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저의 외로운 산행에 대하여
그날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둘 있었으니
거의 비슷한 유전자를 주고 받은 마눌님과 원경이입니다.
그리하여 마눌님은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자원하셨고
원경이는 제가 가볍게 꼬드겨 통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택시타고 잠간 산에 갔다오면 9시에 집에 도착할 수 있어. 공부에도 별로 지장이 없을껄
게다가 아침도 사줄 용의가 있단 말이지.
'아침도 사줄수있다' 이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우리 원경이를 폄하하는 것일까요? ㅎㅎ
8시가 거의 되어
잠자고 있는 두 아들놈들을 내팽개치고
썬글라스와 모자와 지방이를 준비한 저와
모자를 쓴 원경이와
고집을 부리며 기어이 모자도 안 쓴 마눌님
우리 셋은
구 제일은행 맞은 편 길에서 택시를 타고 아차산 입구까지 단숨에 달려 갔습니다.
바위길을 오르면서 세번 쉬고
쉴 때마다 참외를 하나씩 깎아 나누어 먹었습니다.
산행같지도 않은 산행이었지만 그래도 숨이 찰 때마다 낡은 몸을 쉬며 깎아먹는 참외의 맛이란, 정말 그 맛의 절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
고구려정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니 아무도 없고
책 좋아하는 두 여인네는 거기 진열장에서 책을 뽑아 아주 잠시나마 한권씩 들고 뒤적이기 시작하고...저는 먼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전의 멀리까지 뚜렷이 보이던 건강했던 눈을 아쉬워 하며...아, 안경낀 친구들이 어려서부터 이렇게 탁하게 세상을 보며 살았구나...이해하며 말이지요.
...
더 이상 오르지 아니하고
계단길로 내려와서
아차산 입구 아랫쪽에 더덕을 파는 아주머니께 만원어치 깐 더덕을 그 향기에 속아 사고^^
청솔모 한마리 군밤장수 아저씨에게 밤톨 하나 받아 까먹는 것 잠시 구경하고
초등학교 담장길에 김밥과 쑥떡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천원에 두줄짜리 김밥과 쑥향이 제대로 나는 쑥떡을 사서 먹으며 광나루역까지 걸었습니다. 이때가 9시이니...이건 뭐 정말 산행을 했다고 하기엔 너무 민망한 아침 산책이었지요.
택시를 잡아 두 여인을 보내고 저 혼자 걸어 집에 가려는데
'아침 사주신다며요?'라는 명랑한 원경이의 한마디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광나루역 사거리의 '김밥천국'이라는 곳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야~ 아까 김밥도 먹고 쑥떡도 먹었잖아...저의 볼멘 소리도
그게 약속하신 아침외식이랄 순 없다는 주장에 그만 들어가 버렸지요.
원경이는 돈코츠라멘, 마눌님은 떡볶기와 김밥...저는 둘의 것을 뺐어 먹고...
...
돈코츠라멘이 영 부담이 되었는지(운동 같잖은 운동을 하고^^ 많이 '처묵'하셨으니 당연한 일) 저와 함께 걷겠다 하고
마눌님도 남편을 딸에게 빼앗기기 싫어서인지, 모자도 없이 땡볕에 같이 걷겠다 하시니
후환이 몹시 두려웠지만 헤민병원까지 거의 5천보를 함께 걸었습니다.
자양골목시장만 통과하면 되는데, 거기서...한계를 느낀 마눌님이 택시를 타야겠다며 원경이와 둘이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전같으면 다 와서 무슨 택시야 나무랐겠지만
이젠 철이 조금 들어 ... ^^ 웃으며 보내드렸지요.
저는
또 다시
결국
외롭게^^
붐비기 시작하는 시장길을 걸어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총 걸음수 약 만보...
도착시간 10시 40분...
그래도 동행하는 이가 있어줘서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
주방보조2012.06.23 14:16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
답글
원경이가
아빠는 왜 지난주 우리랑 산에 간 것 블로그에 안 올리시는 거예요? 따지는 바람에
반은 억지로 쓴 글입니당^^ -
-
딸없는 사람이 진짜 외로운 사람입니다.^^
답글
어젠..아내가 몇 달 공부한 후,
음악치료사 자격이라는 열매를 거두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시험 보는 동안 유민이랑 놀아줬는데,
오목, 알까기, 바둑...알까기..알까기...또 오목...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덕에(제가 지면 계속해야했거든요)..10전 8승.
어느덧 성장한 딸이 패해도 예전처럼 짜증내진 않더군요. 그러나,
교묘한 말솜씨로 어거지를 부리면서 연장전을 이어 갔다는 거 아닙니까.
결국 1시간 이상......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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