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성령과 기독교무당(임종석, 당당)

주방보조 2016. 1. 14. 14:31

성령과 기독교 무당
임종석  |  seok9448@daum.net
입력 : 2015년 12월 28일 (월) 04:04:32
최종편집 : 2016년 01월 08일 (금) 05:47:19 [조회수 : 6944]

 

성령에 대한 오해들

필자가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가까이에 느낀 하나님은 성삼위 중 대부분 성령님이셨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기까지 상당 기간을 그 같은 느낌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었다. 조직신학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두드러지고, 성자 하나님은 구속 사역에서, 성령 하나님은 구속 사역을 현실화하는 성도들의 성화에서 돋보인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성부 하나님의 사역은 구약시대에 두드러졌고, 성자 하나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분께서 승천하기까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오순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에 이르러 그러하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는 지금 성령님의 활동이 성삼위의 다른 위격들보다 상대적으로 활발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성삼위 가운데 성령님을 더 가까이에 느낀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의 우리와 멀리 계신다는 것은 아니다. 두 위격의 하나님께서는 성령님 안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그러니 삼위일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 다른 두 위격의 하나님보다 그 이미지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성부 하나님은 그 표상이 구약성경의 말씀들에 의해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어 머리에 떠올리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고,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 활동하셨기에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수반된다.

물론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마3:16)는 기록이 있고,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눅3:22)는 기록도 있기는 하나, 이는 성령님의 구체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 있어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비해 오해가 많고, 그로 인한 신앙상의 과오도 많으며 물의 또한 빈번히 빚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비해 낮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성삼위 하나님은 그 위격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성령이 다른 두 위격에 비해 못한 것처럼 생각된다는 말이다.

사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을 이행하면서 그분들의 뜻을 수행하신다. 동등이 아니라 종속이라는 말이다. 성령뿐 아니라 지상에서 성자가 수행했던 사역 또한 성부에 대해 종속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성자의 지상사역 동안과 성령의 현시대 사역 동안의 직분에 한정된 한시적 종속이라는 점이다.

 

성령 모독죄는 정말 용서를 받지 못하는가

정말이지 오랫동안 필자를 힘들게 해 온 것이 있는데,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되 ‘성령 모독’과 ‘성령 거역’의 죄는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까지도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것이다(마12:32, 막3:29, 눅12:10 참조).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예수님께서 어떻게 용서받을 수 없는, 그것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형제가 지은 죄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18:22)” 하신 분이 아니신가. 그분의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괴로웠는데, 필자만의 일이었을까 싶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마14:26)”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부모와 자식과 형제자매를 실제로 미워하라는 게 아니다. 그런데 뉘라서 이를 모르겠는가.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세상에 왔다(마10:34)” 하셨고, 가족이 서로 “불화하게 하려 왔다(35)”고도 하셨는데, 둘 다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말씀하고자 하신 의도를 놓치고 만다. 최상의 가치를 세상 것에 두지 말고 진리이신 당신 자신에게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령 모독과 거역 죄 또한 이처럼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는 정말 예민한 것이라서 주인이 잘 관리하고 보살피지 않으면 못쓰게 되기 쉽다. 흔히 양심이 무뎌진 사람을 가리켜 ‘양심에 털 났다’고들 한다. ‘양심이 발바닥같이 되었다’고도 한다.

죄로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작은 잘못 하나에도 눈에 티끌이 들어간 것처럼 아파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 같은 잘못들이 반복되다보면 양심의 예민성이 떨어져 무뎌져 간다. 그래서 작은 티끌 하나에도 심한 통증을 느꼈던 눈 같은 예민성이 사라지고 돌멩이에도 무감각한 발바닥처럼 되고 만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죄는 영원토록 용서를 받을 수 없다’ 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인데, 그들이 꼭 그랬다. 그들은 정말이지 오랜 세월을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상태로 있어 왔다. 그도 ‘고의로’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멀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귀가 먹었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다는 말이다.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길은 회개뿐으로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가 그 길을 막아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받지 못할 영역으로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마음 문을 굳게 닫아 버린 것이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성령이나 그의 은사는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그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른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 그리 크게는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외식(外飾)으로 찌든 사람들이었다. 십일조는 철저히 했으나 정의도 긍휼도 믿음도 버리고 말았다. 작은 죄는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큰 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밥 먹듯이 지어 댔다. 외양은 경건한데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그들과 다른가. 아닌 것 같다. 그다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문턱이 닳도록’까진 아니지만 교회출석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주일헌금이며 십일조 등의 헌금에도 인색한 편이 아니다. 교회봉사에도 나름은 열심인 편이다. 그러나 바른 믿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교회출석 잘하고, 헌금이며 교회봉사 같은 것도 남에게 뒤지지 않게 하고 있는 것으로 그저 막연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결승점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육상선수와 다를 게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음이 스스로의 힘으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없이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성령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필자는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이 언짢다. 성령은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도 물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으라”(요20:22) 말씀 하셨다는 것을 안다. 사도행전은 욜2:28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겠다”(2:17)고 하셨다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성령의 충만’을 의미하는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모두가 필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표현들이다.

필자라고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다만 이 같은 표현들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안타까워하는 것일 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성령은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완벽한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액체처럼 부어 그릇을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이라는 말에서는 어떤 현상이 연상되는가. 빈 병과 같은 용기를 무엇인가의 액체로 채우는 것과 같은 것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상의 많은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라 하면 은사와 관련하여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성령의 은사들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선 성경이 말하는 은사들을 나열해 보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 통역, 사도, 선지자, 교사, 돕는 일, 다스리는 일,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고전12:8-10, 28-30, 롬12:6-8 참조)이다.

이들 은사는 학습이나 노력으로 갖게 된 것이 아니다. 내가 필요해서 원해 갖게 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주어진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지혜라든가 지식, 믿음 같은 것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돕고 섬기고 위로하고 구제하고 긍휼을 베푸는 일 등도 모두 우리에게 필요함은 물론이다.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은사로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일 뿐이다.

 

액체로 그릇을 채우듯 성령으로도 인간의 내면을 채울 수 있는가

그런데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예언이나 방언, 신유의 은사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 것 같다. 성령을 받으면 반드시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은사에 우열이 있을 수 없고, 신자라 해서 모든 은사가 다 필요한 것도 아니다.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은사도 없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무슨 신비스러운 일, 초자연적인 일이 수반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니다. 성령을 받아 반드시 일어나는 일은 믿게 되는 것이다. 환언하면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누구나 다 받았지만 충만히 받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거듭 말하거니와 성령은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만’이라 해서 병 같은 용기에 액체가 가득한 것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보내 주셔서 우리가 모시어 영접한 분이시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을 상징적으로 ‘수수(授受)’나 ‘충만(充滿) 등으로 표현하여 관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이 글에서도 편의상 그리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충만’이란 우리에게 항상 내재해 계시는 성령님께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령님께서는 때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역하시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기를 바란다. 성령충만을 바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되기란 쉽지 않다. 바라면서도 우리 각자 스스로가 그분의 활동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육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를 믿음의 인격체로 성장시켜 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이기적인 마음, 자기만족, 자기현시 같은 것들은 성령님의 활동을 저해한다.

성령님께서 나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시게 하려면, 다시 말해 성령이 충만케 되려면, 인간적인 욕심, 즉 육에 속한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각오와 결단을 다지는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 욕심을 거머쥐고 있는데도 충만하다면 그건 성령이 아니다.

성령 운운하는 가운데 야기된 문제들은 그 원인이 대부분 성령님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안 데에 있다. 거기에 인간적인, 세상적인 생각이 가세하여 성령님의 사역을 무슨 무속신앙에서의 신내림 비슷한 것으로까지 끌어내리게 한 것이다.

성령을 무슨 액체나 기체처럼 여겨 그것으로 자기의 내면을 가득 채우는 걸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입에서 소음기를 떼어낸 오토바이처럼 요란스러운 소리를 쏟아내고, 손바닥이 장풍(掌風)을 일으켜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걸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같은 현실을 보시는 성령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영분별의 은사가 있어야만 성령의 진위를 알 수 있는가

물론 성령의 역사가 초자연적 현상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신유의 은사에 의해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에 너무 의존하는 나머지 의사나 병원을 멀리하여 병을 키우거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불신자들이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다니며 병을 고치려 하듯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면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은 점쟁이가 복채를 요구하듯 헌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돈을 요구한다. 기독교 무당이 되고 만 것이다.

은사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소위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예언의 사전적 의미인데,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에서의 예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기독교 예언의 주된 의미이다.

그런데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많은 사람들은 ‘당신은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될 사람’이라느니, ‘아들이 대학입시에 합격할 것’이라느니 하는 등의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하고 있는 사업의 미래에 대해 알려 달라 하기도 하고, 구상 중에 있는 사업을 시작해도 좋은지에 대해 묻기도 한다. 자식들의 앞날에 대해 말해 달라 하기도 한다. 어떠한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묻는다. 점쟁이를 찾아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물론 실제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적용하여 맑은 심령으로 상대방이 어떤 일을 하기에 적당한 사람인지에 대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이 한 예언이 한두 번 맞았다고 해서 마치 예언자라로 된 듯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고, 거짓 예언자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절대로 나는 사이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영 분별하는 은사를 말하기도 하는데, 특별히 그러한 은사가 없어도 우리는 영의 참과 거짓을 대부분 분별할 수가 있다. 성경이라는 거울로 비춰 보면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열매로 안다 했다(눅6:44). 감이 열리면 감나무이고 밤이 열리면 틀림없는 밤나무이다. 마찬가지로 성령 또는 성령은사의 진위는 그것을 받았다는 사람의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사람, 교회와 이웃에 도움이 되고 덕을 세우는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으나, 자기 드러내기를 좋아하거나 교만한 사람이라면 멀리하는 것이 좋다. 은사로 인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물리치는 것이 좋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결코 남의 눈에 거슬리는 언행을 하지 않는다.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봉사나 희생 쪽에 더 관심이 많으며, 입이 아니라 모범적 삶으로 전도하기 위해 기도한다.

성령의 은사 또한 교회와 이웃의 유익을 위하고 성삼위 하나님을 좀 더 밝히 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위화감이 조성되고, 질서가 흐트러지고, 사람들의 인상에 씁쓸함이 남게 된다면 그건 하나님의 의도를 빗나간 것이다.

필자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권사님 한 분이 투시의 은사를 받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았다. 사람들은 그 권사님이 가까이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고, 제일 큰 피해를 입은 건 그분의 며느리였다. 권사님은 생각까지도 들여다보고 며느리를 쥐 잡듯이 다그치기 일쑤였다. 권사님이 받았다는 투시의 은사는 다른 사람을 아프게 찌르는 송곳이었다. 권사님은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을 은사라고 받았다 하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귀한 자격은 잃고 만 것이다.

 

기독교의 기독교다움을 되찾는 것만이 방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으로 이미 완벽하게 정리되어 우리의 손에 들어와 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의 대언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언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성경에 없는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풀어 적용하는 것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과 배치된다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사이비이다. 성경에 부합된 것이라면 예언자의 예언이 아닐지라도 진리이다.

예언자가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될 사람’이라는 예언을 했다 해도, 그리고 그 예언이 옳은 것이라 해도, 당사자가 기도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뤄지지 않아 거짓이 되고 만다. 그리고 기도하며 말씀의 거울에 비춰 보면 예언자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나 자녀의 진로를 바르게 선택할 수 있다.

어떠한 예언도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성경을 뒤엎을 수 있는 예언도 없고, 성경을 불려 쓸 수 있는 예언 또한 있지 않다. 성경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도 없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성경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문제해결을 위해, 미래에 대하여 미리 알기 위해 예언은사가 있다는 사람을 찾아다닐 일이 아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나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리되어 사람이 술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성을 잃어 꼴불견이 된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성이 더욱 또렷해지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이 되고,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바뀌어 가게 된다.

성령이라고 하는 나무에는 이러한 것들이 열매로 열린다. 이웃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려는 열매, 직장 일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열심히 하는 열매,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려는 열매 등이 열린다. 어딘가의 휴지 조각 하나라도 버리기보다는 줍고, 좁은 길을 걸을 때에도 내가 먼저 비켜 간다.

이 같은 열매는 등한히 하면서 교회봉사 잘하고,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방언이나 예언 등의 은사를 받았다 해서 반드시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며 성령이 충만한 것도 아니다. 큰소리로 기도하여 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경건한 삶의 모습으로 보인다면 나의 영적 눈(靈眼)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들이 깊어지고 굳어져 기독교 무당이 생기는 것이다. 기독교가 왜 쇠퇴하고 있는가. 기독교가 기독교다움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무당들을 찾는 것 같은 부류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럽의 교회들이 신도 수 감소로 문을 닫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래서 그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건물들이 팔려 나가 상가나 체육시설, 심지어는 술집으로까지 변했다고 하는 말도 듣는다.

그런데 이는 우리도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을 무당들이나 하는 짓으로까지 끌어내리는 등의 반신앙적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래서 기독교가 기독교다움을 잃어 간다면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슴의 돌비에 새겨야 한다. 이제라도 성경으로, 성경정신으로 돌아가 기독교의 기독교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