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보조 2012. 7. 25. 18:26

[답변]김진석님에게 드립니다... 98/10/17 19:05 | 조회수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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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님 만을 위해서...제글을 이어나가겠습니다...다른 기독교인분들
제 글에 그리 개의치 마시고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불교적 관점에서는 윤회의 고리를 더욱 공고
히 하게 하는 원인이 되죠...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히 지옥行이
되겠구요...하지만..김진석이란 사람의 아전인수격 불교왜곡에 화가 나
서 이렇게 쓰게 됩니다...(4) 까지 나왔더군요...저도 예수를 모욕하는
타종교인이 기독교인 입장에선 밉게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러한 미혹에 
싸이게 되었습니다...하지만...어쩔수 없군요...붓다의 말씀도 저의 감
정을 삭이기엔 부족한가요...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렸지만...또다시
이런 글을 쓰게 된데 대하여 할말이 없습니다...원필님의 말씀처럼 불교
인의 기독교인에 대한 반박 정도로 들어주세요...
우선, 불상문제...진석이 한 주장을 적어보죠...
"가끔 기독교쪽에서도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데...그
것은 이 대중적으로 "우상화된 불상"을 제거 하자는 것입니다...불교인
들은 그런 것을 소리 높여 비방을 하지만 진정 그들이 불교를 살릴려면 
이런 "우상적인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진석은 불상의 개념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속에 포함
된 소박한 것들을 알지 못합니다. 정통불교에선 불상의 우상화를 인정치
않는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들에도 '신격화'를 시도하지 않습
니다. 그러나 또한 민중들의 소박한 믿음이 불상의 '우상화' 를 시도하는
것도 사실이죠...진석은 '우상적 요소를 없애야 할것' 이라고 강변하는데
불교는 강압적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우상이 되든간에 뭐가 되든간에 
말입니다. 불교에선 그러한 행위가 불교를 타락시키고 끝내 멸망을 하게 
한다 하는 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불교는 그런 것을 민중의 소박한 소망의
결과물로 인식하지요...산신각과 용왕당이 존재하는 것도 그것이 불교의
존재 자체에 그 어떠한 해악을 끼칠 수도 없고, 그러한 믿음도 중요한 것
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불교는 큰 道이니까요. 그러한 민중의 소망을 들어
주지 못하고 배척만 한다면 차라리 불교가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존재의미는 그러한 대중의 미혹함을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떨쳐라는
것입니다. 강요가 아닌 관조의 의미입니다. 불교는 죽지 않습니다. 존재
할 뿐이며 발전을 해 나갑니다. 그런 것에 연연하여 조바심을 낸다면 
그 종교는 그 자체가 존립의 위기를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개도 자기가
무서우면 짖지 않습니까...짖음으로서 무서움을 극복해보려는 것...
불굔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비방이나 욕설이 들어와도 불교의 사상
에 중대한 위협을 미치기 힘드니까요...오히려 '장애 가운데서 해탈을 얻
으라' 라는 붓다의 말씀이 말해주듯이 스스로를 항상 깨닫으려 노력하고
발전해 나가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고정적 진리를 생각치 않고 유동적인
진리관을 가지는 것... 
인도에서는 붓다 사후 300년동안 붓다의 모습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슬람의 '마호멧 우상이 없는' 이유와도 동일합니다. 위대한 분을 하찮은
우상 따위에 가두어야 한다는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그리하여
불교 성립 초기엔 붓다는 형상이 아닌 다만 이미지로서 나타내어졌습니다.
붓다의 중요 이미지로는 , 법륜(法輪), 보리수나무, 또는 그냥 빈자리만
이 묘사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붓다의 형상화가 시도
됩니다. 그 이유는 전도의 용이성이었고, 또한 붓다의 직접적인 용모를 
나타냄으로서 그 신심이 더욱 깊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불상제작으로 인해서 불교예술이 발전하게 됩니다...이 불교예술의 발전
은 또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우선 간략한 불교의 역사를 들어보죠...불교의 역사 역시 '이단의 역사'라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약간 생소하시죠? 이단 이라는 개념 제시를 시사하
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단을 색출하는 역사이
며 이단을 추방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교에 대입할 적에는 그
양상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불교에도 이단이라는 개념이 존재할까요? 
의심스러우시죠? 그러나 불교의 역사 역시 이단이 존재하는 역사입니다.
'대승비불설론(大乘非佛說論)' 은 대승경전을 붓다가 설한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불교의 역사는 사실 이단투성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다만...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기독교의 그것과는 판이
하게 다르죠...붓다 사후에 백년쯤 지났을때 일단의 비구들이 10가지의 새
로운 조목들을 주장합니다. 식사시간에 대한 제한이나 보시를 화폐로 거
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등이죠. 이것은 화폐경제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에 장로(기독교의 장로개념은 불교에서 차용한것)급의 비
구들이 '제2결집' 이라고 부르는 회의를 엽니다. 기독교에서 '니케아공의
회'를 소집한 것과 같이 말이죠...이렇게 쓰고 보니 불교와 기독교는 걸
어온 길도 참으로 비슷하군요...우연이라 하기엔...
거기서 장로급 비구들은 그러한 요구사항들이 모두 비법(非法)이라 하여 
물리치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일단의 승려들은 독자적으로 다수의의견
을 같이 하는 비구를 모아서 '대합송' 이라 부르는 회의를 열고 장로들
과 결별하고 맙니다...기독교종교개혁의 역순이죠...이것이 불교에서 일어
난 분파의 최초사건입니다. 그때 분리한 것을 대중부(大衆部, Mahasmghika)
라 하며 초기불교집단(부파불교)의 진보파를 형성하게 되죠. 타락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율을 적용하게 되는 것입니다...이른바 대승불교
(Mahayana)는 이러한 대중부의 계보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명백히
붓다의 사상을 그대로 고수해 가려는 정통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
죠. 자기형성에 힘쓰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대중의 구제가 먼저 선
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붓다가 많이 쓴 분석적 방법을 고
수하고 있는 정통파에 비해서 그들은 직관적 방법이야 말로 중요시되어
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훗날 중국 선(禪)사상을 이루는 핵심이 되죠.
그들은 또한 붓다 그분까지 비판할 수는 없지만 열반의 경지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성자의 이상적 모습(아라한 또는 나한이라 합니다)을 비판하고
대중의 구제에 그 목적을 두는 보살(Bodhisatta)이라는 새로운 이상상을
내세웁니다...또한 그들은 붓다나 그 제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경전을 많이 만듭니다. 이게 대승경전(Mahayana-Sutra)입니다. 정통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단이죠.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불교교단에서 추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생명이 거기서 솟아나왔다고 하는게 오늘날의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계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이 또한 불교의 엄연한 역사이기에 말이죠...이러한 불
교의 역사는 그뒤에서 선불교의 발전에서 이단역사의 극치를 이룹니다. 
소위 교외별전이라 일컬으며, 엄청난 양의 한역불교경전을 가리켜 거기엔
진실한 불교의 정신은 없다고 까지 이야길 합니다...진정한 붓다의 정신
은 다른 곳에서 면면히 내려왔다고 (이심전심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주장하죠...그들도 '염화미소(捻華微笑)'의 일화를 들어서 그것이 붓다로
부터의 정통적 계승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염화미소를 모르시는 분을 위해
서 간략하게 나마 적어드리면, 어느날 붓다가 연꽃 한송일 따서 대중에게
보여주며 눈을 꿈쩍합니다. 모두들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게 있었으나 가섭
(붓다의 10대 제자의 한분)만이 그 순간 빙그레 웃음지었죠. 이를 보고서 
붓다 왈 '나에게 교외 별전의 법이 있는데, 그것을 이에 가섭에게 전하노라'
라고 합니다. 이것이 선종의 성립기원이 된다고 합니다...그리하여 중국인
은 새로운 불교인 '선불교'를 수립합니다...단적으로 말해 '이단' 이 되는
것이죠...그러나 거기서 새로운 불교정신이 풍성히 흘러나온것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불교의 역사에서 나오는 이러한 사실들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알쏭달쏭하죠? 이러한 것은 불교계 내에서 결코 '이단적 행위' 였다는 소
릴 들을 수 없습니다...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이단' 이라 하여 추방당
한 불교부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를 하나 하나 들어보죠. 우선 불교는 본디 권위주의적 종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붓다라고 하여도 (역사적 붓다) 처음으로 법(法)
을 깨우친 자라는 것 이외엔 특별한 권능이 전혀 인정되지 않습니다...그점
에서 우선 붓다는, 예수가 야훼의 독생자이고 야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
는 중개자라는 것과는 전혀다른 존재입니다. 붓다는 스스로 말하길, '나는
여러분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동행자의 한사람이요 우정어린 친우이다' 라
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는 한조각의 특별한 권능도 지니지 않은 교단의 한
성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붓다는 교단의 창시자이지요...
참으로 공정하고 자신을 낮추려는 노력이 돋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불교 속에서 신의 아들이나 구세주는 결
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후세에 와서 일반사회의 풍속을 따라서 왕사나 
국사 등등의 승계나 직제가 만들어지긴 했어도 그들이 바로 극락행을 보장
하는 권한을 가진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찍이 종교적 권위
주의가 확립된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이 불교사를 이단의 역사로 만들면서
전체적 융합의 역사로 만든 원동력이 되겠지요...
불교는 당연히 상대주의적 존재론을 밑바탕을 하는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선 모두가 상대성 관계성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연기의
법칙이 단적인 예로서 두개의 나뭇가지는 서로 의지해야 만이 지상에 서
있을 수 있죠. 그 중에 한개라도 치워버린다면 쓰러지게 됩니다. 이 것을
후세의 '화엄경(Avatasamskasutra)'에서는 인타라망(因陀羅網)의 비유를
가지고서 설한 바가 있지요. 인타라는 인드라(Indra, 김종화님의 ID이기
도 하죠)의 음사인데, 고대 인도의 최고신입니다. 불교에선 흔히 제석천
이라고 하죠. 이 신은 커다란 그물로 이 세계를 이어주고 있는데 그 그물
은 종횡무진의 선들로 짜여지고 그 매듭마다 옥구슬이 달려 있어서 그 하
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들도 울립니다. 이러한 비유로서 세계의 중중무진
(重重無盡)한 관계성을 설명하려는 것이지요. 거기엔 복잡한 관계성과 함
께 무한한 유동성이 존재하죠. 이런 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하나, 사족을 달자면, 중국에서는 인터넷의 한역이름을 '인타라망' 이라
고도 쓴다고 합니다. 인터넷 = 인타라망, 이 인터넷의 특징중의 하나가 
실시간 상호작용이지요. 즉 Realtime Interactiveness입니다. 인타라망
역시 상호작용의 원리를 따르지요...우연일까요? 인타라망의 비유와 인
터넷의 관계...참으로 미묘하군요...잡담이었습니다...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고정적 존재나 항구적 자아(Atman 또는 Perso-
nal Spirit)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 또한 무
한히 변화해 가는것...붓다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아리스토텔레스
의 말을 생각해 보자면 '굳어진 진리' 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잘쓰는 진리라는 말을 적용해 본다면 - 이 진리라는 말에는 
고정적인 인상이 따르지요. 하지만 진리란 것은 '참된 이치' 라는 것이
지 고정된 영구불변의 이치라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이치란 시대상에 따
라 달라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지요... - 이 진리는 유동적 진리가 되
어야 합니다. 
인간은 무상(無常)한 존재라는 것, 이것을 인식할수 있는 자만이 참된 
진리를 구할 수 있는, 역설적 발상입니다. 단순히 생노병사 만이 무상한
존재를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악 또한 무상한 겁니다. 무
상한 까닭에 또한 선하게도 악하게도 되는 겁니다. 절대적 선이라든지 절
대적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상한 겁니다. 악이 없이는 선이라는 개념의
성립은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천국의 개념은 선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
것은 아무도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악이 없는 선이란 아무런 개
념을 가질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이는 붓다가 될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 붓다는 신의 개념이 
아닙니다. 열반을 성취한 자...신도 윤회를 거듭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관
입니다. 
이것은 대승의 주장입니다. 상대주의의 입장에 서는 붓다의 길은 주체의 
자각이라는 하나의 옥구슬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변화를 나타낼
수 있지요...카오스 이론을 생각해 보시면 쉬울듯...한마리 나비의 영향이
무한한 변화를 가져와서 뉴욕에 폭풍을 가져온다는...만델브로트 곡선을
보신 분들은 알겁니다. 만델브로트집합의 첫시작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
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 첫 시작 - 그러니까 컴퓨터로 그려낸 가장 최
초의 래스터 그래픽화상, 리눅스에 프랙탈을 볼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잖
습니까...그것을 최초 생성한 모델 또한 큰 전체의 작은 하나라는 것...
전체-> 작은 일부 ->또다른 전체-> 또다른 작은 일부.....이렇게 무한의
과정을 거칩니다...무한의 개념에서는 시작과 끝이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순환론적 사고의 멍청함이 아니라 세계의 존
재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죠...세상을 신이 창조했다손 치더라도 그것
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신의 존재이유도 있을 것입니다만...
기독교인들은 아직 그런 문제에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신은 
무한한 존재인가 유한한 존재인가? 무한한 존재라면 순환적 세계관을 수
용해야 하며, 유한한 존재라면 역시 신의 끝장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단절론 적 세계관은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한 기독교인들 역시 '무지' 한 존재의 일부일수 밖
에 없습니다. 그러한 무지를 열반으로서 깨뜨리고자 하는 종교이며 철학
이며 사상이 불교입니다...전 불교를 종교라는 저급한 수준으로 취급하고
싶진 않습니다. 불굔 철학이며 사상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것만이 정통 불교이며 이것과 다른 것은 모두 이단이다 이런 식의 '고
정된 진리' 관은 붓다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어긋나는 것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붓다에서 시작하여 붓다에서 끝난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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