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섭 목사는 1972년 강원도 춘천에서 일어난 여자 어린이 성폭행 살인범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정 목사의 억울한 사연은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 목사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은 26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난 1월 서울고법은 소송 제기 소멸시효 기간 6개월에서 열흘이 늦었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열흘은 정 목사가 진실규명을 위해 외롭게 싸워온 36년에 비하면 너무 짧은 시간이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서 정 목사를 만나 42년째 끝나지 않는 ‘과거사’에 대해 들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36년간 성폭행·살인 누명…‘7번방의 선물’ 실존 인물 정원섭 목사
“배상금은 우리 가족의 핏값…나를 또 죽이겠다는 것” 울분 토해
지난해 1281만명의 눈물을 훔친 영화 <7번방의 선물> 주인공은 사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피고인 이용구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는 영화 속 판결도 모의재판에 그쳤다. 그러나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정원섭(80) 목사는 아직 살아 있다. 당시 만홧가게를 운영하던 정 목사는 1972년 강원도 춘천시 역전파출소장의 열살 딸을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5년 만인 1987년 출소했다. 검찰 수사 때부터 무죄라고 주장해온 정 목사의 누명은 30년이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법원 재심 무죄 판결로 벗겨졌다. 경찰이 고문하고, 검찰은 조작된 사실을 바탕으로 기소하고, 법원마저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 사건은 국가가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삶을 망쳐놓은 부끄러운 과거사였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려던 사건은 하루아침에 악몽이 됐다. 지난 1월23일 서울고법 민사8부(재판장 배기열)가 소멸시효 기간이 열흘 지났다며, 정원섭 목사와 그 가족에게 손해배상금 26억원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판결이 내려진 이유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12일 재심 무죄 선고를 받은 과거사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전까지 민법에 따라 3년으로 통용되던 소멸시효 기간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못박았다. 이 판결로 1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소멸시효가 2심 때 적용돼 26억원의 손해배상금은 하루아침에 0원이 됐다. 정 목사는 시작에 불과하다.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독재·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폭력, 조작 간첩, 의문사 사건 등 반민주·반인권적인 ‘과거사’ 피해자들은 여전히 많다. 이 판례에 따라 손해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또다른 ‘정 목사들’이 줄줄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피해자와 단체들은 대법원의 소멸시효 삭감을 과거사 청산의 후퇴로 평가한다. 과거사 위원회들의 활동 종료 뒤 피해자들은 법원 재심과 손해배상을 통해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아왔다. 이들은 재심 무죄와 손해배상을 국가의 사과이자 화해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난 시절 조작된 혐의에 대해 확정 판결을 내렸던 법원이 이제 와 피해자들이 ‘권리 위에 잠자고 있었다’며 소멸시효를 내세워 손해배상금을 깎고 있다. 국가로부터 2차 가해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과거사 피해자 정원섭 목사를 20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법무법인 덕수 사무실에서 만났다.
2008년 11월28일 춘천지법에서 형사 재심 첫 무죄 판결을 받은 정원섭 목사(가운데)가 기뻐하고 있다. 재심 무죄 확정판결과 손해배상 소송 1심 선고는 평생의 한을 위로한 선물이었다. 연합뉴스 |
“배상금은 우리 가족 핏값…다시 무기징역 받은 기분”
“손해배상금은 나와 우리 가족의 피나 다름없는데, 그걸 주지 않겠다는 건 나를 또 죽이겠다는 거예요.” 42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싸움에 정원섭 목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재심 무죄 확정판결 뒤 국가를 상대로 민사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멸시효 탓에 1심과 2심 판결이 엇갈렸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돈을 안 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잘못한 걸 인정하기 싫다는 거죠. 오히려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해줘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에요. 형사보상금 확정일로부터 6개월 10일이 지났다는 건데, 형사보상금은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면 검찰에서 10일 내에 주기로 돼 있어요. 근데 5개월 동안 4번씩 나눠서 줬어요. 형사보상금액을 손해배상 고소장에 써야 하니까, 돈을 받아야 소송을 할 수 있어요. 그거 다 받고 하니까 10일이 지난 거예요. 검찰이 늑장 부린 것도 법을 어긴 건데, 국가가 잘못한 것을 아무 책임 없는 저에게 덮어씌운 거 아닙니까.”
1972년 춘천의 논두렁서 발견된
10살 여자아이 살해범으로 몰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무기징역
15년 뒤 출소해 진실규명 노력
36년만의 무죄판결, 그리고 0원
소멸시효 기간 10일 지났다며
26억 손해배상금을 없던 일로
손배소 비용은 형사보상금인데
법원은 그 돈이 5개월이나 늦게
지급된 것은 문제삼지 않았다
“진실화해위 결정문 받았을 때 가장 기뻤지만…” 형사보상금은 재심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피해 보상금이다. 손해배상금이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라면, 형사보상금은 구금기간에 대해 주는 보상이다. 검찰 내부지침으로 형사보상 지급청구 결정일로부터 10일 안에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정 목사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정 목사는 2012년 5월18일 형사보상금 9억6000만원 지급 결정을 받았지만, 실제 돈은 6월8일~10월19일 사이 네 차례로 나눠 입금됐다. 형사보상금 지급이 늦어지면 그만큼 손해배상소송도 지연된다.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은 장기간의 옥살이와 사회적 낙인 탓에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보상금을 인지대로 쓰고 있다. 정 목사 사건을 담당하는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가 “설령 6개월로 소멸시효가 줄어든 걸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형사보상금 지급일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돈을 받은 10월19일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형사보상금 지급의 고질적인 문제 탓에 국민권익위원회도 지난해 8월 법무부 장관에게 관련 제도 정비를 권고했다. -손해배상금은 목사님께 어떤 의미입니까? “내 피, 우리 가족 전부의 피죠. 우리 삶이 피 흘린 삶이에요. 이건 나를 몇 번 죽이는 거예요. 예전에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을 때와 똑같은 거죠. 그때는 몽둥이를 들어 직접 나를 때렸다면, 이번에는 경제력을 죽이는 거죠. 그 돈을 다 준다고 해도 그동안 잃어버린 세월이 어딥니까. 그 세월 회복 못 합니다. 국가가 사과도 안 하지 않습니까. 배상금 말고는 없는데 그것도 안 한다니. 미국에서는 성폭행 살인 누명을 쓰고 11년을 감옥에서 산 데이비드 에이어스에게 지난해 114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어요. 저는 그보다 긴 15년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돈이 많다고요? 저 같은 대우 받고 살면 다들 몇 달 못 살고 죽었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그 고통을 견뎌내고 나온 거지 하나님마저 원망했으면 감옥에서 벌써 죽었을 거예요. 감옥에서 일부러 더 착하고 모범적으로 살려고 했어요. 그것이 바로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니까요. 역설적이지만 나를 너희가 이렇게 망가뜨려도 난 그렇게 망가지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살아왔는데 소멸시효라는 말로 국가의 잘못을 나한테 뒤집어씌웁니까.” -처음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한 게 1999년 11월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재심 청구를 생각했던 건가요? “제가 자신이 있으니까 진실 규명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경찰이나 검찰은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건을 조작했는데 저를 믿어 주겠어요? 그래서 교도소에서 징역 살면서 책을 찢어 꿀떡꿀떡 삼키면서 형사소송법 공부를 했어요. 진실 규명하려면 법을 알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진실 규명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 재심 신청은 2001년 10월에 기각됐고, 진실화해위가 2007년 진실을 규명한 뒤에 다시 제기한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졌죠. 무죄 확정판결도 2011년 10월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그걸 어떻게 한마디로 다 말하겠어요…. 돌이켜보면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뻤습니다. 몇십년 동안의 싸움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됐으니까요. 그 전까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으니까요.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다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하겠죠. 누명을 벗기 전에는 누가 나를 똑바른 시선으로 보겠어요. 어딜 가도 쫄아서 고개 숙이고 다녔어요. 춘천지법에서 처음 무죄 판결을 받고 좋아했는데, 검찰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항소·상고하는 바람에 고법, 대법원까지 갔어요. 증거가 다 허위라는 게 밝혀졌는데 계속 유죄를 주장하는 걸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죠.” -30년 넘는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날 아신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을 때나 통곡할 때나 언제나 제 옆에는 그분이 계셨어요. 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셨죠. 저의 가장 위대한 변호사는 주님이었습니다. 둘째는 진실은 죽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아무리 짓밟고 뭉개버려도 진실은 죽지 않는 생명력이 있다고 믿었죠.” 1973년 법원은 1심에서 대법원 판결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 목사가 성폭행 살인범이 맞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정 목사의 재심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은 2008~2011년 동안엔 다시 세 차례에 걸쳐 정 목사의 무죄를 인정했다. 세 번의 무죄 판결에서 법원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것은 1심 법원인 춘천지법 형사2부(재판장 정성태)뿐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대었던 법원마저 적법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하였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2013년 7월 서울중앙지법 민사33부(재판장 박평균)는 정 목사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손해배상금 26억원과 이자 지급을 결정했다. 하지만 불과 반년 뒤에 법원은 말을 바꿨다.
1972년 ‘춘천 어린이 성폭행 살인범’ 누명을 쓴 정원섭 목사가 경찰의 현장검증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제공 |
“무기징역 선고받을 때와 똑같죠
그땐 몽둥이로 날 직접 때렸다면
이번엔 경제력을 죽이는 거죠
돈 다 줘도 세월 회복 못합니다
사과 안 하면서 배상금도 없다니”
정 목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판결은 과거사 피해자인
여든 고령 그에게 마지막 기회다
또다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교통사고 당한 아내, 노동판에 뛰어든 아들 -감옥에 들어갈 당시 부인과 아이까지 다섯 식구가 남아 있었죠.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 사라진 뒤 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죽지 못해 살았죠. 춘천에서는 그날로 바로 쫓겨났어요. 큰애가 아홉 살이고 막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여자가 혼자 애 넷 키우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했겠어요. 형님 집에 가 숨어 있는데 거기까지 찾아와서 사람들이 행패 부렸어요. 형 확정 뒤 광주 교도소로 갔는데 가족은 서울에 있어서 자주 못 봤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걷지 못하게 됐어요. 엄마 그렇게 다치고 나서 큰아들이 중학교 마치고 노동판에 뛰어들었어요. 그 아들이 제일 불쌍하죠. 남들은 다 하는 공부 중학교밖에 못했으니. 내가 교도소에서 1987년에 나오고 나니 막내가 고등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완전히 우리 가정은… 나만 죽인 게 아니라 우리 가족 다 죽인 거예요.” -1987년 12월24일 모범수로 가석방 출소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지내셨나요? “사람 마음이 곧지만은 않지요. 가족이 저를 믿을 때도 있고 믿지 않을 때도 있고. 기계적으로 사람을 딱 믿고, 안 믿고 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가족이 저를 기다려줬죠. 하지만 사회적 낙인 때문에 누가 나 볼까 봐 전라북도 장수군 대성리 산골마을에 숨어 살았습니다. 누나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바위에 ‘통곡’을 한자로 적어놓고 거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곤 했죠.” 절망 속에서도 정 목사는 자비량 목회의 꿈을 놓지 않았다. 1991년 누나가 세상을 떠난 뒤 1992년 전라북도 남원시에 충절교회를 세웠다. 그 후 지금까지 충절교회에서 사슴 등을 키우며 지내고 있다. -국가가 뒤흔든 42년의 삶이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진실을 규명할 수 있었던 건 저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당당해졌어요. 비록 지금 형식은 대한민국과 법원에서 싸우고 있지만 미워도 내 부모, 내 자식인 것처럼 내 국가 아니겠어요? 잘못한 사람들이 나쁜 거지 국가를 미워하진 않습니다. 남은 바람이 있다면 배상금이라도 많이 받아서 좋은 일 하고 싶어요. 형사보상금도 받은 뒤 모교에 장학금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배상금은 통일을 위해 쓰고 싶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통일 아닙니까.” 정 목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판결은 여든 고령의 과거사 피해자에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또다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