoy.or.kr | 2015.07.24 15:25:5

EDM(Electronic Dance Music)은 동시대의 대중음악이다. 대중들이 소비하고 누리는 방식이 이미 존재하는 상태에서, 감정의 결이 이미 구체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저 막연하게 동일한 형태로 가사만 조금 바꾸거나 스타일만 조금 조정해 예배 공간에 들여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염려되고 고민할 부분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이미 이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1. 성경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

어느새 우리의 예배는 참으로 즐겁다. 어느 순간부터 웃는 예수님의 일러스트가 교회 벽보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예배는 우리의 소명과 비전 그리고 긍정의 힘을 찾는 공간이 되었다. 찬양은 가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양 시간에 '가사'는 어떻게 소비되는가.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알아서 소비될 뿐이다.

CCM 가사는 기존 찬송가에 비해 감상적인데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눈물, 감사, 아픔)들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찬양 인도자들 역시 차라리 음률 코드와 집회 분위기에 따라 노래를 배치하지, 가사를 통한 계몽이나 예배의 예전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 설령 체계적으로 창조, 타락, 구속, 하나님나라 식으로 배치했다 하더라도, 최근 젊은 예배 인도자들의 스타일은 콘서트 가수와 비슷하다. 심지어 찬양 예배 자체가 축제 행위와 비슷한 형태로 구성되기 때문에 예배는 차라리 파티에 가깝다.

그렇다면 성경의 예배는 어떠한가. 예배학적이고 신학적인 단어를 끄집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신구약의 분위기를 고려해 보자는 말이다.

구약의 예배는 무섭다. 죽음의 종교이다. 동시대 화려한 이집트의 예배 양식과 풍요를 찬양하는 근동 지방 바알류의 만신전 예배에 비해 유대 공동체의 예배는 오직 '속죄'에 집중되어 있는 엄격한 절차 자체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속죄하기 위해 수고를 들여 비둘기를 가져와야 하며, 결국 짐승을 죽여 피를 보여야만 한다. 그 흔한 신전 여사제의 성매매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이 춤추다 옷이 벗겨지는 줄을 몰랐다"는 문장은 구약 예배 분위기에서는 예외적인 부분이지 결코 보편적 요소가 아니다. 더구나 그렇게 즐겁게 마음껏 어린아이처럼 뛰놀던 사람은 바로 '다윗', 구약에서 모세에 비견되는 최고의 인물, 메시아의 조상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바로 그 다윗이다. 누구나 그렇게 놀고, 마음껏 감정 부림을 할 수 있는 것이 예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신약은 어떤가.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다정함, 예수님의 제자 사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따른 축제로써의 예배 등등을 이야기한다. 이는 부분적인 사실이다.

우선 예수님은 처형당했다. 예수님의 처형, 즉, 완전한 죽음이 전제된다. 신약의 하나님은 여전히 가혹한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로 인해 부활의 날이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 교회가 생겨났고, 예배가 이루어졌다. 베드로의 설교는 3,000여 명의 회개를 이끌어냈는데 역시 강력한 죄 고백과 회개, 그리고 회개로 인해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이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 부활의 날에 걸맞은 예배가 진행된 것이다. 더구나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바울 역시 처형당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강력한 도덕적·윤리적 변화를 외쳤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일체의 소유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로 예수님이 증언한 바로 그 삶에 헌신하였다. 예배는 이러한 무지막지한 제자 공동체의 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들의 찬양과 기도는 이러한 고통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졌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과 진정은 단순하게 간절한 마음 혹은 온갖 화려한 악기가 뽑아내는 고도의 음색이라 볼 수 없다.

중세 시대에는 웃음이 금기였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웃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배, 신약의 예배 그리고 예배를 둘러싼 그들의 정서와, 오늘날 우리가 익숙해하는 예배와 찬양 문화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지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몇몇 구절을 떼어 와서 기쁘게 활용하며 하나님을 선포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은, 어쩌면 성경을 아주 악랄하게 왜곡하며 우리의 편한 신앙을 합리화하는 도구는 아닐까. 아주 근본적인 회의와 의심이 드는 순간이다.

더구나 성경에 나오는 이들, 가난했고 고통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다윗 왕조 때 성전이 건축되기 전후로 얼마나 가열한 고통의 역사가 있었던가.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한 예배의 본질을 이루기 위해 가혹하게 바알 문화와 싸웠고 이방 문화에 물든 사람들을 죽였다. 초대교회는 유대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유대인들에 의해 쫓겨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들만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오늘 우리의 예배와 찬양 문화는 어떤가. 비싼 프로젝터, 좋은 스피커, 엄청난 마이크, 고가의 음악 도구들. 만약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예배 공동체는 어느 수준으로 존재할까. 몇이나 교회를 나올까.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이라도 악기를 들어 하나님을 찬양한 적이 있던가.

2. 가톨릭의 예배와 개신교의 예배

가톨릭은 성경과 더불어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종파이다. 성경이 본질적으로 중요하지만 사도들이 직접 만든 교회의 권위, 그리고 교회가 만들어 온 전통을 동등하게 중시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중세라는 지독한 문맹의 시대를 상대한 가톨릭의 입장에서 예배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의식이며, 눈에 보이는 절차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찬양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가르쳐 주는 과정 그 자체이다. 마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예기(禮記)'를 바탕으로 엄격한 제식 절차를 구사하며 제사를 지냈던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가톨릭은 예배라 하지 않고 미사라 칭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를 둘러싼 온갖 의미들이 미사라는 절차를 통해 체계적으로 재현된다. 성도들은 이를 보고 누리며 하나님을 만난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어떤가. 개신교는 전통의 권위를 부수고 '성경' 하나에 의지해 가톨릭이라는 중세 1,500년의 울타리에서 나온 종파이다. 루터는 끝없는 양심적 고뇌를 통해 하나님을 찾았고 칼빈은 엄격한 법적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했지만, 결국 이들은 '성경'에 근거한 정체성만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꼭 같다.

고도의 예배 의식이나 특정한 찬양 행위를 통해 누리고 기뻐하는 형식을 버리고, 직접 성경을 읽고, 직접 회개하고, 직접 따르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듯 예배는 성도의 삶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회의 예배당은 사면의 벽일 뿐이고, 칼빈은 성가대까지 박살내려 하였다. 왜 칼빈이 예정설에 집착했던가.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를 갈망하는 열광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가? 이미 구원받았으니 당신의 삶 속에서 삶의 내용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라. 그렇기 때문에 루터 역시 재세례파를 이단이라 규정하고 혹독하게 탄압한 것이다.

감리교, 침례교로 발전해 오는 개신교 특유의 역동성은 성령 체험을 강조하거나 열광적인 찬양 행위를 강조하는 모습들이 발견되었을지언정 본질에 있어서 '오직 성경에 기초한 신앙과 교회'라는 원칙을 포기하려 했던 적이 없다. 성경을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개신교 예배의 최우선이며 다만 이것만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예배는 가톨릭을 따라가고 있다. 중세적 절기에 기초해서 어느 때가 되면 부활을 묵상하고, 어느 때가 되면 탄생을 기리고, 어느 때가 되면 어버이도 기리고 심지어 특정 정치 지도자도 기린다. 성경에 절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1년간의 목회 시간표는 철저하게 중세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찬양 문화에 종속되었다. 이는 청년 공동체나 교회학교로 내려갈수록 심화한다. 예배의 주는 이제 노래와 기타이다. 아무리 짧아도 30분 이상, 길게는 1시간이 넘게 엄청난 힘과 에너지로 찬양에 집중한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감정은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몸으로 뛰면서 소리를 지른다.

이 과정을 충분히 반복한 후, 이런 감정의 향연에 의지하여 다음 순서로 설교가 이어진다. 이미 찬양 시간을 통해 감정적으로 순응되었기 때문에 목사의 설교는 감정적으로 동의되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성경 공부 시간이 있고, 큐티 시간이 있고 등등의 프로그램이 있다. 심지어 성경 공부나 큐티 시간 역시 감정의 향연은 계속된다. "오늘 너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니?", "오늘 특별히 마음에 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니?"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망 가운데 외치던 이가 예수님이었고 자신의 아들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던 이가 모세였건만, 오늘 우리의 하나님은 충분히 매일매일 쉽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신앙 자체가 감정적 직관에 의지해서 운영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다.

음악과 감정은 충분히 중요한 신앙 행위이다. 아니, 본능적인 인간 행위이다. 누가 음악과 감정 자체를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며 성장해 온 것이 교회가 아니며 오히려 통제하고 조정하며 성장해온 것이 교회 전통이라면, 우리가 이단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가톨릭의 예전이나 우리가 그토록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개신교의 전통이 기실 우리의 예배 문화, 우리의 찬양 문화와는 너무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너무 달라진지는 오래되었음에도 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3. 은혜받았다? 정말 은혜받았나?

트로트와 댄스, 힙합과 발라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사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음악이라는 장르로 정의될 수 있고 음률을 통해 감정적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꼭 같기 때문이다.

80년대를 풍미하던 부흥회와 통성기도 문화는 젊은 교회 공동체의 찬양 문화와 본질적으로 똑같다. 매우 격정적이고 감정 의존적이다. 목사의 설교 행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국 격렬하게 고양되는 감정적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 눈물을 흘리고 신나게 즐거워하며 소리를 지르고 격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에 맹점이 하나 있다. 본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스스로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격하고 시끄럽게 기도하는 대부분의 통성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다들 비슷비슷한 멘트를 늘어놓는다. 체계적인 기도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요, 함께 모여서 참된 기도가 무엇일까를 놓고 세미나를 벌인 것도 아니고, 기도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를 두고 진지하게 숙고해 본 적도 없다. 더구나 깊은 침묵과 묵상 속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을 헤아리면서 차분히 조심스럽게 나가는 과정도 아닌지라,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에서 마이크 들고 큰소리로 외치는 목사님의 멘트를 따라하거나, 평소 많이 들어 본 멘트를 그대로 반복하는 형태로 모두들 비슷한 내용을 내뱉고 만다.

그리고 은혜받았다 응답 받았다 주장한다. 응답 받은 것이야 간절히 원하고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이성적 내용이었고 그것이 이성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부흥회의 격한 감정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은혜를 받았다? 냉정히 말해 '감정적으로 기분이 매우 좋았다'는 말 아닌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과연 어마어마하게 잘 만든 문화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감동받았다'고 하는 말과 무엇이 정확히 얼마만큼 다르다는 말인가. 그래도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맞다, 다를 것이다. 문제는 그 다름의 실체는 정서적 실체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얘기만 할 뿐 전달할 수도 활용할 수도 없다는 데서 또 다른 문제와 부딪친다.

우리의 찬양 문화도 마찬가지다. 성령님을 경험한다? 정확히 무엇을 경험했는가? 환상을 보았는가? 예언을 들었는가? 방언을 하였는가? 신유를 경험했는가? 불세례를 받았는가? 기적을 경험했는가? 집회 후 180도 사람이 바뀌었는가? 어떤 면에서 작금의 찬양 문화는 과거 부흥회보다 더욱 모호하고 곤혹스러운 정서의 집합에 불과하다.

부흥회의 목적은 명확했다. 개인이 복을 받고, 생활의 문제가 해결되고,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것.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비전을 찾고,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고, 다르게 사는 것. 그게 정말 구체적으로 무엇이란 말인가. 수많은 찬양 집회가 있었지만 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말은 과연 어떤 형태로 구체화했던가. 80년대 그렇게 흔히 볼 수 있었던 병 고침과 인생의 변화 같은 것조차 구경하기 힘든 게 작금의 찬양 문화가 남긴 초라한 성적표 아닌가.

모두가 한다고 해서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불량 목사의 불량한 설교에만 있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소위 불량 목사의 불량한 설교가 작금의 찬양 집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설교에 기초한 장년부 목회가 찬양에 기초한 청년부 목회보다 훨씬 성공적이지 않은가.

비판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물량주의만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물량주의 때문에 교육부서는 집중 투자를 받고, 좋은 시설과 좋은 시스템, 좋은 장비를 가지고 마음껏 자신들이 원하는 찬양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거기에 디제잉 하나 추가되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심지어 해외 선교를 갈 때도 온갖 장비들이 다 동원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정말로 전도가 되고 미전도 종족이 돌아왔던가. 이다지도 비참한 성적표를 받아 보면서도 우리의 반성은 이렇게 단출하단 말인가.

비판이 대안은 아니다. 하지만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하나 진지하게 검토하는 가운데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찬양만 하지 않고 성경 공부 열심히 해요." 그 정도로 열심히 한다고 말하지 마라. "이 나이에도 난 디제잉을 받아들일 수 있어." 차라리 트로트로 찬양을 하시라. 개혁은 누구를 꺾거나 누구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문제시되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