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삭제될지 모르는 글

두날개...의 문제점(무물펌)

주방보조 2015. 2. 13. 08:38

내가 경험한 두 날개의 문제점

 

1. 다락방의 교리 차용

두날개는 가장 많은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다락방의 교리를 차용하고 있다. 기도 응답권, 사단 결박권, 천사 동원권 등은 다락방의 독특한 교리로서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두날개

다락방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 (1:12)

1) 성령 내주 (고전3:16)

2) 성령과 동행하는 축복 (14:16-17)

2) 성령 인도 (14:16-17, 1:8)

3) 기도응답의 축복(16:24)

3) 기도 응답권 (16:24)

4)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축복 (16:18)

4) 사단 결박권 (12:28-29)

5) 천사가 돕는 축복 (1:14)

5) 천사 동원권 (8:3-5, 103:20-22)

6) 천국시민이 되는 축복 (3:20)

6) 천국 시민권 (3:20, 16:13-20)

7) 천국대사가 되는 축복 (1:28)

 

8) 하나님의 교회가 되는 축복 (16:18-20)

 

9) 아브라함의 축복 (3:14-15)

 

10) 세계정복의 축복(28:18-20)

7) 세계 정복권 (28:18-20)

기도 응답권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내용이다. 기도 응답의 주체가 하나님인데 반드시 응답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천사 동원권이라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돕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사를 우리 종처럼 부릴 수 있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는데 이것은 맞지 않다. 천사는 하나님의 종이며 우리는 천사를 부릴 수 없다. 사단 결박권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사상이 나타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사단 결박권은 하나님 즉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계시고, 그 예수님께서 네게 명령하시니 사단이 결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것이라는 이단적인 사상이 그 뿌리에 담겨있음을 보게 된다.

 

2. 가계 저주론

가계 저주론은 크게 세가지 부분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조상의 죄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가계를 통하여 후손에서 계속 유전된다.

둘째, 그 저주는 질병과 재앙, 가난, 사고등을 포함한다

셋째,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가계의 저주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이 저주를 끊어내지 못한다고 하는 이단적인 사상이다. 또한 구약의 말씀을 이용하여 성경을 곡해한 것이다. 첫 번째 잘못된 주장의 근거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신명기 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얼핏보면 맞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31:29-30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성경은 자신의 저주는 자신이 지은 죄에서 말미암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내용은 틀린 것이다.

두 번째 내용은 재앙, 가난, 사고 등을 저주의 대표적인 예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재앙, 가난, 사고 등을 당한 사람은 저주를 받았다는 내용으로 해석이 가능한 내용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3장의 예수님의 해석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망루에 깔려죽은 사람도, 요한복음 9장의 소경된 사람도 특별히 죄가 많아서 당한 저주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가계 저주론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내용인 것이다.

 

가계 저주론은 그 죄의 치유 방법에 있어서도 비성경적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마귀가 주는 것이므로, 마귀를 향해 떠나가라고 명령 기도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뿌린다고 하며 내 죄는 해방되었다.’고 선포하여 저주를 없앤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사도 운동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 나아가서 영적 전쟁과 같은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 가계 저주론은 우리 안의 죄의 저주가 쓴 뿌리가 되어 견고한 진으로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이 또한 잘못이다. 성경 속의 쓴 뿌리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우상 숭배자나 배교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개인적인 죄와는 상관 없는 용어이다. 이것을 개인적인 상처로 쓴다 하더라도, 이것이 견고한 진이 되어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은 심리학적인 해석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성경적인 해석은 아니다. 우리 안의 모든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사랑으로 치유된다. 선포나 대적이 아니다.

 

3. 중보기도 학교

두날개에서 운영하는 중보기도 학교는 신사도 운동의 영적 전쟁 내용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을 다스리는 사단의 영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의 모든 문제 가운데도 사단의 영이 있으며, 심지어 예수 믿는 성도 가운데도 게으름의 영, 거짓말의 영 등 사단의 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극단적인 이원론으로 성경적이지 못하다. 성경은 믿지않는 이방의 왕 고레스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고 말하고 있으며,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우리 가운데 있는 게으름과 거짓말을 향해서는 성도들에게 버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것을 향해 물러가라.’고 대적 기도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실체에게 명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을 사단에게 뒤집어씌워 면책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또한 가난과 고통, 병드는 것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인데, 이것을 향해 물러가라고 선포하고 대적한다면 누구에게 대적하는 것이 되는가?

당장은 중보기도 학교처럼 이 세상의 영들을 향해 호령하며 물러가라.’, ‘병은 나았다.’고 대적하며 선포하는 것이 영권이 있어 보이는 듯 하지만,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내용과도 다른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중보기도 학교에서는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중보자로 우리들이 부름받았다고 주장한다. 구약의 모세와 같이 제사장과 같이 민족의 죄를 대신 지고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명백한 이단 사상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완전하고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중보기도 학교는 직통 계시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 떠오르는 것을 중보기도자의 은사로 여기고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며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목사님께 무조건적인 순종

내가 경험한 두 날개 시스템은 존 비비어의 손종이란 책을 보조교재로 삼으며 혹시 잘못된 목회자라 할지라도 순종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사도 운동가 존 비비어의 잘못된 순종 사상을 들여와 장로교의 근본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장로교는 천주교의 교황 절대적인 사상의 위험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아닌, 여러 장로를 세워 교회의 건강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두 날개는 이러한 장로의 권위를 무시하며, 가장 맛없는 회가 당회라는 썰렁한 농담 속에 실제적인 당회를 없이하는 시스템이다. 목회자가 성경 안에 바로 서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두날개를 하는 교회는 대부분 신비주의와 신사도적인 사상이 깊게 들어와 있기 때문에 목회자의 잘못된 의도로 교회가 나아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하는 성도의 삶에서 벗어나, 목회자에게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대부분의 이단들이 강조하는 바이다.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교회는 목회자는 편안하게 목회할 수 있겠으나,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힘들어지게 되며, 장로교의 개혁적인 모습도 사라지게 만든다. 바른 신학 안에서 목회자의 방향성을 성도가 따라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둔갑시키는 것을 분별하는 신앙의 자세 또한 성도의 생명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5. 신비주의적 현상

두날개는 전인적 치유 수양회를 양육반 과정에서 한다. 이 수양회의 하이라이트 마지막 찬양과 기도 시간에는 안수와 쓰러짐, 방언과 성령춤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나는 여러 교회가 연합하여 진행하는 전인적 치유 수양회를 수년 이상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한 목사님은 목부분을 잡고 뒤로 밀었다. 한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밀었다. 넘어졌다 일어난 분들을 또 밀어 넘어뜨리고. 어떤 분은 얌전하게 뒤를 확인하며 앉았다가 누우시기도 한다. 어떤 분은 빵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 분들을 위해 뒤에서 여전도사님 두 분이 받쳐준다. 어떤 분은 뒤로 넘어져 몸은 부르르 떤다. 이것은 신사도 운동의 임파테이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날개 세미나에서 목회자에게 안수 받은 목회자들이 목회지로 돌아가서 성도들에게 안수를 하게 될 때, 김성곤 목사에게 있는 은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되어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는 발언은 신사도 운동의 핵심 사상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와중에 괴성을 지르거나 이성을 완전히 잃은 분은 없었다. 강단에서 이제 일어나시고 들어가라고 말하면 툭툭 털고 일어나 들어가셨다. 물론 그 중에 눈물을 흘리며 그러한 집회 가운데 은혜 받았다고 하는 분들은 매우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빈야드와 같은 신비주의적 요소가 매우 강하다. 특별히 쓰러지고 부르르 떨고 이상한 춤을 추는 등의 모습은 빈야드의 잘못된 현상 집회에서 나타나는 요소이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적이 없다.

목사님들은 이런 현상을 내 안의 죄성이 성령으로 태워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이 이런 식으로 죄를 태우는 장면을 목격할 수 없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인간의 이성이 마비되는 경우는 없다. 오직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죄를 보며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뒤로 넘어가며 자신의 몸을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으로 해석되는 부분이 아니다. 모든 현상은 성경 안에서 해석되어야 건강한 것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너무나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과정 속에서 그 내용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엇을 말하는가?’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이다.

성공하고 전도하고 수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있으나,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내용이 없다면 문제가 있다. 목사님께 순종과 거기에 따르는 희생은 말하지만, 예수 믿음으로 고난을 당하고 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 나아가서 번식하지 못하면 암세포이고 잘라내야 한다는 것은...

또한 두날개 시스템의 열린모임은 회개 없는 영접을 유도한다. 이렇게 믿어서 뭐가뭐가 잘되었으니 예수 믿으라는 내용이다. 물론 그런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경은 회개하고 믿으라고 외치고 있으니 빼서는 안될 것이다.

 

7. 오직 전도

두날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전도할 것을 외치고 있다. 물론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전도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도와 함께 가야할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 우리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즉 성화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이 없이 오직 전도만 외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입만 살은 믿음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성화이고 이 가운데 전도가 있는 것이지, 오직 전도가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니다.

 

-이인규,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카페 내용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