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들이 신학생이던 아니던 구체적인 답을 못하는 군요 안타깝네요
보다가 하두 답답해서 제가 답 드리겠습니다.
개혁주의 교회란 중세 종교개혁 칼빈이 추구한 신학을 토대로 세워진 교회 입니다.
개혁주의 신학 청교도 신학 이런 노선입니다.
오늘날 장로교회 교단이 바로 개혁주의 교단들이긴 한데 물론 통합측이랑 기장측은 빼구요( 자유주의 혹은 복음주의 로 구분됩니다.신정통주의 칼바르트신학 추구하거나 민중신학 등 아주 진리가 변질된 교회라 무시하시구요 )
그외 고신 대신 백석 합동 합신등이 원래는 보수장로교단들인데 지금은 위에 언급한 통합이나 기장이나 밑에나열한 보수교단과 구분이 안갈 지경입니다. WCC문제로 분열된 개혁주의와 복음주의가 어느놈 할거 없이 변질되어 WCC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는 고신 대신 합동 백석 대신 조차도 실제 목회는 다원주의 목회를 하다보니 정상적인 정통 개혁주의 추구하는 교회가 이상하게 보이는것입니다.
먼저 다원주의가 무엇입니까? WCC 보면 현대는 이념 가치관 문화 철학 모든것이 다양하고 많아지면서 자기것만 옳다고 말하지말자! 니도 옳고 나도 옿고 주관적인게
종교다원주의 입니다. 그래서 승려도 무당도 기독교 용어만 쓰면 교회로 인정하고 실제로 신관도 그리스도의 신성 인성 공생애 등도 부인하면서 모인집단이 WCC 입니다. 근데 말이죠? 한국 보수교단들도 목회에서 다원주의를 막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보수 교회 가릴것 없이 은사주의에 물들면서 개혁주의 신학교 나오고도 자신은 은사주의 오순절 목회나 다원주의 목회를 합니다.
자 그럼 교회가 얼마나 다원주의 넘어가 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다원주의가 일어나게 된것은 계몽주의 바탕둔 휴머니즘과 오늘날을 지배하는 다윈의 진화론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쳐서 교회를 나온다 하는 교인들도 사실상 진화론과 휴머니즘이 일상생활이고 그렇게 교육을 받고 그리고 그속에서 살아 갑니다. 과학의 발달은 점점 그렇게 만들고 초월적인 진리 하나님의 천지 창조 홍해갈라짐 등등. 이런부분에 사람들이 성경이니깐 지식적 동의는 하는데 실제론 믿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들이 다원화된 사회에 살아 남으려다보니 대타협이 이루어집니다.
정통적인 방법을 버리고 다원화된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바자회나 지역주민을 위한 음악회
사X의교회는 교회를 공공재로 드리는등 다문화에 세상과 구분이 아닌 세상속에 하나가 되는 변질된 형태라 보시면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강단에 텔런트 유명스포츠인 영화배우가 올라오면 교회가 세속된줄 알라고 그분 떠나신지가 언젠데 오래전에 이같은것을 예측했는데 지금은 조금만 크면 연예인불러다가 쇼해서 사람 끌어 모읍니다.강단 쇼나하고 워쉽이나 연극등 이게 전부 다원화된 사회에 맞춘꼴입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초월적인 부분 천지 창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한 칭의 이런부분이 점점 약하게되며..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지만 사실은 초월적인것은 강단설교에서 점점 어려워집니다. 앉아 있는교인들의 사고 (다원화된 사고 진화론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맞춘거죠) 그러다보니 설교도 초월적인 부분은 감해서 전하고 가장 부담 없는 윤리도덕적인 부분만 중점으로 전하는 변질된 설교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정도만 들어도 각자가 소속된 교회가 어떤 길 걸어가는지 돌아보면 보일겁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철저한 청교도식 교리와 교회 공동체 질서를 가지고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대부분이 오순절로 변질되어 정통 개혁주의를 목회를 포기하고 있고 오늘날 처럼 배도의 시대는 목회자의 신학 노선에 따라 좌우되는 시대라 보니 개혁주의 찾기도 어렵스니다. 1500년대라면 개혁주의는 목회하기 쉬웠을겁니다. 오히려 순복음 같은 교회는 목회하기 더 힘들었을겁니다. 장로교단이던 순복음교단이든 은사주의로 평준화되어 버리니 정통적 개혁주의 노선을 가는 교회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독립개신교단 최낙재(전 총신대 교수) 목사님이 주측으로 세운교단으로 장로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직분은 영원한 직분이 아닌 임기제로 하며 직분 물러나면 다시 집사호칭에서 다시 형제 자매로 바꾸어 부릅니다. 직분을 일정기간 수행하다보면 영적으로 고갈된 부분 채우라고 다시 충만한 사람을 교대로 직분을 맡으며 헌신하는 원리라 보심 됩니다. 오늘날은 교회 봉사가 신앙인줄 착각하는데 교회 쓸데 없는데 일하면 그기에 시간 다 뺏기고 영적으로 고갈되게만들어 세상에 나가서 싸울수 없습니다.
개혁교회일수록 교회 일을 최소로 합니다. 성가대 따위는 없습니다. 그게 사역이라 생각하는 무식한 교인과 무식한 목회자가 많은데
종교개혁사를 보면 그저 루터가 칭의만 내세우며 종교개혁이 아닙니다. 로마카톨릭의 찬양을 성가대에 머물로 있을것을 성가대를 폐지 시키고 찬양을 회중에게 돌려 주었으며 오르간과 악기를 부수고 시편찬송으로 진리뿐 아니라 교회질서와 예배질서까지 개혁한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가 쯔빙글리 조차도 음악을 전공했지만 악기가 성도들 신앙에 유익하지 않다고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찬양이 악기에 취해있고 실질적인 신앙에는 무관심해서 그렇게 개혁한것입니다.
그이후 피아노가 예배당에 다시 들어오는데에 엄청난 찬반 논쟁이 있었습니다. 악기를 최소사용으로 절제하면서 드리는 형태가 지금은 별에별 악기 다 끼들어와 있어서 교인들이 가사에 집중보다 멜로디 그리고 악기에 취해서 찬양이라 생각하는데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중세시대 비춰보면 자신들이 어디있는지 돌아봐야할때입니다. 오늘날 천주교도 성가대를 전면에 배치 안하는데 개신교만 정면에다 성가대 배치해두고 ..강단에 집중이 아닌 성가대에 상당한 시선을 뺏겨 버리는 예배방해요소입니다.
또한 성도는 영적침체를 뭘로 충만 시키느냐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 부분이 사교모임이 아니라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논하면서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삶에서 싸워서 승리한걸 나누면서 공동체 지체들 통해서도 신앙의 동기부여를 받아 한주를 영적 전쟁을 치룰수 있는것입니다.
오늘날은 주차요원 차량 봉사 식당봉사 악기연주 성가대... 별에별 일이 많아서 영적충만을 채우는게 아니라 한주간 살면서 일하고 교회와서 노다가만 뛰다가 돌아간 교인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겠습니까?
저기위에 독립개신교단은 그래서 식당이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사에서 예배를 함께드리고 떡을때면서 은혜를 나눈 기록이 있습니다. 만찬의 개념이죠
밥하고 반찬하고 설거지하고 이런데 일 뺏기지 않으려면 각자 도시락을 사와서 공동체와 함께 나눈것도 좋다고 봅니다. 선포된 진리를 성도간 교제간 나눔으로서 전하는 설교가 재해석되어 다르게 받아들여진건 아닌지 나누면서 바로잡아주고 하면서 신앙의 일치화를 이루고 적용이 바른지도 나누면서 진리와 삶이 일치되게 나나타게 하는데 그목적이 있고 이것이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형태입니다. 오늘날 처럼 각종 프로그램으로 목회하는데 신앙일치도 필요 없는 시대입니다. 너는 계시파 또 너는 은사주의 너는 예언파..신비주의 교인들 각자 신앙이 다른데도 교회가 잘돌아가는것인 다원화된 사회에 맞춰서 교인 각자의 다문화에 젖은 철학 관념을 그냥 덮어둔채 프로그램으로 통일화 시켜서 목회하기 때문에 교회는 커지는데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해버려 조롱거리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통 노선을 버리고 잘못된 부흥관으로 나온 은사주의식로 변질되니..교회와 세상이 구분도 안가게 되었습니다.
대략 이정도만 설명해도 저위에 신학생님 답글보다 더 깊게 풀어서 설명해드렸습니다.
이렇게 통찰하는것도 개혁교회서 훈련된 교인이 아니면 이런 통찰력 없습니다.
그저 성가대나 즐기고 악기나 즐기고 봉사하는데만 즐기는 사람은 개혁교회 적응 못합니다.
왜냐 진리만 추구하다보니 흔히 오늘날 교회서 교육시키는 초딩적인 수준이 아니라..
개혁교회는 신학적으로 깊게 가르칩니다. 플라툰 철학 이데아사상의 구조 부터..해부해서 인간의 초등학문 수준까지도 파혜쳐보이고 성경신학뿐 아니라 기독교사상사 ,교회사,기독교강요, 변증학, 기독교세계관등
수준 높게 훈련시키고 개혁주의 교회 30명되는 작은교회도 수천권에서~1만권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석서도 있고 겅건서 인물사등 신학교리 부분 다양하게 교인들이 읽고 훈련할수 있는게 특징이고
독립개신교단 소속교회 4개 정도 지만 출판사까지 있는거 보면 잘드러난 부분입니다.
저같은 일반교인도 개인소장 도서가 1천권입니다. 주석서 부터 기독교강요 청교도신학 로이드 존스 목사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존번연 청교도 유명신학자 목회자 저서 국내 개혁주의 신학자 도서등등...
은사주의로 물든 교인은 개혁교회 적응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나 함부러 받지도 않습니다.
철저한 검증을 거쳐서 배우겠다 하는 사람만 공동체로 받지 심지어 교육시키고 신앙고백 일치하는지 시험쳐서 공동체일원으로 받아주고 부족하면 다시 재교육 시키는등 보통교회는 교회 오는날 등록교인되지만 개혁교회는 6개월 ~1년까지 걸릴수 있습니다. 4개월은 주일성수 지킴을 봅니다. 한번이라도 빠지면 첨부터 다시 그리고 신앙고백이나 그공동체가 정한 교육을 또받는데 한번이라도 빠지면 첨부터 다시 최종적으로 시험이나 테스트 받습니다. 이사람이 제대로 지식을 인식하고 고백하는지 검증해서 합격되야 공동체로 들어오는것이 개혁교회 특징입니다. 공동체 신앙 순결성을 철저히 지키려했는데 성장주의 빠진교회는 묻지마 닥치고 등록증 드리 내밀어됩니다.
오늘날 이단인 신천지가 엄격히 그렇게 하는데 그래서 이단이 정통같고 자칭 정통이 사이비같단 말이 나오는겁니다.
개혁교회에 신천지 추수꾼을 보내지도 않지만 만일 온다면 그곳이 바로 추수꾼 무덤이 됩니다.
우리집에 여호와의 증인 방문했다가 줄행랑 치며 도망칩니다.
몇장짜리 쪼가리 파수대인가 들고 오길래 복음 전도용 책 한권이 전도용 책자인 저를 보고 놀래고 들어왓으면 한번 토론 해보자 이자들 먼저 들고나오는게 성탄절은 예수탄생일 아니다! 이걸 가지고 항상 나오죠 그래 맞다! 정확히 로마카톨릭의 태양신 축제일이다. 종교개혁이후 아직 개혁이 안된부분이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성탄절을 지내지 않는다 먼저 전제 깔아버리니 당황합니다. 이들신학이란 자체가 없고 지네들 입맛에 교리를 짜집기 했기 때문에 교부들의 신학 권위를 가지고 들이내밀면 이사람들 교회사도 딸리고 신학도 딸려서 그냥 당황하고 도망갈려고 합니다. 그럼 내가 안놔주지 들어왔음 4시간동안 붙잡아주고 풀어서 설명해주었더니 사실 팩트앞에서 인정은 하기 싫고 반박은 못하겠고 어쩌겠어 나가고 싶은데 내가 안놔줌 듣겠다고 들어왔음 들어야지 듣겠다는 사람한테 전하는게 복음입니다. 그걸 대비해서 전할것을 항상 준비하고 훈련된 사람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로마카톨릭, 불교 , 이슬람, 진화론자, 사회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각종이단들 이런자들과 토론하고 변증할수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교인들을 훈련시켜야 하는것입니다.
변증은 신학자만 하는것이 아니라 교인들도 얼마든지 변증가로 살아야하고 그렇게 해온것이 칼빈주의 즉 개혁주의 교회 교인들이였습니다.
아직도 전하고 싶은건 많지만 간략히 드린겁니다.
[출처] 독립개신교회... 괜찮은건가요??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작성자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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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최낙재 목사님은 2010년 5월 9일 주일 예배를 모두 마치고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을 추모하는 모임이 5월 11일 오후 8시에 강변교회당에서 있었 습니다. 이 글은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후에 낭독된 추모의 글 가운데 하나 입니다.
최낙재 목사님께서 소천을 당하신 때에 우리는 함께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께서 그 종을 쓰셨던 것을 추모합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으신 최 목사님께서도 추모사 를 쓰신 적이 있는데, 고인의 이름을 부르거나 고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추모사의 새로운 장르를 열어 간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김홍전 박사 著 『주께서 쓰시는 사람』 139쪽에 "사람이 스스로 주님의 종이 될 만하다고 자인하는 일이 많이 있지만, 종이 될 만하려면 주께서 종 으로 임명하시고 인정하셔야 합니다"고 하였습니다.……다만, 주의 종으로 쓰셨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최종적인 판단은 주께서 하실 것이요 우리의 능 력을 넘는 것이므로 과장되기 쉬운 생각과 말을 절제하면서, 그러나 그의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은 확실한 은혜를 확인하면서, 주께서 그를 쓰 셔서 행하신 일들을 말하려 합니다. 고 김홍전 목사님의 추모사에서 최 목사님께서는 사도적인 교회가 타락하였을 때에 16세기의 개혁이 일어난 것, 한국 장로교회의 여러 약점들을 넘어서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려고 주님께서 고 김홍전 목사님을 사용하신 것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 셨습니다.
우리도 "과장되기 쉬운 생각과 말을 절제"하면서, 하나님께서 최 목사님을 쓰셔서 행하 신 일을 추억하려고 합니다. 방금 언급한 추모사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최 목사님 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주류의 신앙과 신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 시대에서 교회적으로 구현하신 분입니다. 온전한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이 나라에 독립개신교 회를 세워 주신 뜻을 분명히 알고 초대 감독 목사님을 통하여 베풀어 주신 주님의 교훈 을 교회의 실제 목회에서 열매로 드러내셨습니다. 최 목사님의 신실한 봉사의 결과로 계대(繼代)할 수 있는 다섯 목회자가 섰고, 금년에는 복음의 사역자를 양육할 신학교도 새로 시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시작한 새로운 일을, 고요 하고 안온한 성품의 이삭이 잘 이어받고 공고히 하여서,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에게 넘겨준 사실을 생각나게 하는 일평생입니다. 최 목사님께서는 독립개신교회 강변교회의 목사로서 역사를 통하여서 흐르는 주류의 신앙과 신학을 계승하고 전파하고 계대하는 일에 자신을 다 드리셨지만, 그 사역의 원천과 활력은 이 땅에 있는 어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높이 되신 그리스도께 사로 잡혀서 그 일들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말씀과 성신으로 주님의 교회를 친히 다스리는 사실을 늘 가르치시고, 교회의 생활이나 개인 생활에서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인 성신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린아이라도 능히 알 수 있도록 평이하게, 또한 다른 목사나 신학 교수라도 다시 생각할 정도로 깊이가 있게 가르쳐 주셨습 니다. 고희를 맞이한 최 목사님을 위하여서 작은 책을 출간하려고 하였을 때에 책 제목을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라』로 정해 주셨습니다. 평생의 신앙을 그 제목으로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라’는 말은 막연한 표어가 아니라 절절한 개인적인 신앙고 백입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르심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하게 되었고 나의 행동도 내가 하는 말에 맞춰서 하게 되었다. 생각을 돌이키고 돌이켰고 말을 돌이키고 돌이켰으며 행동을 돌이키고 돌이켰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최 목사님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매우 넓었 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사역하셨기 때문에 이 어두운 시대에서도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개인적인 격려를 하거나 신학교를 중심으로 결속 하는 일에도 마음을 기울이셨습니다. 거짓과 어둠 아래에 있는 북한 동포를 위하여서 기도하시고, 연변에 있는 지역의 선교를 위하여서도 기초를 놓는 일에도 쓰임을 받으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 말씀에 순종한 최 목사님은 또한 복음의 진리를 교묘 하게 흐리는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단정하지만 분명하게 비판하는 말을 아끼지 아 니하셨습니다. 그 대상이 추기경이든, 유명한 대학 교수이든, 큰 교회의 권력이 있는 목사이든 누구든지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불러모으시는 참된 통일을 흐리는 것에 대하여서 그 그릇됨을 예리하게 비판하신 것입 니다. 이 땅에 계실 때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신 주님께서 거짓 선생에 대하여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최 목사님께서 오직 주님에게만 사로잡혀서 연약한 몸으로는 감당하실 수 없는 일 들을 다 짊어지고 가셨고, 봉사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어떻게 관제(灌祭)과 같이 자신을 다 쏟아서 주님께 드리는가를 우리가 모두 생생하게 목도하였습니다 (딤후 4:6).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면서 살던 시므온이 아기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에 "이제 주의 종을 놓아주시는도다" 하고 찬송한 것처럼(눅 2:29), 주님께서는 이제 최목사님을 그 봉사에서 놓아주시고 주님을 뵈면서 쉬게 하십니다.
우리는 최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하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인 히브리서 13:8을 읽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하신 분의 믿음을 본받을 때에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 스도를 뵙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장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주님의 교회를 인도하실 것을 소망합니다.
아버지와 같은 목사님을 잃은 것이 우리에게 큰 슬픔이 있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을 뵈면서 소망도 품습니다. 최 목사님 추모사의 마지막 두 문단은 우리의 이러한 심정을 잘 표현합니다. 그것을 한 부분만 수정 인용하면서 추모의 글을 맺겠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귀한 선물을 받은 우리로서는 더욱 겸손한 마음 을 가지고 이런 귀한 선물을 주시기도 하시고 데려가시기도 하신 주님의 위대함과 그의 선하심과 능력과 지혜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그처럼 큰 선물을 이제는 빼앗겼다는 박탈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선하신 주께서는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기에 더 큰 선물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주의 약속을 생각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주의 일을 하신 박사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 신실하고 온유하신 아버님과 같은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 우리는 주께 감사하고 찬송하오며 우리 곁을 떠나신 주의 선물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더욱 큰 기대를 가지고 주를 기다리며 찬송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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