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개념]헤아리다에 대하여(8)
주방보조
2004. 2. 8. 00:45
<제83호> [개념] "헤아리다"에 대하여 (8) | 2002년 01월 17일 |
"헤아리다"는 "혜다"와 "가리다"의 합성어? 지금까지 우리는 국어사전들이 "헤아리다"의 두 번째 뜻으로 제시한 "세다"의 어원과 그 용례를 살펴 보았습니다. 고대 문헌이나 중세 문헌에서는 "세다"와 "헤아리다"는 모두 "혜다"에서 연유되었음을 보았고, 같은 낱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그 뜻이 매우 가까운 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혜다의 두 가지 의미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서 오늘날의 "세다"와 "헤아리다"로 정착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헤아리다"는 말입니다. 물론 "헤아리다"는 "혜다"의 파생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되었는지가 확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혜"가 "헤"로 된 것은 단모음화의 경우로 짐작하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리"라는 말이 어간으로 첨가된 것은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가지 실마리를 "혬가림"이라는 옛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국어 사전에서는 "헤아림, 분별, 사려"로 풀려 있습니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에도 "일모수죽(日暮脩竹)에 혬가림도 하도할샤"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혬가림"은 그냥 보통의 "생각"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아주 깊은 생각"이나 "사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 말이 "혜다"와 "가리다"의 두 말의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본 바대로 "혜다"는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가리다"는 "여럿 중에서 골라 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혬가림"이란 "여러가지로 생각해서 그중에서 골라냄"이라는 뜻을 가졌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문법에서는 두 개의 동사를 합칠 때에 보통 먼저 나오는 동사의 어간만을 따고 그것을 뒤에 나오는 동사에 덧붙이는 형태를 취합니다. 그렇다면 "혜다"와 "가리다"를 합성어로 만들 경우 그 원래적인 형태는 "혜가리다"가 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든지 "헤아리다"로 전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이런 변형이 가능하려면 "혜가리다"에서 기역(ㄱ)이 탈락해서 "혜아리다"로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국어 사전에서는 한가지 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阪 °?"라는 단어입니다. 두시언해 중간본에는 "?阪 °? 모 어리여"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뜻은 "한결같이"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때로 "?阪 °?"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두시언해 초간본에 보면 "머리 돌아 라오니 ?阪 °? 망망(茫茫)?宕뎬?"는 구절이 나옵니다. 뜻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입니다. 초간본에 "?阪 °?"로 쓰인 반면 중간본에서 "?阪 °?"로 쓰인 것을 보면 이 두 가지 형태가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같은 기역탈락 현상이 "혜가리다"에도 일어나서 "혜아리다"로 변하고, 결국 오늘날의 "헤아리다"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면, "헤아리다"의 뜻이 "혜다"와 "가리다"의 합성어로서 앞에서 본 한자어 분간(分揀)과 같아지게 됩니다. 만일 "헤아리다"가 "혜가리다"에서 변형되어온 말이라면, 지금까지 살펴본 바, 오늘날의 "헤아리다"는 "기준과 목표를 가지고 사물의 모든 면을 샅샅이 깊이 생각하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는 또 하나의 확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설(施設)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 광범위한 문헌 조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모두 어원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요즘의 어법과는 거리가 많이 납니다. 심지어는 표준적인 낱말 뜻을 제시하는 사전에서도 "헤아리다"는 "세다"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헤아리다"가 수백년 동안 거쳐온 의미 발달의 과정을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윤동주 시인이 "헤다"라는 말을 "세다"의 뜻으로 되살린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잊혀져 가는 "세다"의 옛말 형태를 되살려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조차도 단 한번도 "헤아리다"를 "세다"의 뜻으로 쓴 적이 없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헤다"는 "세다"일 수 있습니다만, "헤아리다"는 결코 "세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깊이 생각하여 가리어 내다"는 뜻입니다. 성경 번역자들 조차도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영어의 "세다(count, number)"를 "헤아리다"로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단 한번 뿐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헤아리다"와 "세다"의 의미분화가 무너진 것이 1960년대 이후 현대나 윤동주 시인 시대의 일제시대가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된 일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헤아리다"가 "세다"의 뜻으로 쓰인 것은 수백번 이상의 용례중에서 단 한번에 불과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 의미 혼란의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이런 "헤아리다"의 의미 혼란은 주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반부에 주로 일어난 일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한국인들이 제 나라말을 가장 가꾸지 못하던 시기에 일어났던 일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언의(言意)의 엔트로피를 떠올리게 합니다. 말은 신경써서 가꾸지 않으면 혼란도가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혼란이 일상화되면 그것을 바로잡기란 대단히 힘듭니다. 더구나 "헤아리다"와 같은 인식동사의 의미에 혼란이 생기거나 그 의미가 천박하게 변해 버리면 곧바로 사람들의 생각 수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점을 우리는 널리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 둡니다. "헤아리다"의 어원적 의미, 그리고 적어도 19세기 말엽까지의 용례적 의미는 "깊이 생각하여 가리어 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