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함석헌의 추억...최태사(씨알의 소리)

주방보조 2016. 1. 21. 08:17

함석헌의 추억 /최태사 참여 / 인물

2005.08.21. 23:36

복사 http://blog.naver.com/tnt62sik/120016580492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선생님은 4학년, 나는 1학년

최 태사(의사)

 함 선생님은 내 일생의 은인이십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선생님을 통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는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함 선생님을 통하여 나는 덕망이 높은 여러 선생님들과 진실한 믿음을 가진 좋은 친구들과 사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 거짓과 미움과 싸움으로 가득 찬 공포의 세상에서 마치 천국의 시민들처럼 사랑과 믿음 속에 둘러싸여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모두 함 선생님과 또 그를 통해서 알게 된 여러분들의 덕택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오산(五山)중학교 1학년 때에 선생님은 4학년 이였습니다.  그때에 선생님은 공부도 잘 하셨지만 그림을 잘 그리셔서 전교에서 모르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나도 선생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후 선생님은 오산학교를 졸업하시고 일본에 건너가셔서 동경고사(東京高師)를 졸업하시고 곧 모교의 교사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때에 오산교회에서는 선생님이 무교회 신자인줄을 몰라서였던지 그를 교회에 불러 자주 설교를 하시게 하였는데, 나는 그때에 비로소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나갔고, 계속해서 교회에 나가기는 했으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등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이찬갑 선생님께서 성심껏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내세문제' 등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나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 등이 머리에 젖어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오산학교에 부임하신 지 얼마 안 되어 오산교회 옆에 있는 오산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밤마다 1주일동안 "세계 역사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라는 제목으로 천지창조로부터, 과학자의 견지에서 깊고도 폭넓게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씀을 듣는 동안 기독교의 깊은 진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주제넘게 비판을 하기도 한 나의 태도가 부끄럽게 생각되어 새로운 각오로 기독교를 참으로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언제가 교회에서 말씀을 끝낸 다음 "성서조선" 제2호에 실린 "주여 믿어 지이다"라는 글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  글 읽으시는 소리를 듣는 동안 얼음처럼 차갑던 내 가슴에 어떤 뜨거운 기운이 감돌아 저는 곧 선생님 숙소로 찾아가서 "성서조선"지의 독자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선생님과 저와의 개인적인 첫 대면이었습니다.  
그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바른 신앙을 넣어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는지, 얼마 후에 교회에서의 강론을 그만두시고 학교 강당에서 매주일 성서연구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오산학교 학생이 아니었지만, 선생님께 간청하여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오산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불러 "함선생은 교회 밖에서 모임을 갖는 무교회주의자이며, 따라서 이단이니 그 모임에 참석하지 말 것이며, 만일 계속해서 그 모임에 참석한다면 교회에서 출교(黜敎)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 집회에 참가를 계속한 관계로 출교를 당했는데, 그때에 오산학교 설립자(設立者)시며 오산교회의 장로였던 남강 이승훈 선생님과, 그리고 오산중학교 교사이시고 오산교회의 영수이신 박기선 선생님도 같이 출교 당하셨습니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집회장소를 선생님 댁(宅)으로 정하시고, 1938년 봄에 오산학교 교직을 사임하시고 오산을 떠나실 때까지 매주일 모임을 계속하셨고, 저도 오산에 있는 동안에는 선생님 집회에 계속 참석하였습니다.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선생님은 평양부근에 있는 송산(松山) 고등농사학원으로 가셨는데, 선생님께서 살고 계시던 집을 저더러 팔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주택은 과수원 가운데 지어진 퍽 한적한 곳이었는데, 주인이 떠나버린 집이라 이것을 사려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사려했기 때문에 매매가 성립되지 않고 시일을 오래 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나의 전처(前妻)가 "우리가 선생님께서 정하신 값을 다 드리고 그 집을 사자"고 하여 저도 이에 찬성하여 결국 우리가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오산을 떠나신 후, 가끔 오산에 오시게 되면 대체로 저의 집에서 유하였고 또 제 처다 몸이 허약하여 앓는 때가 많았는데, 한번은 오셨을 때 심히 앓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그날 밤을 새우시며 간절한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는 남한(南韓)에 월남한 이후에도 제 아내가 중하게 앓을 때에는 선생님께서 오셔서 철야기도를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후 아내가 운명을 했을 때에 그 영결식을 주도해 주셨고, 그 후 제가 재혼할 때에도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으며, 그후 제 자식의 결혼식까지도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1951년 1. 4후퇴 때 개성서 살고 있던 이성기, 김복영 이라는 두 청년이 저를 찾아와 급히 피난을 가야 한다고 서두르며 오늘저녁 남하(南下)하는 화물열차가 있으니 빨리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라고 하여, 그때 내 머리에 함 선생님은 꼭 모시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나는 곧 선생님을 찾아가 두 청년의 말을 전하고 "빨리 남하(南下)해야 된다고 졸랐다." 선생님은 무척 주저하시다가 내가 그냥 돌아갈 것 같지는 않고, 그러다 나까지 피난길을 놓치게 될 것을 염려 하셔서인지 할 수 없이 저를 따라 나서셨습니다. 이리하여 그후 "자기만 혼자 사시려고 피난을 혼자 일찍 가셨는가" 하는 비방을 받으신 것은 저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대구에 내려 얼마를 지내다가 그후에 다시 김해(金海)로 갔는데, 거기서 많은 친구들과 같이 휴전이 되기까지 모여서 살았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성립된 후 먼저 선생님은 상경하셨고, 저는 그후에 뒤늦게 상경하였다가 곧 경기도 여주로 가서 10여 년간을 떨어져 살았고, 그 후 상경하여 살고 있지만 직업관계상 선생님을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였으며 선생님의 집회에도 참석치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보다는, 선생님께서는 월남이후 그의 그리스도 신앙에 대하여 큰 변화가 일어나 오산시절과는 아주 다른 주장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본래 학식이 없고 소견이 좁은 탓인지 선생님의 그 같은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고민이 되어 한동안 저는 선생님을 모실 자격조차 없는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연히 선생님을 멀리하게 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선생님은 나의 일생의 은인이심엔 틀림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치심에 이해 그리스도의 한없이 넓고, 깊은 사랑의 품에 안겨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되었으며, 저의 부족과 거짓으로 찬 냉 냉한 가슴속에 주님의 영이 깃들어 그의 크신 은총으로 자유와 평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닥쳐오는 모든 역경과 슬픔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 이 육의 삶에 존귀한 삶이 있게 하시려는 하늘 아버지의 시련으로 알아 감사한 마음으로 받게되어,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희망 속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모든 기독교 진리를 알려 주신 분이 바로 함선생님이시므로 저는 선생님의 은혜를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진보나 향상이 없는 저를 안타깝게 여기실 것이라 생각도 하지만 저로서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영생을 믿는 신앙을 견지할 수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사실 저는 좀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선생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이 평안과 기쁨을 지금도 과연 갖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드는 때가 있으며, 선생님의 비약적인 신앙이 도리어 걱정되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선생님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선생님께서 처음에 가졌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지금도 가지게 되시기를 빌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이러한 염려를 웃으실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도 이것을 선생님께 대한 저의 어리석은 정성이라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저도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선생님을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80 여 년의 생애를 통하여 불굴(不屈)의 의지로써 모든 불의에 항거(抗拒)하셨습니다. 일제(日帝)화 공산치하(共産治下)에서는 물론이고, 월남이후 남한에서고 어떤 권력이든 불의에 대하여는 준엄한 질책(叱責)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여러 차례의 옥고를 겪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자신의 표현대로 수난의 오 백년 역사를 이어받은 일제시대와 8.15 해방이후의 혼란의 와중에서 선생님은 어떠한 강풍(强風)에도 꺾기지 않는 정정(亭亭)한 노송과 같이 또 어떠한 격랑(激浪)에도 미동치 않는 거암(巨巖)처럼 꿋꿋하게 이민족의 지향할 바를 지시해 주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 해방 이전은 별로 생활고를 모르고 지내셨으나 월남이후에는 여러 차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신 바 있지만 단 한푼의 깨끗이 못한 돈은 받으신 바도 없으시고, 요구한 적도 없이 일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아 오셨습니다.  실로 선생님은 위무(威武)에도 굴하지 않고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는 헌헌(軒軒)대장부이십니다. 저는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셔서 이 민족을 위하여 그 지조와 신념을 보다 굳게 하시기를 빌며, 아울러 한가지 더 큰 소원은 선생님과 저의 신앙 태도가 전날과 같이 하나의 입장에 서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1989.4.씨알의소리

 

 

출처:씨알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