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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르 케네그도”, 마주봄이 일으키는 관계적 혁명(백소영교수, 당당)

주방보조 2017. 5. 14. 04:40

“에제르 케네그도”, 마주봄이 일으키는 관계적 혁명

 

백소영 교수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기독교사회윤리학)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가장 바쁘게 현재로 소환되고 있는 인물이 ‘루터’이다. 칼뱅과 더불어 개신교 신앙에 있어 가장 권위 있는 양대 산맥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그의 말은 경전은 아니로되 ‘거의’ 신적 권위에 필적할 만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무엇보다 루터는, 거룩한 직업으로서의 성직 수행을 위해 독신서약을 종용하던 중세 가톨릭에 대항하여, 결혼을 신적 ‘소명’으로 해석하는 글들로 수많은 수녀들을 수녀원에서 탈출시킨 주인공이다. 그중 한 여인이었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 후 꾸려간 목사관 생활은 이후 대부분의 개신교 목회자들의 모범이 되었고, 그가 여자, 결혼, 가정에 ‘관하여’ 한 말들은 지금까지도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지며 신실한 여신도들에게 신앙적, 윤리적 규범이 되고 있다.

 

개신교 여성 이해와 가정, 결혼에 관한 담론은 ‘혁명적’이었나?

그랬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혁명적’이라고 여길 부분이 있었다. 여성을 ‘열등’의 기호로 여겼던 전통적 사고방식에 종언을 고한 ‘새로운’ 응시와 담론이 소위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목회자들에게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간 남자를 원죄로 몰아간 악마적 존재로 비난받거나(테르툴리아누스) 재생산을 위한 수동적 도구로 간주되던(아우구스티누스) 여성을 ‘무려’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창세기의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가 이때만큼 중요하게 강조된 적이 또 있었던가! 여자는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선”(존 코튼)이라고, 아내는 “방해물이 아니라 돕는 배필”(로버트 클리버)이라고, “당신만을 사랑하는 신실한 친구”요 “당신의 영혼에 힘을 주는 조력자”(리처드 백스터)라고, “하나님의 선물”(헨리 스미스)이라고 ‘격찬’했던 인물들은 모두 개신교 목회자들과 개혁 신앙을 옹호하는 이들이었다. 루터 역시 전직 수녀 출신인 아내 카타리나를 “박사님” “비텐베르그의 샛별”이라고 칭할 만큼 존중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혁명 아닌가? “똥자루,” “욕정덩어리,” “신앙적으로 열등한 존재” 등으로 불리던 중세적 여성 응시를 그친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이다.

하지만, 위의 짧은 인용들만 보더라도 이 ‘새로운’ 응시와 해석의 허점을 찾을 수 있다. “여성은 당신의 영혼에 힘을 주는 조력자”라니! 여전히 화자도 청자도 ‘남자’이다. 여성은 아직까지 ‘주체’로서 자기 스스로를 규정할 권위와 장이 주어져 있지 않은 거다. 그럼 이 개신교적 ‘남자’들은 갑자기 회개라도 하게 된 것일까? 어쩌자고 급작스레 여성을 이렇게 ‘낭만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나? 이들의 여성 응시와 근현대 핵가족 중심의 노동 분업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루터가 “수녀에서 아내로!”라는 소논문까지 쓰면서 적극적으로 ‘결혼을 소명’으로 외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독신 서약’의 여러 가지 파행적 폐단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소명으로서의 결혼’ 이해는 부상하는 제3계급(부르주아)의 ‘아내들’에게 전업주부의 역할에 신앙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만들었다. 남편들이 바깥일에 전념할 동안 집안을 책임지고 아이들을 근대 시민으로, 경건한 신자로 길러낼 파트너는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하고 존중을 받아야 했다.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위계적이라고?

하지만 개신교 ‘남성’ 지도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여성은 창조됨에 있어서는 남성과 평등하나 가정 안에서의 권력 위계에 있어서는 분명한 서열이 있다! 루터가 카타리나에게 가정 사역의 전권을 준 것으로 평가하지만, 그거야 순회강연이나 토론을 비롯하여 ‘공적 사명’이 많았던 그를 대신하여 가정 경제, 운영을 총괄하는 몫이 카타리나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아내가 차려주는 식탁에서 ‘신적 담론’을 논한 내용을 묶은 책 『탁상담화』에서 루터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남편을 따라가야지, 남편이 아내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 만일 ‘따르지 않겠어요.’ 하고 말한다면, 나는 당장 그녀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알아보겠습니다.”(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5, 427) 이런 여성 응시는 전 유럽으로, 미국으로, 그리고 한국에까지 개신교 선교의 동선(動線)을 따라 세계로 퍼져나갔다. “‘상응하는 돕는 자’로서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존경하며, 남편에게 맞추어 나간다면, 그런 아내는 ‘완전한 남자’를 만드는 ‘완전한 여자’가 될 것입니다.” 이는 20세기말 강남의 한 대형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진 설교다. 이에 수많은 경건한 여신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했다. 16~17세기의 여성 응시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는’ 신적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근현대 문명의 전개와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 막스 베버의 용어)을 가지고 견고해진 이 개신교적 여성 이해는, 성별보다는 전문성 위주로 승부하게 된 21세기 사회에서는 더 이상 설득력을 상실했다. 아, 됐어요! 많은 젊은 여성들이 교회를 떠났다. 신앙의 무게가 더 커서 교회 안에 남기로 한 여성들은 그야말로 ‘나를 접거나’ ‘미치도록 공·사 영역을 다 도맡다 과로사를 할 지경’이다.

 

“돕는 배필”, 기독교적 정체성과 시대적 시의성으로 새롭게 읽다!

무엇이 계시인가? 나는 계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두 가지 지표를 제안한다. 하나는 ‘초월성’이다. 그 내용이 시간과 공간, 문화적 제약을 초월하여 항상 해방적인 메시지인가? 두 번째는 ‘보편성’이다. 어느 특정인, 특정 집단에게만 기쁜 내용이 아니라 모두에게 복음인가? 이 두 기준으로 볼 때 창세기에 나오는 “돕는 배필(ezer kenegdo)”이라는 단어는 분명 하나님의 계시이다. 강한 가부장제의 정점에서 여자를 발밑이 아닌, 마주보는 자로 지음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그 도움(ezer)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그동안 ‘가부장적’ 남성들(성서저자들을 포함하여)의 편견과 오해가 위계적 존재론을 정당화했을 뿐이다.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창조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체인 인간! 그럼에도 인간의 창조성과 자유는 ‘유한할’ 진대, ‘아담’ 혼자서 이름 짓고(권위의 상징) 다스리다(radah)가는 온 세상이 ‘바벨탑’으로 넘칠 것이 아니겠나!

루터는 아내(여성)의 “도움”을 ‘재생산’과 ‘음욕방지’ 정도로 제한했으나 아내(여성)도 창조성과 자유를 지닌 한 인간일진대 그녀에게서 오는 ‘도움’은 제한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사실 그 도움이 항상 ‘낭만적’이란 보장도 없다. 한나의 노래, 마리아 찬가를 떠올려 보라. 존재의 위계를 만들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억압하는(남성들이 만들어놓은) 현 시스템을 향하여, “하나님의 90도 틀기”를 선포하는 여성들의 “도움”은 “유한한 자유”(틸리히의 인간 이해)인 남성들이 잘못된 사상과 제도를 고집할 때에 이를 질문하고 저항하고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대로 살도록 이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마주보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마주본 두 사람에게는 무엇이 보일까? 바로 ‘너’다. 내가 아니다. 너의 의미, 너의 꿈, 너의 요청이 보이는 거다. 나의 답을 너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진정한 마주봄을 모르는 자의 어리석은 행동이다. 인류 역사 5000년 동안 지속된 가부장제는 ‘거울로 자기만 본 사람들’에 의해 고안되고 유지되어 왔다.

루터, 칼뱅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여성으로서 남성 개혁가들이 ‘제한’했던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개혁신앙 수호자였던 마리 당티에르는, 나바르 공화국의 왕비 마르게리타에게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과 우리 여성들에게 계시해 주신 것들을 남자들보다 우리가 더 감추고 땅에 묻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 비록 모든 여성이 다 결점을 지니고 있지만, 남성이라고 해서 여기서 제외된 것은 없습니다. 어떤 여성도 예수를 파거나 배반한 적이 없고 … 이 땅에 그토록 많은 의식, 이단, 그리고 그릇된 교리를 지어내고 고안한 자들이 남성들이 아니라면 누구입니까? … 하나님이 몇몇 선한 여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에게 성서를 통해 거룩하고 선한 것을 드러내시는 데도, 진리를 훼방하는 자들로 인해 여성들이 그에 관해 서로를 향해 글로 쓰고, 말하고, 선포하는 것을 망설여야 합니까? 아, 그들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뻔뻔한 일이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우리가 숨기는 것 또한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키르시 스티예르나, 『여성과 종교개혁』, 266-268)

 

루터의 아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카타리나, 스트라스부르에서 살면서 루터보다 2년 앞서 전직 사제와 결혼했던 카타리나 쉬츠 젤은 폰 보라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목사 아내’의 삶을 보여주었다. 글을 쓰고 설교를 하고(무려 남편의 장례식에서까지) 남편과 평등한 목회를 수행했던 이 카타리나에 대해 개신교 지도자들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제발, 네 아내를 입 다물게 만들어라.” 카타리나의 남편 마태우스 젤은 살아생전 동료들로부터 늘 이런 소리를 듣고 지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아내를 ‘마주본’ 남편이다. 정말 개혁가요 혁명가였다. 창조된 바대로 아내의 독특한 재능과, 자신이 소명으로 여기는 영역의 활동을 인정하고 지지해준 파트너. 이 둘은 효율성을 위한 성별노동분업이 아닌, 진정으로 마주보며 서로를 건설해간 이상적인 짝이었다. 두 명의 카타리나. 하나는 이상화되고 다른 하나는 은폐되고 잊혀졌다. 마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처럼. 딱 거기까지! 남자들이 허용한 지점까지만 자유와 주체성을 발휘했던 여성은 이상화되고, 자신의 자유 영혼으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즐거운 일을 선택하고 불꽃같이 살아낸 여성은 비난받았다. 여전히, 개혁 신앙 안에서도 말이다.(참 신기하다. 교리에 있어서는 하나의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개혁신앙인들이 여성 이해에 있어서만은 참으로 한결같았다는 것이.)

그렇다면, 어떤 마주봄이 ‘나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되 ‘너의 의미’도 건설하는 ‘우리의 답’을 찾게 할까? 귀족이 통치하는 전통 사회(Aristocracy)는 이미 지났고, 관료들이 통치하는 근현대 사회(Bureaucracy)도 이미 후기 상태라고, 사회학자들은 진단한다. 이제 다가오는 사회는 ‘재능’이 통치하는 사회(meritocracy), 즉 각자의 전문성으로 서로를 돕고 건설하는 유동적, 유기적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데, ‘태초’부터 그 비전을 경전 안에 소중히 담고 있던 기독교가 ‘마주봄의 혁명’을 주저해서야 되겠는가? 진정한 마주봄의 혁명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결혼한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너와 내가 공동체로 함께 하겠다고 마주본 사이에서는 여지없이 생겨난다. 독신서약의 폐단 앞에서 ‘소명으로서의 결혼’이 주장되었듯이, 지금 하나의 제도로서의 결혼에 대해 사회적으로 다양한 질문과 대안의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마주봄’을 말하면서 인간관계를 제한하고 닫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성서적’이지도 않다.

 

그러니까 답을 내놓아라. 너는 ‘교수’인데, 우리보고 뭘 어떻게 하며 살라는 거냐? 루터처럼 칼뱅처럼 확실한 내용을 전달하라. 아니, 그럴 수 없다. 그건 나의 권한 밖이다. 진정한 마주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나도, 너도, 아직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답은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새롭다. 하나님이 고유하게 지으신 인간인 나, 그리고 너의 재능이 건설될 수 있도록 서로 도움(ezer)을 주기 위해 마주한 존재, 이는 비단 부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 능력이요 이 땅에 새로움을 가져올 가능성이다. 이 새로움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거다. 물론, 생명을 담은 ‘경전’인 성서의 정신과 메시지를 꼭 붙잡고서. 경전의 ‘경(經)’자는 세로로 고정된 실을 의미한다. 너와 내가 마주보고 ‘우리’의 답을 만들어나가자 했다고 윤리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경줄(날줄)로서의 성서를 꼭 잡을 일이다. 그래야 우리 삶의 위줄(씨줄)을 열심히 움직이며 아름다운 옷감을 자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제도’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함께 지어나가는 거다. 그러니 이제 새 옷을 짜자. 어느 한 생명도 배제되지 않고 뛰놀 수 있도록. 그 새 옷을 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았노라’ 하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