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생명 평화 교회론 심포지엄'이 생명평화마당 주최로 9월 24일 열렸습니다. 10월 19일 열리는 '2013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작은교회 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해 작은 교회들이 모였습니다. 홍인규·양현혜·이정배 교수의 발제문 전문을 하나씩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1. 들어가는 말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에베소 교회를 언급하여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모이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기록한다(고전 16:19). 또한 바울은 약 2~3년 후에 로마에 편지를 쓰면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 또 저희 집에 모이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말한다(롬 16:3, 5). 3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감옥에서 바울은 친구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는 그 편지 서두에서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모이는 교회'에게 인사한다(몬 1:2). 마지막으로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말한다(골 4:15).

이상의 인사에서 바울은 가정 교회 곧 개인의 가정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사실,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모두 가정 교회다. 가정 교회는 2세기 중엽 이후에 조금씩 변화를 경험하지만,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어(313년) 바실리카(basilica)라는 직사각형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교회 형태이었다.
가정 교회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교회의 원형(original form)과 본질의 문제로 인도한다. 가정 교회를 전제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삶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본질에서 이탈한 점이 많다. 한국교회도 양적 팽창에만 몰두하다가 근본적인 것을 많이 상실하였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모델 역할을 하고 있는 대형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의 상실과 대다수의 성도들이 예배의 수동적인 관람자로 전락된 것은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1)이방인의 사도 바울과 교회의 설립, (2)가정 교회의 사회적 상황, (3)가정 교회의 통합 능력, (4)가정 교회의 공중 예배, 그리고 (5)가정 교회의 변천과 종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원형을 보게 되길 희망한다.

2. 이방인의 사도 바울과 교회의 설립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길리기아(Cilicia) 지방의 수도인 다소(Tarsus)에서 태어났다(행 21:39; 22:3). 그는 조상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율법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원시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Damascus) 회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그룹을 진멸하고자(행 9:2, 19~20; 갈 1:13),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았다(고전 15:5~11; 롬 1:5). 소명을 받자마자 바울은 아라비아(나바티아 왕국)와 다메섹에서 독자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갈 1:16~17). 그리고는 북 수리아(Syria)와 자기 고향 길리기아에서(갈 1:21)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초기 사역은 특별한 성공을 거둔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크게 변화되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사역하면서, 적극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동참하였다. 1차 선교 여행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Cyprus)섬의 살라미와 바보에서,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2차 선교 여행은 바울이 바나바와 분리하여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바울은 마게도냐(Macedonia)로 건너가 빌립보(로마와 비잔티움을 연결한 중요 도시)와 데살로니가(마게도냐의 수도)와 베뢰아에서 선교하였다. 그리고 아덴을 거쳐 고린도로 내려와, 고린도(국제적 무역 도시)에서 1년 6개월을 체류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3차 선교 여행은 에베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에서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새로운 도시에 가면 먼저 회당을 방문하여, 전통적인 회당 스타일로 말하였다(행 13:5, 14~16; 14:1). 바울은 또한 강당과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행 17:17; 19:9). 그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였다(고후 11:23~29). 그는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이 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가 되었다(고전 9:19~23). 바울이 소원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그는 주 앞에 자기 교회와 함께 서는 것이었다(고전 9:1~2; 고후 11:2).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모두 개인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고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가정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삶은 평등과 형제 사랑에 근거하였다. 현대 교회의 심각한 병폐인 예배와 일상생활의 분리는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정이 예배의 처소요 신앙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신앙과 삶은 쉽게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3. 가정 교회의 사회적 상황

바울이 교회의 모임 장소로 개인의 가정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정은 교회가 외부 권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체적인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가정에서 교회는 예배와 삶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러 관계(개인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관계)의 네트워크(network)는 교회의 기초 구조로 활용되었다.

바울이 설립한 교회들 중에서 신약성경에 가장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교회는 고린도 교회이다. 고린도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는 가정 교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그림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로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그리스도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가(또는 브리스길라)를 만났다. 생업이 서로 같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집에 머물면서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하였다(행 18:1~3).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서 모름지기 고린도의 첫 가정 교회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가정 교회는 디도 유스도 집에서 형성된 것 같다(행 18:7).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선교 보조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에 매달리지 않고, 디도 유스도 집으로 옮겨 복음 증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 집은 회당 옆에 위치하여 바울에게 특별히 중요하였다. 1년 반 후에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함께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고린도에는 다른 가정 교회들도 존재하였다. 가이오의 집(롬 16:23; 고전 1:14)에서는 분명히 한 그룹이 모이고 있었고, 또한 회당장 그리스보의 집(행 18:8; 고전 1:14), 스데바나의 집(고전 1:16; 16:15~16), 그리고 에라스도의 집(롬 16:23)에도 가정 교회가 모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 도시에 여러 가정 교회들이 존재하였다면, 여러 교회들은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었을까? 고린도의 경우, 고린도전서 14:23에 '온 교회'가 함께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로마서 16:23에도 고린도 교회를 언급하여 '온 교회'의 모임 장소가 가이오의 집이었다고 말한다. 여기 '온 교회'란 고린도에 있는 모든 가정 교회들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당시 도시에 사는 일반인의 집에는 적어도 10~20명 정도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아마도 처음 교회는 이러한 방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더 작은 그룹들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모든 교회들이 함께 예배하기를 원하면, 다른 집의 더 큰 방이나 안뜰(inner courtyard)에서 전체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온 교회'의 수는 고대 로마 집의 크기와 그리고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인물 정보를 고려할 때 약 50~100명 정도이었던 것 같다. 작은 가정 교회들은 서로 구분된 공동체를 형성하였지만, '온 교회'의 일부로 생각하였다.

그러면 교회 안에는 어떤 사회 계층이 있었는가?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교회는 역시 고린도 교회이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세 가지 계급이 있었다. 상류 계급은 원로원 의원(senator)과 기사(knight)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로마 사회에서 수적으로 매우 작은 그룹이었다. 하류 계급은 재산이 없는 무산 계급으로, 수적으로 가장 큰 그룹이었다. 이 그룹은 도시나 농촌이나 광산에서 노동으로 생활해 가는 해방 노예나 노예로 구성되었다. 경제 발전과 도시화 과정을 통하여 중류 계급이 성장하였다. 중류 계급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도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 유산 계급은 매매업자, 지주, 제조업자, 금융업자, 그리고 교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울의 메시지에 자신을 개방하였던 사람들은 중류와 하류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배타적이고 전통적인 로마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어서 접근이 어려웠다. 그런데 중류층 사람들은 개척 정신이 강해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가정 교회는 이러한 중류층 사람들의 개종과 함께 시작되었다. 만약 유복한 사람이 자기 집을 가정 교회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지 않았다면, 가정 교회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비좁은 숙소에 거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린도전서 1:26~29에서 바울 자신도 처음부터 유력한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고 진술한다. 그들의 이름은 스데바나, 그리스보, 가이오, 에라스도, 아굴라, 브리스가, 디도 유스도, 소스데네 등이다(고전 1:14~16; 16:15~17; 롬 16:1~2, 23; 행 18:2~3, 6~8, 17).

바울 서신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있기 전에는, 바울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조직이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 처음부터 가난한 자들과 함께 부유한 자들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가 거의 없다. 초기 가정 교회 안에는 사회적으로 다양한 계층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탐구하여야 할 일은, 그러한 다양한 구성원들이 가정 교회 안에서 어떻게 통합을 이루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4. 가정 교회의 통합 능력

초기 가정 교회들은 주변 세계와 분명히 구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교회의 내부 일들을 사랑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였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종이나 직업이나 다른 사회적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졌다. 그 결과 여러 그룹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중요한 일은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 일은 각 교인의 모든 삶의 측면에서 획기적인 조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과의 분명한 단절과 계속되는 갈등을 동반한다. 그러면, 새로운 개종자는 무슨 유익을 얻기에 그러한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였는가?

가장 중요한 소득은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모든 인류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석한 것이다(고전 15:1~11). 복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그리고 심판 아래 있는 사람을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로 변화시킴으로써 그 능력을 입증한다. 청중으로부터 가장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이 영생(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기독교 개종자들의 또 다른 소득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을 영접하는 것과 교회에 가입하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집단적으로 '성도'(롬 1:7; 고전 1:2; 고후 1:1)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불린다(살전 1:4; 고전 1:27).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롬 8:16, 21; 갈 3:26). 따라서 그들은 서로를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중요한 특징은 평등이다. 이것은 복음을 영접한 자들이 다양한 그룹과 여러 사회 계층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특별히 의미 있다. 고대 사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나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구분과 차별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안에는 더 이상 인종적, 신분적, 성적 구분이 존재할 수 없다. 누구든지 세례를 받고 동일한 성령을 부여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것이다. 이제는 이방인도 유대인의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고(롬 11:17),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이라 주장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복의 상속자가 되었다(갈 3:29; 롬 4:16, 17). 노예도 더 이상 '종과 같지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가 되었다(몬 1:16; cf. 골 4:9). 또한 성의 차이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cf. 창 1:27).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교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여자가 교회에서 예언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성령과 세례는 교회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을 무너뜨리고 혁명적인 평등을 창조하신 것이다.

성령은 황홀경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회 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은 사랑을 유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서로 사랑의 종이 되면, 교회는 놀라운 통합을 이루게 된다.

5. 가정 교회의 공중 예배

이제 우리는 평등과 하나 됨의 공동체인 가정 교회의 공중 예배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 서신에서 공중 예배 중에 발생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곳은 고린도전서 11~14장이다.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활동들이 있었는가? 먼저, 고린도전서 11:20이하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만찬은 가정집에서 모든 성도가 참여하는 애찬(love feast) 중에 거행되었다(cf. 롬 16:23). 그런데 이 식사가 언급되는 성경 어느 문맥에서도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나 또는 어떤 공식적인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식사의 경우처럼, 주의 만찬은 교회로 모이는 집의 남자 주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6에서 예배 활동에 대하여 중요한 진술을 한다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cf. 고전 14:6). 여기에서 언급된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은 그 당시 공중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들이었다.

이 외에도 고린도전서 14:15~16에는 다른 예배 요소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것들은 '기도', '찬양', '감사', 그리고 공동체의 반응인 '아멘'이다. 또한 16:22의 '마라나타'("우리 주님, 오시옵소서")도 초기 종말론적인 기도로서, 당연히 예배 활동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예배 활동의 목표는, 고린도전서 14:26c("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에 나타난 바와 같이, 덕을 세우는 것이다. 유대인의 모임은 토라 중심이었다. 곧, 성경 낭독, 강론, 신앙 고백 그리고 기도가 회당 예배의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헬라인의 종교 모임은 행진, 춤, 극적인 의식 그리고 신성한 식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자기 은사를 가지고 서로 세워 주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예배 행위이었다. 외부인들의 눈에는, 초기 가정 교회의 모임은 종교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전, 신상, 제사장, 제사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어떤 신성한 장소보다는 성도의 모임이 바로 성전이었고(고전 3:16~17), 성도 모두가 제사장들이었다.

6. 가정 교회의 변천과 종말

바울의 교회들은 모두 하나도 예외 없이 가정 교회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는 2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을 지배하였다. 개인의 가정, 특별히 식당은 그리스도인들의 초기 자기 인식에 부합하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모임 장소로서의 가정집을 선택한 것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위해 다락방을 선택하신 것과 사역의 환경으로 세속적인 장소를 선택하신 것 그리고 믿는 자들 사이에 가족적인 유대를 강조하신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가정 중심의 초기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갈릴리 해변에서부터 로마 제국의 변방까지 신속하게 보급하였다.

그런데 2세기 중엽 이후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임 장소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가정집을 개조하여 교회 모임 장소로만 이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 교회가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교인의 숫자적 증가로 인한 자연적인 발전이었다.

3세기 중엽 이후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개조된 가정집과는 다른 별도의 교회당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별히 270년에서 303년까지, 개종자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여러 지역에 별도의 교회당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콘스탄틴(Constantine) 이전에 아마도 일종의 바실리카(basilica)라고 할 수 있는 교회 건물들이 이미 존재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런 건물들 안에는 일반적으로 성직자의 자리와 평신도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다.

313년 콘스탄틴의 밀란 칙령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당 건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공인 당시 로마제국 안의 그리스도인의 인구는 약 10% 정도로 추산되나, 그 수는 곧 크게 증가했다. 4세기 초 콘스탄틴의 전임자 디오클레티안의 박해 시대 동안 교회당들의 파괴와 기독교 공인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수적 증가로 인하여, 교회는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 교회당은 소위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직사각형의 건물로, 한 지역의 교회 또는 대도시의 한 구역의 교회 전체를 포함하기에 충분한 큰 건물이었다. 바실리카는 3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그것들은 사각형 형태의 입구인 아트리움(atrium), 회중석(naves) 그리고 성직자의 좌석이 있는 성소(sanctuary)이다. 이런 교회당의 출현과 함께 교회는 그때까지 존재했던 가족적인 가정 공동체의 교회 구조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예배 의식도 일부 궁중 의식을 받아 들여 더 장엄하고 더 고정화되고 더 제사장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제 교회의 삶은 많은 점에서 대규모적이었으나, 추상적이기도 하였다. 친밀하고 가족적이고 실제적인 교회의 삶은 상실되었다.

7. 나가는 말

가정 교회는 신약성경 시대에 출현하여, 바울의 모든 교회의 예배와 삶을 지배하였고, 150년까지 기독교 신앙을 로마제국 전역에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세기 중엽 이후 가정 교회는 조금씩 변화를 경험하였지만, 4세기 초까지 가장 보편적인 교회 형태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밀란 칙령(313년) 이후에 바실리카들이 세워지면서 가정 교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바실리카라는 교회 건물의 등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회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심각한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 홍인규 교수는 제도화된 교회 전통 역시 가치가 있지만, 제도화 이전의 교회의 본질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는 성도의 모임이 아니라 건물로 이해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는데(고전 3:16; 고후 6:16),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복수(plural) 리더십과 리더십의 평등은 주교(bishop)를 중심으로 하는 성직자 계급 제도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일종의 구약적 제사장 제도가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셋째, 은사 중심의 사역이 사라지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시작되었다. 바실리카 안에 있는 성소와 회중석의 구분은 그런 변화를 반영한다. 넷째, 예배는 모든 성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축제에서 성직자가 중심이 된 의식(ritual)으로 전환되고 평신도는 수동적인 관람객으로 전락하였다. 다섯째, 바울의 가정 교회에서 통합되었던 예배와 삶이 분리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에서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변질되었다. 여섯째,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 애찬(love feast)에서 분리되어, 공동 식사가 아니라 제단 의식이 되었다. 일곱째, 공동체 안에서 은사를 통한 나눔은 없어지고, 이제 주교에게 나아오는 것과 그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례식에 참여하는 것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이해의 변화가 발생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가족 공동체의 특성을 상실하고, 개인주의가 교회 안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런 엄청난 변화들과 함께, 성경에 나타난 원래 교회의 모습인 가정 교회는 이제 불법 모임으로 선언되었다. 예를 들면, 360년과 370년 사이 어떤 시점에서 열린 라오디게아(Laodicea) 회의는 가정집에서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주교나 장로는 가정집에서 주의 만찬을 행해서는 안 된다"(Canon 58). 이것은 어떤 점에서 성경 이후에 생겨난 교회 전통이 성경을 정죄한 것이다. 물론, 신약성경 이후 교회의 발전은 모두 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변화 속에서도 교회의 본질은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사실, 바울은 교회 건물과 제도화된 성직자 계급이 없었어도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무엇이 결핍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진 회피할 수 없는 도전은, 새로운 교회 전통 속에서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하느냐는 것이다.

홍인규 교수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