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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딸에게 삼성은 백지 사표를 요구했다(프레시안)

주방보조 2013. 3. 6. 09:58

"죽어가는 딸에게 삼성은 백지 사표를 요구했다"

[황유미, 그리고 6년 ①] 故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 씨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3-05 오전 9:21:13

200여 명 그리고 80여 명.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지금까지 삼성전자 등에서 일했다가 백혈병 등 희귀병에 걸렸다고 제보한 노동자 수와 사망자 수다. '삼성 백혈병' 문제가 아직 세상에 알려지기 전, 딸의 산재를 알리기 위해 언론과 국회의원, 시민단체 등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던 한 아버지가 있다. 바로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다가 2007년 3월 6일 백혈병으로 숨을 거둔 고 황유미(사망 당시 23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다. 황유미 씨의 6주기 추모 기일을 맞아 황상기 씨로부터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

딸을 백혈병으로 먼저 떠나보낸 지 6년. 아버지 황상기 씨는 여전히 서울속초를 오간다. 지난 6년간 기자회견, 1인 시위, 집회 등 '삼성전자 직업병'과 관련한 행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지난달 28일 서울에서 만난 황 씨는 "속초에서 택시 운전하고 사는데 몇 푼 벌어서 이러고 살아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6일은 고 황유미 씨의 6주기 추모 기일이다. 황상기 씨에게 딸을 떠나보낸 시간은 고스란히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싸운 시간이었다. 회사가 부인하고 근로복지공단이 승인하지 않은 산재를 법원에서 인정받기까지 황유미 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6년(산재 신청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4년)이 걸렸다. 끝이 아니다. 2심, 3심이 끝나기까지 또 몇 년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른다.

▲ 황상기 씨 ⓒ프레시안(최형락)

"희귀병에 걸린 딸…삼성은 백지 사표를 요구했다"

고 황유미 씨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혈액암)' 진단을 받은 건 2005년 6월. 당시 나이 21세였다. 집안에 암 가족력도 없는데, 건강했던 딸이 갑자기 희귀병에 걸렸다.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 3라인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한 지 1년 8개월 만이었다.

2005년 12월 유미 씨가 골수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기에 접어들 무렵, 유미 씨와 같은 공장에서 2인 1조로 일한 고 이숙영(사망 당시 30세) 씨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황 씨는 산재를 확신했다. 20대는 인구 10만 명당 1년에 4.2명(2010년 국가암등록통계)밖에 안 걸린다는 희귀병인데,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두 명이 백혈병에 걸렸다니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회사는 산재를 인정하는 대신 사표를 요구했다.

"회사 관리자들이 속초에 있는 집까지 온 거예요. 유미 휴직 기간을 더는 연장할 수 없다고. 당장 사표를 써야 한대. 사표를 쓰기 전에 회사에 요구하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해서 유미가 치료받을 수 있게 산재를 신청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관리자가 나보고 '아버님이 삼성을 상대로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못 이긴다고 했어요.

산재 말고 다른 걸 요구하라고 해서 유미 치료비를 지원해달라고 했어요. 관리자가 치료비 5000만 원을 지원해 줄 테니 당장 사표를 쓰라는 거야. 백지 종이를 반 접어서 유미더러 이름하고 주민등록번호만 쓰라는 거야. 그렇게 받아간 게 사표였어요."

2006년 11월 중순, '백지 사표'를 쓴 지 며칠 뒤 유미 씨에게 백혈병이 재발했다. 황 씨는 이때, "사표를 받아간 회사 관리자가 돈 500만 원을 가져와서 '이것밖에 없으니 이 돈으로 해결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황 씨는 삼성전자에서 일했다가 백혈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6명을 찾았다. 그러나 삼성전자 측은 '황유미 씨는 퇴사했으므로 삼성전자와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2007년 1월에 인사과 부장, 과장 등 4명이 집에 왔어요. 화학약품을 쓰고, 6명이나 백혈병에 걸렸는데 산재가 아니냐고 따졌죠. 그랬더니 자기네는 화학약품도 안 쓰고 백혈병 걸리는 물질도 안 쓴대. 도리어 '유미는 사표 쓰고 나가서 삼성 사람도 아닌데 왜 삼성에 이런 얘기를 뒤집어씌우냐'고 몰아붙이는 거예요. 4명이 몰아붙이니 대화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유미는 다 쓰러져 죽어 가는데, 그 사람들은 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물어보고 몰아붙이기만 했어요. 서러워서 눈물이 났어요."

"가까스로 나간 기사, 배포 즉시 회수당해"

2007년 3월 6일 황유미 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황상기 씨는 딸의 노동 환경을 알리기 위해 국회의원, 방송사를 찾아 백방으로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다 2007년 6월, 유미 씨의 작업 환경과 화학물질에 관한 내용이 적힌 일기장을 토대로 <수원시민신문>에 기사가 나갔다. 같은 달 노동·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산재도 신청했다.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공장 앞에서 출근하는 사람들한테 유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돌리면 삼성 경비들이 와 가지고, 나눠주는 즉시 다 빼앗는 거예요. 그래서 수원역 터미널 신문 가판대에 꽂아놨는데, 신문을 꽂으면 건장한 사복 남자들이 쫓아다니면서 다 회수했어요."

2007년 9월 1일 '삼성전자 역학조사'가 시행됐지만, 황 씨는 그마저 엉터리였다고 주장했다. 평상시 공장의 상태를 불시에 측정해야 하지만, 미리 날짜를 통보해 회사 측이 역학조사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것이다. 황 씨는 "칸막이 없이 일하고 환기가 잘 안됐다는 딸의 증언과 달리, 역학조사 당일 공장은 서늘할 정도로 환기가 잘됐고 칸막이가 다 설치돼 있었다"고 말했다.

역학조사가 끝난 날 황 씨는 삼성전자 관리자에게 "10억쯤 해드릴 테니까 다른 사회단체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도 말고, 아무한테도 (산재) 얘기를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황 씨는 돈을 받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돈으로 무마하려는 가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삼성은 돈 준다고 하면 제가 문제 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병에 걸렸다는 사람이 자꾸 나오잖아요. 내가 아는 것만 6명이었는데,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프레시안(최형락)

오랜 싸움 끝에 얻은 '작은 승리'

황 씨의 노력 끝에 2007년 11월 20일 노동·시민단체 20여 곳이 모여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 대책위원회(이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으로 개명)'가 만들어졌다. 제보자들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비슷하게 황 씨가 2007년 6월에 신청했던 산재는 약 2년이 지난 뒤인 2009년 5월에 결론이 났다. 불승인이었다.

2010년 1월 황상기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다가 백혈병 등 희귀병에 걸린 4명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를 인정해달라는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전자가 대형 로펌 변호사 6명을 동원해 '피고 보조 참가인'으로 소송에 관여했음에도, 2011년 6월 23일 재판부는 황유미 씨와 이숙영 씨 등 2명의 산재를 인정했다. 산재를 신청한 후 1심에서 이를 승인받기까지 무려 4년이 걸렸다.

황 씨의 승소에 힘입어 처음에 5명에 불과했던 '희귀병' 제보자도 급속도로 늘었다. '반올림'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자산업에 종사했다가 백혈병 등 희귀병에 걸렸다고 제보한 노동자와 유가족은 200여 명, 사망자는 80여 명에 이른다.

"그 이전에 삼성에서 거짓말을 했거든요. 삼성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5명이라고 했을 때 삼성은 부인하지 않았어요. 6명일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대책위를 꾸리니까 제보자가 2명 더 들어와서 8명이 됐고, 그러니까 삼성은 또 그만큼만 인정하는 거예요. 신고는 계속 들어오는데, 삼성전자는 새로운 제보자가 나오면 딱 그만큼만 인정했어요."

지난해 2월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공장 생산 라인에서 발암물질인 벤젠, 포름알데히드, 비소, 전리방사선 등이 검출됐다고 공식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4월과 12월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재생불량성빈혈과 유방암을 각각 산재로 인정했다. 황 씨는 1심 승소와 두 차례의 산재 승인을 "반올림 활동하면서 가장 큰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사람 생명보다 영업권·돈이 더 우선인가요?"

황 씨가 이 '작은 승리'를 거두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처음에 이 문제를 알리려고 하는데 기자와 국회의원이 다 외면할 때, 지인들도 '삼성에 대들어서 이길 수 없다'고 만류할 때 많이 외로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에서 받은 상처도 크다고 했다. 노동자가 죽어 기자회견을 하고, 1인 시위를 하고, 노제를 지낼 때마다 황 씨는 경비 직원들에게 여러 번 들려나갔다.

"이윤정 씨(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6년간 일한 뒤 뇌종양 판정을 받고 지난해 5월 사망) 장례식 날이었어요. 삼성 본관 앞에 노제를 지내러 갔는데, 삼성 경비가 통과를 못 하게 막는 거예요. 경비 수십 명이 발을 걸어서 저를 둘러메치는 바람에 난 몇 달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절뚝거렸어요. 자기네 회사에서 일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노제를 회사 앞에서 지내겠다는데, 그것마저 못하게 하는 삼성. 다른 피해자 가족들도 다 이런 상처를 안고 있거든요."

그는 "노동자를 위해 일해야 할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가 오히려, 노동자가 사업주에게 대들지 못하게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해줬다"며 정부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산재를 신청할 때도 유미가 기흥공장 3라인 1, 22, 24, 3베이에서 일했다고 진술하니까, 담당 공무원이 삼성이 보낸 서류를 보더니 '황유미 씨는 다른 데서 스티커만 붙이다가 3베이에서 석 달만 일했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거짓말이라고 했더니 '삼성에서 몇 사람 죽었다고 거짓으로 말할 것 같아요?' 하고 저한테 성질을 버럭 내는 거예요.

역학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예요. '반도체 공정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이 800-900종인데 확인된 건 10분의 1도 채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머지 화학물질이 어떤 약품인지는 삼성은 '영업 비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 하고, 정부는 그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어요. 영업 비밀이 건강권 위에 있으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첨단 기술도 있고, 영업 비밀도 있고, 돈도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이 하는 얘기는 사람 생명보다 영업권·돈이 더 우선이라는 거예요."

"대들어서 이길 수 없다"는 만류를 뿌리치고 글로벌 대기업 삼성에 6년간 맞서면서 황상기 씨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됐을까?

"저는 유미가 병나기 전에는 30년 넘게 속초에서 택시 운전만 하고 살았거든요. 그때도 노동자들이 정부에 당하기만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싸워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산재를 인정받으려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까 노동자가 억울한 점이 너무 많은 거예요. 노동자도 좀 살게 해야 사회도 안전해지고 나라도 편해지는데, 힘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은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해요."

ⓒ프레시안(최형락)

황 씨는 "산재보험은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한 사회 안전망"이라며 "역학조사는 불시에 시행하고, 기업은 화학물질을 공개하며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이 산재를 입증하도록 산재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지난 2월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발생한 불산 누출 사고를 예로 들며 "정부가 두둔하고 기업도 자꾸 감추니 사고가 반복된다"며 "노동자들이 병들고 죽기 전에 정부가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미한테 약속한 게 있거든요. 병에 걸린 원인을 밝히겠다고, 산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1심에서 산재라는 게 밝혀졌지만, 유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걸린 병도 원인을 밝혀야 합니다. 딸한테 내가 약속 일부는 지켰지만, 아직 100%는 못 지켜서 지킬 거고요.

직업병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자동차, 조선소, 반도체 공장 등 화학약품을 쓰는 곳이 많은데, 관리가 제대로 안 돼요. 암 같은 병에 걸리는 노동자가 너무 많은데, 이들이 제도권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산재 인정 기준을 완화해야 합니다. 곧 유미 추모제가 돌아오는데, 이 일을 계기로 다른 아픈 사람들이 안 나오게끔, 나오더라도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겁니다."


ⓒ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