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의 역사
지역 | 아시아 > 아르메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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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 |
목차
아르메니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오랜 기간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AD 301년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문자를 창제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1. 아르메니아 고원의 고대 국가들
아라라트산(Mt. Ararat)1) 인근에서 BC 4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죽신, 의류, 와인 생산설비 등이 발굴되어 문명의 흔적을 보여 준다.
아르메니아 고원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국가로 알려진 것은 히타이트(Hittite) 점토판에 언급된 하야사(Hayasa)이다. 하야사는 BC 1500년경부터 BC 1200년경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하야스탄(Hayastan)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하야사’라는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후 아시리아인들(Assyrians)은 고대 아르메니아인들을 ‘강들의 땅’이라는 의미의 ‘나이리(Nairi)’라고 지칭하였다.
BC 9세기~ BC 6세기에는 우라르투(Urartu) 왕국이 출현하였다. 현재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Yerevan)은 바로 우라르트 왕국에 의해 건설되었다. BC 782년 지금의 예레반에 요새를 건설한 것이 도시 형성의 시작으로 2018년은 예레반 창도 2800주년이다.
2. 아르메니아 왕국의 등장, 그리고 번영과 쇠퇴
아르메니아(Armenia)의 기원이 되는 ‘아르미나(Armina)’라는 이름은 BC 521년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Darius I, BC 550년 ~ BC 486년)의 묘비문에서 발견되었다. 예르반두니(Yervanduni) 왕조가 다스렸던 아르메니아 왕국은 BC 6세기부터 BC 2세기까지 존속하였다.
BC 3세기 말 아르메니아 왕국은 시리아 왕국(BC 312년 ~ BC 63년)의 주인이었던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BC 189년 시리아가 로마군에 의해 패퇴하면서 아르타시아스(Artashes) 1세가 아르타샤(Artasha)2)를 수도로 하여 ‘대(大)아르메니아(Great Armenia)’를 건국하였다. 대(大)아르메니아의 서쪽에는 ‘소(小)아르메니아(Minor Armenia)’가 세워졌다.
대(大)아르메니아는 아르타시아스 1세의 손자인 티그란 대제(Tigrnes the Great, 재위 BC 95년 ~ BC 66년 또는 BC 55년)가 다스리는 동안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대(大)아르메니아의 영토는 한때 동쪽으로는 카스피해(Caspian Sea), 서쪽으로는 지중해(Mediterranean Sea)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파르티아(Parthia)와 서쪽으로는 로마의 사이에서 로마의 계속된 침공을 받으면서 점차 국력이 쇠퇴하였다. 대(大)아르메니아는 결국 AD 387년에 멸망하였다.
한편 AD 40년경부터 아르메니아에는 크리스트교가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크리스트교는 300여 년간 교세가 확장된 끝에 301년에는 티리다테스 3세(Tiridates Ⅲ, AD 238년~314년)에 의해 국교로 공인되었다. 이는 로마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337년보다 36년 앞선 시기이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국가였다.
예수의 12사도 중 바르톨로메오(Bartholomaeus)3)와 유다(Judas)4)가 아르메니아에 크리스트교를 전래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지금도 아르메니아 교회의 정식명칭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이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후 잦은 외침을 받으면서도 아르메니아가 국가적·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었다. 2012년 현재 아르메니아 국민의 약 93% 이상이 아르메니아 교회의 신자이기도 하다.
AD 4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르메니아에는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침략이 빈번해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빈번한 외침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와 교육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405년, 성 메스로프 마시토츠(Saint Mesrop Mashtots)에 의해 고유문자가 창제되어 아르메니아어 문학과 역사 기록이 가능해졌다. 5세기에 성행한 역사기록(Historiography)은 아르메니아 고전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28년에는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의 침략으로 아르메니아 왕국이 붕괴되고, 국토 대부분이 페르시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451년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항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에 흡수되어 사라지지 않고, 크리스트교의 종교적 자유와 민족적 정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에도 아랍세계의 침략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은 반복되었다. 9세기 말경에는 아랍의 칼리프(Caliph)5)로부터 독립을 얻어 바그라투니 왕조(Bagratuni Dynasty) 아래 아르메니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왕국은 10세기에 들어와 극심한 내분을 겪다가 1045년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의 침입으로 붕괴되었다.
비잔틴의 황제가 잠시 아르메니아를 통치하였으나, 1071년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투르크(Seljuk Turk)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르메니아는 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 때 셀주크투르크의 박해를 피해 피신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소아시아 남부 지중해 연안에 실리시아(Cilicia) 왕국6)을 건설하였다. 실리시아 왕국은 유럽십자군의 예루살렘 진격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13세기~17세기는 아르메니아에게 외침의 시대라 할 만하였다. 13세기~14세기 동안에는 이집트 맘루크왕조(Mamluk dynasty)의 침략, 13세기~14세기 중반까지는 몽골의 침략, 15세기에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침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였다.
16세기에 들어서는 1453년 비잔티움(Byzantium)을 함락했던 오스만투르크(Osman Turk)와 페르시아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을 벌인 결과 1639년 아르메니아의 대부분 지역은 두 나라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이와 같은 분할 통치는 19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3. 제정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각축
17세기 말 아르메니아 사절단이 러시아의 표트르 1세(Pyotr I, 피터 대제,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를 예방하여 지원을 요청하는 등 아르메니아와 러시아 간에 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제정러시아(Imperial Russia)는 17세기부터 남코카서스 지방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에는 제정러시아와 페르시아 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1812년에는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패퇴시켰다. 결국 1828년, 페르시아군은 동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축출당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있던 서부 아르메니아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면서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걸쳐 오스만 황제의 박해를 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코카서스(Caucasus) 지역에서는 터키와 러시아 간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군에 참여하자 오스만 터키(오스만 제국)는 1915년 4월 아나톨리아(Anatolia)7)지방에 살고 있던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15년~1917년간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인명 피해를 입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당시 터키에 의해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처형되었다면서(희생자 수는 60만 명에서 150만 명에 이르기까지 자료 출처에 따라 다양하다), 이를 아르메니아 집단학살(Genocide)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4월 24일을 집단 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다.
반면 터키 정부는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의 사망이 내전과 기아, 질병에서 기인한 것으로 아르메니아인들뿐만 아니라 터키인들도 다수 사망했다면서 집단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르메니아와 터키 간 분쟁(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문제)은 현재도 아르메니아와 터키 간의 관계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1917년 10월에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군대는 코카서스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1918년, 터키는 동부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예레반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정규군과 의용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1918년 5월 28일에는 ‘아르메니아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Armenia)’ 수립이 선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 8월 10일, 오스만 터키와 열강 간에 세브르(Sevres)8) 조약이 체결되었다. 세브르 조약은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존속과 함께 오스만 터키가 통치하던 지역을 아르메니아 공화국에 돌려준다는 내용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세브르 조약은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1920년 터키군이 아르메니아 공화국을 침입하여 터키-아르메니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1920년 12월 2일, 알렉산드로폴(Alexandropol)9) 조약이 체결되었다. 알렉산드로폴 조약에 따라 아르메니아 군은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영토의 50% 이상을 터키에 할양하였다. 아울러 세브르 조약에 의해 아르메니아 측이 터키로부터 받기로 했던 지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11월 29일에는 소련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였다. 그 해 12월 4일 예레반이 함락되면서 2년간 존속되었던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결국 붕괴되었다.
4. 소비에트 연방 편입
1922년 3월 4일,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공화국은 ‘트랜스코카서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SFSR)10)’을 구성하여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 1923년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민 다수를 점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지역이 아제르바이잔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 이는 오늘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국 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36년에는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 조지아 소비에트공화국이 각각 성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소련군으로 참전하였다. 당시 1,400만 명의 아르메니아 인구 중 50만 명이 소련군에 동원되었다. 이 중 12만 5천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산된다.
1988년에는 아르메니아에 진도 7.2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5. 독립 이후(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 현재)
아르메니아는 1991년 8월 독립선언문을 채택하였고, 9월 21일 주민투표(Referendum)를 실시하여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9월 21일은 아르메니아의 독립기념일로서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10월에는 아르메니아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테르-페트로시안(Ter-Petrossian) 대통령이 5년 임기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996년 연임).
1992년 3월에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의 전쟁이 발발하여 많은 사상자와 난민이 발생하였다.
1994년 5월에는 휴전 이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11) 민스크 그룹의 중재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1998년에는 테르-페트로시안 초대 대통령이 하야하고, 로베르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 3대 대통령이 선출되었다(2003년 연임).
2008년 세르지 사르키샨(Serzh Sargsyan) 5대 대통령이 선출되어 코차리안 전(前) 정부의 대내외정책을 계승하였다.
- 참조어
- 아르메니아
각주
- 1 아라라트산(Mt. Ararat):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도달한 곳이라고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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