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동네북 목사들은 지금 수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돌을 맞고, 이리 가도 저리 가도 매를 맞는다. 오뉴월에 개 패듯 하는 매를 맞는다면 너무 거칠고 저속한 표현이 되겠지만, 마치 동네북이라도 치듯 이 사람도 두들겨 대고 저 사람도 매질을 한다. 그런데 이는 어느 누구도 아닌 목사 자신들의 탓이다. 목사라면 마치 비리의 온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물질을 탐하는 경향이 심하다 해서 ‘목사’를 ‘먹사’라고 듣기도 민망한 닉네임으로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 같은 현상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데에 우리 기독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나 목사들 모두가 비리에 발을 담근 것도 아니고 물질에 욕심을 부리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 보니 그들 중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농어촌의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은 그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온 헌금이래야 어디에 찍어다 붙여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빈약하여 사례비조차도 제대로 받는다는 게 꿈같은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그런 목사님들도 포함한 모든 교역자님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하고 싶다. “그럼, 목사님은 기복신앙을 가르친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라고. 필자는 이 땅의 교역자들 가운데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있다 해도 극히 소수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러니까 구복신앙이라고도 하는 기복신앙은 목사들이 저지르고 있는 그 숫한 비리와 탐욕에 뒤지지 않는 죄악이다. 왜야 하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복신앙, 그것은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와 정반대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사이비요 이단이다. 여기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단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일보다 더 큰 죄악이 얼마나 있겠는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보다 더 큰 죄악을 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교역자라면 비난을 받고 욕을 먹어도 싼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목사가 되었다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나는 저들과 다를까. 다르다면 얼마나 다를까.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교인들이나 세인들로부터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고 욕도 먹지 않을 만큼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역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을까. 이런 말을 하면, 그럼 목사들의 불신앙적 행태를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교인들의 입을 막으려는 그런 수작 작작하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자는 것이다. 아무리 심각한 문제라 해도 역지사지해 봄으로 많이 해결될 수 있다. 그리함으로 문제 자체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목사가 됐다 해도 지금의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죄악들을 그들과 똑 같이 저지를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같은 비난을 해도 그 비난은 비난으로 끝나지 않고 문제해결의 힘을 갖게 된다. 나라를 망국(亡國)으로 내몰고 있는 지역감정을 놓고 생각해 보자. 양 지역에서 서로 상대를 가리켜 애초부터 상종 못할 종자로 태어난 것들이라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아니다. 우리는 ‘동’이나 ‘서’나 같은 배달이니 크게 다를 리 없다. 환경의 차이로 약간의 경향적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유전자조차도 다른 것은 아니다. 동의 사람이 애초부터 서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일찍이 서로 가서 살았다면, 그리고 서의 사람이 동에서 태어나거나 동으로 가서 살았다면 그곳 사람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목사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라고 별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나와 똑 같은 사람인데, 나는 목사 아닌 교인이 되고, 그들은 일반교인 아닌 목사가 된 것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 그들을 향해 비난이나 욕을 하기 전에 역지사지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환언하면 크리스천으로서의 나 자신을 돌아보자는 말이다. 그리하지 않고 비난이 됐건 욕이 됐건 내뱉기만 한다면 내 입만 더러워지고 내 인격만 손상될 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실 자신도 목사이면서 필자만큼 목사들을 향해 비난을 많이 하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필자가 목사가 된 이유에는 목사를 비난하기 위한 것도 들어 있으니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목사들이 바뀌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내쫓은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그들을 보고도 침묵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일반교인이 목사를 비난하면 비난을 위한 비난으로 들리기 쉬우나, 목사가 목사를 비난하면 누워서 침 뱉기가 되겠지만, 아니 그러니 더욱 뭔가의 이유가 있어서, 또는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크기에 필자가 목사들의 비난에 인색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목사시취논문 심사위원을 서로 하려는 이유 필자가 목사가 된 이유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서선교를 해 보고 싶어서이다. 문서선교라 해도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믿음의 글을 써 보고 싶어서이다. 글이란 참으로 매력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하루에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 같은 경우를 제한다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글을 통해서라면 몇 백, 몇 천 명도 만날 수 있고, 그 이상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다익선식의 만나는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은 아니다. 글을 쓰다 보면 독자들의 입맛에 맞추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한다면 설교자가 교인들의 입맛에 맞춰 ‘헌금을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설교자는 ‘예수를 믿어도 가난할 수도 있고, 병약할 수도 있으며,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졸지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설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게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은혜일 수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글 쓰는 사람도 인기를 끌지 못해 읽어 주는 사람이 적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목사들에 대한 비난의 글을 쓰는 걸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 사명감을 가지고 집필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글을 읽어 주는 독자가 다른 글에 비해 많은 편이다. 그런 것이 <당당뉴스>의 한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필자는 <당당뉴스>에 글을 쓰기 전에는 오프라인 신문과 잡지에 썼다. 그런데 그들 신문과 잡지에는 마음 놓고 교회나 목사에 대해 비난하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쓰더라도 에둘러 썼다. 그런 글 쓰는 걸 사명으로 알고 있는 필자인데, 가슴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당당뉴스>에 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은혜로 알아 감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풀이라도 한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필자는 말이 은퇴 목사이지 목회를 해 본 적이 없다. 영락없는 무늬만의 목사요, 속빈강정이다. 필자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타인이 본다면 그럴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두셋 소개하고자 한다. 이 또한 목사 사회의 부정적인 한 단면이니 그들에 대한 비난이 될 것이다. 필자의 전도사와 목사 시취(試取) 때의 일화이다. 전도사 시취 때였다. 필자보다 스무 살 정도 연하의 시취위원 목사님 한 분이 왜 전도사가 되려 하냐기에 믿음의 글을 쓰기 위해서라 했더니, 그것으로는 사명감이 약하다며, 이번에는 전도사 시취이니 통과시켜 주지만 목사 시취 때는 어림없다고 하셨다. 그러며 꼭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만 믿음의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도 했다. 마치 신입사원을 직접 뽑는 대기업의 회장 같았다. 전능자 같기도 했다. 지금처럼 다양성이 요구되는 세상에 목사가 하는 일을 목회로만 한정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 시취위원 목사님의 말대로라면 목회 또한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싶기도 했다. 목사 시취 때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취위원 목사님은 모두 다섯 분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 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갑이었다. 을은 물론 필자였다. 당시 시취논문은 작성자가 주제를 준 위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직접 제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필자도 물론 그렇게 했다. 위원 한 분의 교회는 도(道)가 다른 지역에 있었으므로 그리로 찾아갔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교회를 찾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목사님을 예배실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만났는데, 지나는 예배실은 낮인데도 발걸음 옮기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어두웠다. 불이라도 켰으면 했으나 목사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자리에 앉자 목사님은 이런저런 말씀을 마치 설교라도 하듯 일방적으로 많이 하셨다. 그러며 중학생 정도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수준의 문학 이야기를 지루하게 오래 늘어놓았다.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백발이 성성한 교수를 앞에 앉혀 놓고 젊디젊은 목사가 장황하게 문학론 강의를 한 것이다. 그래도 들을 수밖에 없는 필자는 고통을 참느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다 났다. 선생이 직업인 사람은 가르치려는 버릇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목사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그런지는 몰라도 누구나 가르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는 아예 전능자가 되기도 한다. 교인 중에 탁월한 건축가가 있는데도 교회신축 같은 일에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고집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하려는 사업에 전문가가 있는데도 담임목사가 한 마디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모든 일에 달통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한 시취위원 목사님의 교회는 같은 도에 있었으나 가깝지 않은 곳이었다. 40여 킬로를 달려갔으나 목사님은 누군가와 낚시를 갔다고 교회에도 교회부지 안에 있는 사택에도 계시지 않았다. 교회 건물은 얼마나 오래 손을 대지 않았는지 폐가(廢家)를 방불케 했고, 넓지 않은 마당에는 풀이 날대로 나 자라서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교회를 이렇게 방치해 두고도 교인들이 줄지 않는다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얼마를 기다렸다가 목사님이 돌아오셔서 마당에서 선 채로 논문을 전달해 드리고 돌아왔다. 아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밖이 그런데 안이라고 정돈인들 제대로 되었겠는가.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는 시취논문의 제목을 주실 때부터 필자를 무척 당혹스럽게 했다. 그 주제라고 하는 것은 “OO교회 집사의 특성”이었는데, 필자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소속 교단 교회의 집사 특성을 논하라는 것이겠지만, 그게 성경이 말하는 집사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같은 교단의 몇몇 목사님들께 여쭤 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교단 신학대학의 조직신학 전공 교수님께도 물어 봤으나 모른다 했다. 하는 수 없이 주제를 주신 그 목사님을 찾아 힌트만이라도 주시라고 통사정을 해 봤으나 신학대학 도서관에 가면 관련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스스로 알아 해결하라 하셨다. 하는 수 없이 방금 말한 그 조직신학 교수님의 안내를 받아 대학 도서관 서고에 들어가서 같이 찾아 봤으나 그런 자료는 있지 않았다. 필자는 성경에서 집사 관련 기사들을 샅샅이 찾아 주석과 강해서 등을 참고로 집사직의 개념을 정리한 뒤 소속 교단 교회의 집사와 연관시키려 시도하는 가운데 논문을 집필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OO교회 집사의 특성”도 모르다니 OO교 목사의 자격이 없다.’ 이것이 필자보다 십 수 년이나 연하인 그 목사님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필자의 면전을 향해 구두로 해 준 심사평이었다. 결국 그 목사님께 필자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뇌물성 선물을 안겨 주고서야 겨우 통과가 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아직껏 그 “OO교회 집사의 특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믿음의 글이라는 것을 이렇게 쓰고 있다. (독자들 가운데 혹 자기 소속 교단 교회 집사의 특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 이분들 외에도 시취와 관련하여 갑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한 분들은 둘이 더 있었으나 이정도로 그만둘까 한다. 단, <당당뉴스> 칼럼에서 “시골 교회 잔혹사”라는 제목을 봤는데, 필자가 시취과정에 겪은 그 같은 실상을 결론적으로 말하여 ‘목사사회 잔혹사의 한 단면’이라고나 해 두고 싶다. 늦깎이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죄의 탓이라 스스로를 위로라도 해야 했지 않나 한다. 목사들이 변하지 않는 게 비난이 없어서인가 <당당뉴스>에는 잘못이 이미 굳어져 버려 관례화되고 제도화된 현실을 타개하고자 노력하는 글들이 많이 실리고 있다. 다른 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개혁적이라면 개혁적인 것들이다. 목회자들에 대한 비난이 그렇고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에 대한 주장들도 그렇다. 옛날 같으면 목회자를 비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비난하는 것으로 여겨져 큰일 날 일로들 알았다. 헌금에 토를 다는 것은 불경도 그런 불경이 없어 금기시되었다. 그런데 <당당뉴스>가 그 같은 금단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독자들은 그에 공감하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목회자만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요, 제물로서의 헌금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것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당당뉴스>에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든 그것을 읽은 사람들이든 그들 가운데에는 신앙에 대한 잘못을 고쳐 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이들이 많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보니 그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고, 이단들이 숨어들어 댓글이라는 미명으로 훼방을 놓기도 한다. <당당뉴스>에 실린 필자의 지난번 칼럼 “‘연보(捐補)’ 아닌 ‘헌금(獻金)’을 꼭 해야 하나”에 올라온 댓글 중에 재음미해 볼만한 것이 있어 그 일부를 표현상의 몇 글자만 고쳐 소개해 본다. ‘저도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을 몇 개씩이나 나왔고, 성경공부도 할 만큼 했습니다. 당당뉴스를 볼 때마다 한국교회를 세우고 연약한 성도들을 세우는 게 아니라, 안 그래도 힘든 한국 교회를 더욱 어렵게 하는 악역을 하는 면들이 훤하게 보여서 참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바로 알게 하는 면들도 있지만, 결국은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게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자기 지식이 올바르다고 내세우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세우는 게 아니라 믿음과 교회에 대한 신뢰를 더욱 무너뜨리는데 쓰임 받는 것 같아서 먼저 자신의 양심을 살펴보시길 원합니다.’ 표현에 서툰 면이 있긴 하지만, 일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곪은 상처를 아프다고 싸매기만 한다면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갈뿐이다. 고통을 참고 수술을 해야 새살이 돋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고름이 살은 되지 않는다. 고름은 더 많은 고름을 부를 뿐이다. 비만증에 걸린 아이를 보고 성장했다고 한다면 오산이다. 그런 아이는 살을 빼지 않으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말의 본의야 어떻든 이 댓글 중의 “먼저 자신의 양심을 살펴보시길 원합니다”라는 말에서 필자는 가슴을 스치는 뜨끔함을 느꼈다. 앞에서 역지사지를 강조했는데, 그에 맞닿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목사안수를 받았으나 목회를 한 적이 없으니 목회자들과 같은 목사일 수가 없다. 그러니 목회자로서의 목사들을 비난할 때면 언제나 그들과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일을 먼저 한다. 이 글도 다르지 않다. 특히 필자의 전도사와 목사 시취에 대한 일화를 쓰면서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필자의 앞에서 언급한 칼럼을 읽고 “십일조 없는 교회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한 곳이라도 좀 소개해 주십시오”라는 메일을 보내 주신 독자도 있어, 필자는 “제 생각엔 그런 교회보다, 교회의 전면적 모습이 성경정신에 얼마나 맞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찾아보시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라고 회신해 드렸다. 여기에서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계에 제안 하나를, 아니 두 개의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다니는 교회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떠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비난을 하기 전에 역지사지해 보자는 것이다. 교회가 됐건 목사가 됐건 단순한 비난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역지사지하는 숙고와 고민이 함께 해야 그 비난에 힘이 실린다. 그러나 그게 아무리 힘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에게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아무리 악을 쓰고 발버둥을 쳐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이동풍이요 우이독경이다. 교회가 바뀌지 않고 목사가 변하지 않는 건 비난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들을 향한 비난의 화살은 수도 없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무엇 하나 바뀌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져 가고 있을 뿐이다. 왜? 비난만 하고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요, 비난을 위한 비난만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이 있고 고집이 센 목사라도 교인들이 다 떠나고 남아 있지 않은데, 어쩌겠는가. 개선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거든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애정을 실어 비난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사랑의 따듯한 조언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개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거든 조금이라도 더 나은 교회를 찾아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완전한 교회를 찾을 생각은 애초부터 안 하는 것이 좋다. 그런 교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등정도 첫걸음부터가 아닌가. 이 글은 여기에서 끝내는 것이 조금은 더 깔끔한 맛이 나겠지만, 필자의 문재 부족으로 인해 사족을 하나 달아 두고 싶다. 말이 안 되는 말로 하자면 사족은 사족인데 그것이 몸뚱이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역지사지’가 키워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나도 상대방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면 어쩔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찍소리도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 주기를 바라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야지 다른 것을 중심으로 하여 돌면 큰일이 난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은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도리에 어긋나게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역지사지해 보니 나도 상대방과 같을 것이라 해도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중심은 내가 아니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다 해도 비난도 하고 성토도 해야 한다. 민족주의자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친일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을 비난하면, ‘그럼 당신은 그 같은 탄압을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으냐’며 입 닥치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도 똑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쁜 것은 나쁜 것이요, 비난할 것은 비난해야 한다. 단 그 같은 난관에 부딪친다 해도 무릎을 꿇지 않을 사람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가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사의 비리를 비난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목사가 비리를 저질러서는 안 되듯이 나 또한 크리스천으로서의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진정한 ‘역지사지’의 목적은 ‘내가 목사가 되었다면’과 같은 가정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울에 비춰 보는 데에 있다. 성경말씀에 비춰 보는 데에 있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