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본받는 자 (엡5:1-2) - 손봉호
하나님을 본받는 자 (엡5:1-2) - 손봉호
양승훈·2018년 11월 5일 월요일
**** 지난 10월 28일 주일, 손봉호 박사님이 쥬빌리채플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메모 형태의 원고를 건네받았는데 내용이 좋아서 손 박사님의 허락을 받은 후 다시 정리했습니다. ****
한국 기독교 역사가 길지 않지만 훌륭한 분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많다. 예를 들면 손양원, 장기려, 김용기, 신용호, 안창호, 안재홍 기념사업회 등이다. 비록 이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발자취는 우리나라의 큰 자원이다. 그들을 기념하고 그들의 발자취를 후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후세가 긍지를 느끼고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런 분들을 본받고 사는가? 사실 장기려 박사만 해도 족탈불급(足脫不及), 즉 맨발로 달려가도 쫓아가지 못할 분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장기려 박사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요구이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우선 우리가 그렇게 할 자격이 있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짐승에게는 요구할 수 없다. 사람들 중에도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자녀들에게만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살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가장 고상한 가치를 위하여 살 의무가 있다. 우리 자신을 무시할 권리가 없고, 두 번째로 가치 있는 삶을 택할 권리도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천하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객관적으로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무한하게 고귀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랑의 신비요, 기적이요, 매직이다.
이는 우리 자녀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녀를 천하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듯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 우리는 대중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그저 여러 사람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미미한 존재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도매금으로 무리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각각 따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5). 이것은 마치 자녀가 여러 명이라 해서 그 중 하나쯤은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가 그것을 잘 가르쳐 준다(눅15:4-7).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 가운데도 한 마리가 없어지면 목자는 그 양을 찾아 나선다.
1928년생인 김경래 장로에게는 6남 2녀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김 장로님은 늘 ‘나는 8남매 밖에 없다’고 말했다. 언젠가 아들밖에 없었던 형제들 중에서 김 장로님의 딸 하나를 양녀로 달라고 했다. 그런데 누구를 줄까 생각하면서 맏딸부터 막내까지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도대체 줄 딸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고사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가리켜 프랑스의 신학자 토크빌(A. de Tocqueville)은 ”하나님의 사랑은 개별적“이라고 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성경은 모든 가치 가운데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요일4:8,16)이라고 했다. 좀 특이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능력도, 지혜도, 인내도, 자비도 다 갖고 계시만 어디서도 “하나님은 능력”, “하나님은 지혜” 같은 표현은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사랑”이란 말만 있을까? 그것은 사랑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대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는 3위1체도 사랑으로 설명한다. 즉 사랑을 위해서는 성부-성자-성령의 3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오해한다. 가장 많은 오해는 사랑을 감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보통의 사랑, 특히 남녀 간의 사랑에는 감정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감정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워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은 다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많이 가르쳤던 에로스(eros)와 다른 아가페(agape) 사랑이다.
아가페란 단어는 사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가장 뚜렷하게 많이 사용된 경우는 BC 130년경에 완성된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판 LXX 혹은 70인역 (72명의 학자가 참여하였다는 전설 때문. 몇몇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학자들(Alexandrian Jewish scholars)에 의하여 이루어짐) 때문이다. 거기서 히브리어 ahab(love)를 번역할 때 적합한 희랍어가 없어서 아가페란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 단어를 이용했다. 아가페를 사랑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은 호머(Homer)의 작품에도 두 번밖에 안 된다고 한다. 혹자는 발음이 히브리어의 ahab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 단어를 택했다 할 정도로 그들은 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던 에로스와 필리아(philia)로는 성경이 의미하는 사랑을 올바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 그것은 동시에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매우 독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아가페는 에로스와 어떻게 다른가? 에로스는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유가 있는 사랑이다. 즉 에로스는 “무엇 때문에”(Love because of)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가페는 이유가 없는 사랑, 즉 “무엇임에도 불구하고”((love in spite of)의 사랑이다. 아가페는 능동적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마5:44)리고 말씀하셨다.
아가페 개념에 대해서 영국 신약학자 도드(C.H. Dodd)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감정이나 애정이 우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능동적인 의지의 결단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명령될 수 없는데 비해서 사랑은 명령될 수 있다” It (agape) is not primarily an emotion or an affection; it is primarily an active determination of the will. That is why it can be commanded, as feelings cannot." 슬픔은 감정이기 때문에 명령할 수 없지만 사랑은 의지적 결단이기 때문에 명령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특징은 기독교 구원의 핵심이다. 만약 하나님이 에로스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즉 하나님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사랑했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도 구원 받을 정도로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수동적이고, 의지는 능동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다. 즉 우리가 사랑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로마서 5장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라고 했다. 이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또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였고, 죄인이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래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같은 사랑을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에게 베풀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엡 5:1)고 요구하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2)고 말한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고 말한다. 바울이니까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지만 나는 바울 사도도 본받을 수 없다. 장기려 박사도 본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사랑이므로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사랑의 삶이 되면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 된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고 하셨다. 성경에서 제자란 단순히 스승의 지식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을 본받는 사람을 말한다.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알리라”는 “되리라”와 다르다.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는 예수님을 “본받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본받는 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신 분이고, 예수님은 가장 고상한 분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사랑은 의지이며, 감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가페 사랑은 차디찬 계산을 포함한다. 세상에서는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올까를 계산한다. 하지만 사랑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올까를 계산한다. 궁극적으로 사랑은 하나님 나라와 이웃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이성과 감정, 무엇보다도 올바르고 선한 의지가 개입되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순종하기로 결정. 하나님을 감정적으로 사랑하기는 어려움.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의 백성으로 남기로 작정하는 것이 그 기본. 이웃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했으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서로 사랑했다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서로, 서로에 대해서 좀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 경쟁만 하고 있고, 경쟁률이 너무 높다. 그렇다면 어떻게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경제학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수입을 얻는 것인데 사랑에도 경제학이 있다. 사랑의 경제학은 내가 베푸는 사랑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의 이익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경제학인데 이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다.
첫째,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도록 많이 생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해야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한다(눅20:34-35, 수고). 또한 우리는 능력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많은 지식, 많은 지혜, 많은 재산, 풍부한 창조력, 훌륭한 인격, 너그러운 마음 등등.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인내력도 큰 재산이다. 심지어 건강조차도 큰 재산이다. 가능한 많이 개발하고 생산하고, 축적해야 한다. 독일어의 Arbeit는 독일 사회학자 베버(Max Weber)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Protestant Ethics)의 핵심이다.
둘째, 개발한 능력을 우리 자신을 위하여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즉 우리는 절제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도,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자기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자기의 이상, 욕심, 감정, 명예 만족을 우선시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이나 공무원은 자신보다는 국민들을, 교수는 자기의 위신이나 명예보다는 학생의 이익을, 교인은 자기 감정보다 다른 성도의 이익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를 죽이고 희생할 수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신 것은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개신교는 절제의 종교이다.
셋째, 사랑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효용가치가 높다. 캐나다에서는 다른 사람을 1000불 어치 도와준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프리카나 어려운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도와주면 큰 열매가 나타난다. 한 달에 1,000만원을 버는 부자들에게 100만원을 도와준다고 해도 만원어치의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지만 하루에 만원을 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큰 효과가 있다. 그래서 장애인 사역이나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가난한자, 멸시 받는 자들을 사랑하신 이유도 그렇다. 예수님은 자기를 초대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네가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눅14:12);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자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눅14:13). 이것이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 즉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