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목사의 자격-신성남집사의 글을 읽고(김영중, 당당)

주방보조 2017. 1. 22. 01:27
목사의 자격- 신성남집사의 글을 읽고
김영중  |  mtstwist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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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1월 22일 (일) 00:46:20 
최종편집 : 2017년 01월 22일 (일) 00:51:38 [조회수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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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문제제기 >

최근 교계뉴스와 지인들의 페이스북을 봤을 때 가장 큰 핫이슈 중 하나는 '유급 목사(설교자)직'에 대한 논쟁인 것 같습니다. 논쟁을 촉발시킨 신성남 집사의 논지를 제 나름대로 요약하면, '설교자(목사)가 직업화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와 기독교가 변질되기 시작하였으므로, 목사(설교자)는 자비량 사역의 구조로 변해야 한다.' 정도로 이해될 듯 싶습니다.

참고자료>
"예수는 돈 받고 설교하지 않았다" :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8009

"월급 주면 목회 누군 못하나" : http://m.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03


2. < 진리의 paradox > - 온전한 이해를 위한 프레임 제시

영국의 작가이자 신학자였던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역설은 머리를 땅에 박고 물구나무를 서서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소리치는 진리다." 이 말인 즉, 물구나무를 서면 다리 두 개가 먼저 보이겠지요. 이 두 다리가 흔들면서 나를 봐달라고 말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거꾸로', '두 다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는 한쪽만 봐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참석했던 한 강연에서 미국 Drew대학교 석좌교수인 세계적인 신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은 이 역설로 이루어지는 진리를 설명하며 예수님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을 기억합니다.

- '예수님은 평강의 왕(사 9:6)으로 오셨지만, 또한 우리에게 검을 주러 오신(마 10:34) 분입니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 '예수님은 유다지파의 사자(계 5:5)이면서 하나님의 어린 양(계 7:10)이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진리를 논할 때 한 문장으로 딱 떨어지는 정의보다는 역설 속에서 참다운 진리의 입체적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3. < Spirit versus Structure >

학부 시절, 교회사 교수님으로부터 소개받아서 '번역 한 번 해볼까?' 제안을 받았으나, 몇 장 하다 끝맺지 못한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제목이 <Spirit versus Structure> 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에 관한 책인데, '변질된 중세 교회의 Structure에 대항하였던 루터의 Spirit 이야기' 정도로 기억이 됩니다. 저는 위의 2번 글의 맥락에서 spirit과 structure를 이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가지가 우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입니다. 내용과 형식의 이야기이며, 물과 그릇의 이야기입니다. 루터 당시에는 spirit을 잃어버린 structure 가 문제였고,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화석화된 structure로부터 spirit을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아무리 강력한 spirit의 역사가 있다 한들, 그것을 안정적으로! 일관되게! 지속시켜주는 structure(혹은 system)를 갖추지 못하면, 그냥 한 철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 감리교인이라면, 존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의 spirit이 속회(class meeting)라는 structure를 통해 잘 담겨져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4. < 같은 말에 담긴 다양한 콤플렉스 >

대개 신성남 집사의 논조에 동의하는 분들은 개인의 히스토리 속에서 '목사'라고 불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직접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거나, 부정적인 인식과 사례들에 일관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부류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급진적으로 (유급) 목사직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고, 일부 설득력이 있기에 공론화의 자리에 등장할 수 있는 것이라 봅니다.

반대로 (유급) 목사직을 변호하는 분들은 현재 교회 및 목사제도의 틀 안에서 불안감 보다는 안정감을 느끼는 분들일 것입니다. 지금의 틀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 틀을 깨지 않아도 교회의 갱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분들이겠지요.

똑같은 '목사'라는 단어인데, 다른 연상, 다른 경험, 다른 평가에 의해 다른 정의(definition)와 다른 신학이 나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원래 그런 것입니다. 양극단에 서있는 이들의 논쟁을 보면, 이들의 워딩(wording) 속에 자신의 콤플렉스를 정당화하고 일반화하여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당연히) 보입니다.
(여기서 콤플렉스는 '열등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일반 정의로서 쉽게 말해 '우리 안에 엉켜있는 긍정적, 부정적인 무의식적 무언가'를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일례로, '목사의 급여'만 봐도 그렇지요. 목사직에 대해 부정적인 부류에서 '목사의 돈'은 탐욕의 대상이자 '부당하게 갈취 당한 교회의 물질적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반대 부류에게 있어서 '목사의 돈'은 '정당한 노동(목회활동)의 대가', '맹목적으로 강요당한 청빈으로 인해 늘 부족한 무언가'일 것입니다.


4-1. < 성서적 근거? >

이 논란에 뛰어드는 이들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서적 근거'인 것 같은데, 극단적으로 상대화 시켜서 (죄송하지만 좀 불경건하게) 말해보면, 성서적 근거라는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의 (감성적 인식까지도 포함한)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몇 가지 수단 중 하나일 것입니다. 교회 안의 일이라도 예외 없습니다. 존 웨슬리의 4대 원리(성서! 전통! 이성! 체험!) 만큼 성서적 근거'만'을 앞세워 내 말만 옳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치료약도 없습니다.


5. < 다른 종류의 교회 >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선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떠난 제자들처럼) 개인주의적인 선택과 결단으로 나가게 되고, 이후에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를 품는) 보편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품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래서 급진적인 종교적 개인주의(individualism)과 공동체적 합의를 불러오는 보편주의(universalism)의 기독교의 발전을 일으키는 두 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교회 공동체의 유형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1) 종파형(sect type), 2) 교회형(church type), 3) 신비주의(mysticism)으로 구분합니다.

[참고자료_ 박충구, '에른스트 트뢸치의 윤리사상' "기독교 윤리사 I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30.]


신성남 집사 부류의 분들은 '종파(섹트)형'의 교회를 이상적 사명으로 여기고 있고, 목사직을 옹호하는 부류의 분들은 '교회형'의 교회의 현실적 필요성을 져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섹트'로 갈수록 아마 공동체의 문턱이 높아질 것이고, '처치'로 갈수록 아마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을 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잃어갈 때 우리는 과감하게 섹트로 갈 수도 있어야 하고, 한 영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과감하게 처치로 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처치'더러 '섹트'가 되라 하거나, '섹트'더러 무조건 '처치'가 되라 하는 것은 그러므로 옳지 않습니다.
(*언급하지 않은 신비주의에겐 죄송하단 말씀을...쿨럭ㅋ)


6. < 각기 다른 은사 >

제가 이해한 바로는 신성남 집사와 그 뜻에 함께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목사', '설교자' 혹은 교회의 지도자는 '스스로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실력과 열정 정도는 기본옵션으로 갖춘 자'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의 녹을 먹고 사는) 저조차도 이렇게 되고 싶답니다. (멋있잖아요…^^;;) 그러나 이런 정의(definition)만을 채택한다면, 과연 몇 명이 이 범주 속에 남을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 급의 사역자, 풀만 먹고 살이 찐 다니엘 정도? 그리고 어쩌면 (급여 없이 목회할 수 있는 목사가 턱없이 부족하니) 연금 받는 교사, 공무원들이 목사로 강제소환되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능력이 출중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자급능력 만을 가지고 목회자 소명의 잣대로 들이댄다면, 돈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목회자, 교회지도자들의 다양한 은사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됨'은 어느 한 가지 코드만 가지고서 온전히 정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말 주변이 부족하지만, 인품이 훌륭하여 곁에 두고 의지하고픈 목사도 있고, 가끔 싸가지는 없어 뵈지만 명쾌한 설교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주는 목사도 있습니다. 목회직을 수행함에 있어 특별히 잘난 것 없이 크게 모나지 않은 목사가 교회를 안정되게 잘 이끌어갈 수도 있으며, 잘 까먹고 말도 좀 바뀌는 목사여도 교회를 큰 무리 없이 역동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7. <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 >

안타깝게 일찍 떠나신 저의 스승 안석모 교수님의 책 <이야기 목회 이미지 영성>을 보면, 소명을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내적 소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명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내적 확신, 주관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넌 소명이 없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할 수 있는 영역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외적 소명'은 내적 소명을 구체화할 수 있는 삶의 족적이자 외적 과정입니다. 쉽게 말해 신학교에 들어가고, 교단의 소정 과정을 이수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충족되어야 우리는 온전한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외적 소명이 없는 자는 자신의 목회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산에서?) 계시를 받았다!'라고 큰소리를 치는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내적 소명이 결여된 채 외적 과정만 마친 자는 그야말로 영혼 없는 빈껍데기 목회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8. < 이원론의 함정을 피해서 >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서, 그리고 앞으로 제시할 결론과 대안까지도 생각했을 때 꼭 피해야 할 것 한 가지는 바로 '이원론'(dualism)입니다. 성과 속을 나누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고, 유급은 악한 것, 자비량은 선한 것, 뭐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 벽을 허무셨고, 마르틴 루터가 그 벽을 깨부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개인의 영역과 공동체의 영역에서 깨부수어야 할 비본질적 구분의 벽을 마주합니다. 논쟁에 참여한 이들이 반대편의 주장을 폄하하는 데 힘쓸 것이 아니라, 상대방 주장의 진의를 이해하고 나의 주장을 설득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 논쟁을 의미 있게 마무리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9. < What for? 결국 어쩌자는 말인가? > - 결론

어쩔 수 없이 목사'인 저의 나름의 결론은 짧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목사의 밥그릇도 소중합니다. 목사를 굶기면 교회는 망합니다.
그런데 밥값 못하는 (제도권 & 비제도권) 목사, 너무 많이 먹는 목사가 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교회든 공교회든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이놈 아저씨'가 필요합니다.
그 '이놈 아저씨'는 개인의 내적 각성과 변화, 그리고 제도의 개혁과 일관된 집행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 '이놈 아저씨'가 결국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록]

< 대안 1. - 소명 검증 방식의 변화 >

저는 수능 점수가 돼서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9급 공무원/군무원 시험문제를 많이 맞춰서 군종목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3년간 매년 도합 5분 남짓의 형식적 인터뷰를 통과하여 감리교 정회원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경험한 '소명의 검증 제도'는 많은 보완이 필요합니다. 시험 문제를 일정 기준 이상 맞췄다고 자격을 갖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시라는 시험만 패스했다고 법을 휘두를 수 있는 자격을 주니,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 같은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계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이곳 미국에 와서 가까이서 전해 듣는 미국연합감리교회(UMC)의 목사안수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이 과정은 '소명'을 검증하기 위해 엄청난 여정을 겪어야 하며, 심층 인터뷰를 통해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내면화된 목회와 신학을 표현해내서 검증된 위원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목사후보자를 실제로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심층적인 인터뷰와 검증, 그리고 아닌 것 같을 땐 과감하게 걸러낼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대안 2. - 통전적 신학교육 체계의 구축 >

얼마 전 제가 출석하는 시카고예수사랑교회 조선형 목사님께로부터 전해 들은 지혜의 이야기를 옮겨 적어 놓습니다. '한국에서의 신학교 입학이 소명을 확증해야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미국에서의 신학교 입학은 소명을 검증해 가는 과정의 첫걸음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신학'대학'교가 되기 보다는 '신학'대학교가 되어야 한다. '대학'으로서의 일정한 객관적 기준을 충족하는 교육기관이 되기도 해야하겠지만, 관청이 요구하는 교육제도만 만족시켰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도제식 교육의 장점을 도입하는 등 더욱 좋은 스승 지근에서 학문 이상의 것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엑스맨에 나오는 '재비어 영재학교'처럼)

< 대안 3. - 공교회성의 강화 >

개교회의 비윤리적 전횡을 막기 위해서, 무허가교회(?)로 인한 질과 신뢰도 하락을 막기 위해서 공교회성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공교회성의 강화는 무조건 '교단이 꽉 틀어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단이 개교회로서의 목회적, 신학적, 윤리적, 재정적 최소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과 견제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이 잘 지켜지는 교회가 자율적으로 창발(創發)해가는 것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경험한 감리교단 속에서 저는 관료제의 폐해에 찌들어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많이 목격하였습니다. 지방, 연회 행사는 '해야 하니깐' 관습적으로 (영혼 없이) 반복되고 있고, 본부의 행정과 행사 중 일부는 '차라리 우리 교회가 도맡아서 하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솔직히 있습니다.

이를 위해 윗선, 그리고 인사 문제부터 생각해보면, 감독선거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부터 필요할 것입니다. 돈 쓰고, 골고루 돌아가면서 고작 2년씩 '해보는' 감리사, 감독의 권위를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_what for?

 

(필자는 미국 게렛신학교에서 공부중이라고 자신을 밝혔습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