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김교신 / 자양고 2학년 9반
역시 오늘도 있었다. 교실 책상 속에 들어있는 정성이 묻어보이는 포장된 선물과 쪽지-내 마음을 어찌나 그렇게 잘 아는지 선물은 항상 초콜릿이나 젤리 종류였다. 도저히 출처를 알 수 없는 이것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오늘 특별히 학교에 일찍 왔건만, 이미 놓여있는 선물을 보니 약간 허탈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나에게 이런 선물을 줄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맛있게 먹어요.
쪽지에 적힌 동글거리고 모음이 짧은 글씨체를 봐서, 남자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그렇다고 짐작이 가는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모든 여자를 다 생각해봐도, 나에게 이런 것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이하얀이 아닐까’
문득 강한 설렘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웃음과 잔잔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기에.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은 그만두었다. 극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가 나에게 마음을 가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그런 것인지 자꾸 가슴이 안달을 낸다. 나는 곧 그 쪽지를 손에 꽉 쥐고 생각했다. 이 단서만으로 반드시 나의 그녀를 찾아내겠다고.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친한 친구 세명과 함께 학교를 돌아다녔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은 항상 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나는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내 친구들에게만 신나게 말을 걸었다.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너무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라 차마 말을 걸지 못하는 것이겠지.
나는 쪽지를 손에 꽉 쥐고, 혹시라도 단서가 나올까 기대하며 내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들에게 이 글씨체가 누구의 것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다들 미간을 좁히며 귀찮다는 듯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밝은 표정으로 내 친구들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런,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이토록 없었던가? 아니, 그저 기분 탓이겠지. 내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홀로 교실로 향했다.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앞으로 올 설렘을 생각하니 괜찮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나는 그 친한 친구 셋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혼자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뭐, 그다지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내 친구들이 단지 나와 다른 자리에 앉고 싶었던 것뿐이겠지. 친한 친구이기에,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는 또다시 정보수집에 나섰다. 이번엔 혼자라서 그런 것인지, 아까 나에게 인사를 해주던 여자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것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라기보단, 항상 그래왔기에 익숙한 것이리라.
그러다 우연히, 나는 복도 벽에 걸린 이하얀의 미술 작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옆에 써져있는 그림에 대한 그녀의 설명-나는 그것을 보고 무언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언젠가 이걸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불현듯 나의 손에 쥐어져있는 쪽지가 떠올라, 그것을 옆에 대며 비교했다. 놀랍게도, 글씨체가 동일했다. 누가 봐도 같은 사람이 쓴 것이라는 걸 알 정도로 말이다.
정처없던 나의 발걸음은 결국 이하얀이 있는 2학년 3반에 멈추었다. 점심시간 내내 그 주변을 서성이며, 그녀를 마주치게 된다면, 혹시 이 글씨체를 아냐고 물어볼 작정이었다. 나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나는 그 수치를 견디며 계속 기다렸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내 노력이 헛되지 않은 듯 그녀가 저 멀리서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쪽지를 손에 더욱 꽉 쥐고 당당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코앞까지 도달하자, 나를 피해서 가려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는 쪽지를 들이밀었다.
“혹시 이 글씨체를 아시나요?”
초면인 것은 둘째 치고,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온 몸에 전율이 흘러, 저절로 존대가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내가 내민 쪽지를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은 왜일까. 이내 그녀는 얼굴에 경악을 한껏 뒤집어 쓴 채로, 목소리를 떨며 중얼거렸다.
“이거, 내 글씨체인데...누가 봐도... 근데, 난 이런거 쓴 적 없어.”
그리고서는 다시 나에게 쪽지를 떠넘기듯 돌려주며 빠른 걸음으로 반에 들어갔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 그저 멍하니 그녀가 있었던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 종이 울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밤 11시에, 나는 학교 야자실에서 나와 출석부를 가지고 아무도 없는 나의 반 교실에 들어왔다. 수업 내내 머릿속을 정리한 끝에, 이하얀이 나에게 들키기 싫어서 연기를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실한 증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고 싶은 강한 욕구 때문일까, 나는 교실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어떻게 보면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다. 벌써 나는 내일 나의 책상 속에 선물을 두고 가는 이하얀의 모습을 볼 상상에 빠져, 그녀의 편의를 위해 뒷문도 열어둔 채 행복감에 젖은 표정으로 교실을 나왔다.
다음 날 나는 전 날처럼 학교에 일찍 나와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했다. 뒷문은 열린 채 그대로였다. 그리고 역시나 오늘도, 선물과 쪽지가 나의 책상 속에 들어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는 재빨리 카메라를 챙겼다. 아마 그녀에게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엄청난 시간을 촬영하느라 고생했는지, 카메라는 많이 뜨거웠다. 그렇든 말든, 어쨌든 성공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가슴 속에서 기쁨이 벅차올랐다. 이제 이것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후우”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확인을 시작했다. 빠르게 영상을 돌리다, 누군가가 교실에 나타난 것은 촬영 8시간째, 아침 7시 정각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하얀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순간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 분명 내가 교실에 들어온 것은 7시 30분 정도이건만, 왜 7시에 내가 교실에 있는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차마 그 영상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영상속의 나는, 내 책상에 선물과 쪽지를 넣고, 유유히 교실로 나갔다.
갑자기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미쳐야만 될 것 같았다. 이내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나의 전신을 뒤덮었고, 엄청난 비참함이 나를 터질 것 같게 만들었다. 나는 카메라를 집어 던지며, 이 모든 일을 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역시 오늘도 있었다.
정성이 가득 담겨있는 선물과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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