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일요일이라는 단어가 나오나요? [6]
- 무딘스키
구약성경은 [계명]과 [제사법]과 [이스라엘 국법]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 계명은 히브리어로 [미츠와]라고 하고 그리이스어로는 [엔토리]라고 합니다.
이 계명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서 가장 지엄한 것이었으며,
계명을 어겼을 때는 그에 대한 댓가를 받는 [탈리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탈리오는 그 "보호하고자 하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탈리오가 [동형보복]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으나 구약시대의 탈리오는 [동가보복] 차원이었습니다.
[생명을 범한 자는 생명으로 갚는다]고 할 때 이 탈리오는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안식을 준수 계명은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안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품안에서 하느님앞에서 현재 나는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구약성경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 때문에 안식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안식일 준수을 포함한 구약의 "탈리오적 계명"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그 탈리오적 계명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죠.
탈리오적 계명을 범하고, 준수하지 못한 [사람]이란 존재는 죄인임이 드러났고 [정죄]되었으며, 생명으로부터의 단절 즉 [사망]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제물로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동시에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과 유월절(과월절)이 겹친 그날에 십자가를 셨습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의 댓가인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탈리오적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근거가 됩니다.
구약의 계명이 탈리오적 계명이 아니라면 단순히 도덕이나 준칙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근거도 제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의 댓가인 죽음의 근거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짐짓 하느님이 되는 것"이 죄라는 성경상의 죄의 개념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려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적대관계에 있던 내가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산다는 세례도 사실상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세례 받은 자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계명을 지킨 것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것을 그리스도를 옷입듯이 입었다고 신약성경은 제시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정교회는 세례시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옷입듯이 입었도다, 알릴루이야]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것은 장승곡조의 풍으로 불리워집니다.
예를 들자면 안식일 준수계명이 요구하는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안식을 사람이 실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죄인임이 드러났고, 죄의 댓가인 샘명으로부터의 단절 즉 죽음에 쳐해졌으나
예수님이 계명준수 위반의 댓가를 담당하여 대신 죽으신 후 부활하심으로써 계명 미준수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하느님에게로 돌이켜
자신이 하느님이 아님을 인정하고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인식하며
성삼위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는 표로써 세례를 받게 됩니다.
즉 안식일을 모두 지킨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부터 교회에서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을 제8요일, 주님의 날, 끼리아끼라고 합니다. 이 때에 교회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어진 구원사역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몸과피를 가지고 생명의 잔치를 벌입니다.
하느님께대한 감사를 하고
재현을 통해 예수님을 기념하며(기억이 아님)
성령님을 환영하여 모셔드리고(에피클리시스)
성도상호간에는 생명의 잔치요
세상을 향하여는 다가올 세상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초대교회중 초기에는 회당에서 가지는 집회와 저녁만찬 이후에 가지는 감사의 성찬례가 분리되어 있었으나 사도들 당시 후반부에 이 두개가 통합되어 아침에 이루어지는 리뚜르기아(감사의 성찬례)의 형태로 정착됩니다.
이 감사의 성찬례로서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 오는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감독이자 주님의 형제라고 불리운 야고보의 감사의 성찬례와 마르코 복음서의 기자 마르코의 감사 성찬례, 그리고 인도의 사도 도마의 의한 감사 성찬례가 있으며,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것]을 누리는 날입니다.
구약의 탈리오적 계명의 차원에서 탈리오의 차원에서 [지키는 날]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지켜야]한다면 우리는 탈리오인 율법아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아래에 있지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의 기도(요한에 의한 복음 17장)를 드리기 전에
우리에게 세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새 계명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자유인으로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계명이었습니다.
이 새계명은 탈리오적인 구약의 계명과는 달리 자유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바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새로운 관계에서의 계명을 신약성경은 제시합니다.
구약의 탈리오적인 계명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그 탈리오적인 효과를 주장하지 못하지만 탈리오적인 계명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과 수준을 제시하며 대속의 예수그리스도께 날마다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구실을 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탈리오적인 차원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의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일과 안식일은 양자택일적인 성격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 무엇을 [지키려는 시도] 그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끼리아끼]와 감사의 성찬(리뚜르기아]의 의미를 이해하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계명은 히브리어로 [미츠와]라고 하고 그리이스어로는 [엔토리]라고 합니다.
이 계명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서 가장 지엄한 것이었으며,
계명을 어겼을 때는 그에 대한 댓가를 받는 [탈리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탈리오는 그 "보호하고자 하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탈리오가 [동형보복]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으나 구약시대의 탈리오는 [동가보복] 차원이었습니다.
[생명을 범한 자는 생명으로 갚는다]고 할 때 이 탈리오는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안식을 준수 계명은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안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품안에서 하느님앞에서 현재 나는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구약성경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 때문에 안식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안식일 준수을 포함한 구약의 "탈리오적 계명"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그 탈리오적 계명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죠.
탈리오적 계명을 범하고, 준수하지 못한 [사람]이란 존재는 죄인임이 드러났고 [정죄]되었으며, 생명으로부터의 단절 즉 [사망]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제물로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동시에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과 유월절(과월절)이 겹친 그날에 십자가를 셨습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의 댓가인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탈리오적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근거가 됩니다.
구약의 계명이 탈리오적 계명이 아니라면 단순히 도덕이나 준칙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근거도 제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의 댓가인 죽음의 근거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짐짓 하느님이 되는 것"이 죄라는 성경상의 죄의 개념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려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적대관계에 있던 내가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산다는 세례도 사실상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세례 받은 자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계명을 지킨 것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것을 그리스도를 옷입듯이 입었다고 신약성경은 제시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정교회는 세례시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옷입듯이 입었도다, 알릴루이야]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것은 장승곡조의 풍으로 불리워집니다.
예를 들자면 안식일 준수계명이 요구하는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안식을 사람이 실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죄인임이 드러났고, 죄의 댓가인 샘명으로부터의 단절 즉 죽음에 쳐해졌으나
예수님이 계명준수 위반의 댓가를 담당하여 대신 죽으신 후 부활하심으로써 계명 미준수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하느님에게로 돌이켜
자신이 하느님이 아님을 인정하고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인식하며
성삼위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는 표로써 세례를 받게 됩니다.
즉 안식일을 모두 지킨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부터 교회에서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을 제8요일, 주님의 날, 끼리아끼라고 합니다. 이 때에 교회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어진 구원사역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몸과피를 가지고 생명의 잔치를 벌입니다.
하느님께대한 감사를 하고
재현을 통해 예수님을 기념하며(기억이 아님)
성령님을 환영하여 모셔드리고(에피클리시스)
성도상호간에는 생명의 잔치요
세상을 향하여는 다가올 세상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초대교회중 초기에는 회당에서 가지는 집회와 저녁만찬 이후에 가지는 감사의 성찬례가 분리되어 있었으나 사도들 당시 후반부에 이 두개가 통합되어 아침에 이루어지는 리뚜르기아(감사의 성찬례)의 형태로 정착됩니다.
이 감사의 성찬례로서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 오는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감독이자 주님의 형제라고 불리운 야고보의 감사의 성찬례와 마르코 복음서의 기자 마르코의 감사 성찬례, 그리고 인도의 사도 도마의 의한 감사 성찬례가 있으며,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것]을 누리는 날입니다.
구약의 탈리오적 계명의 차원에서 탈리오의 차원에서 [지키는 날]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지켜야]한다면 우리는 탈리오인 율법아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아래에 있지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의 기도(요한에 의한 복음 17장)를 드리기 전에
우리에게 세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새 계명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자유인으로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계명이었습니다.
이 새계명은 탈리오적인 구약의 계명과는 달리 자유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바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새로운 관계에서의 계명을 신약성경은 제시합니다.
구약의 탈리오적인 계명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그 탈리오적인 효과를 주장하지 못하지만 탈리오적인 계명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과 수준을 제시하며 대속의 예수그리스도께 날마다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구실을 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탈리오적인 차원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의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일과 안식일은 양자택일적인 성격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 무엇을 [지키려는 시도] 그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끼리아끼]와 감사의 성찬(리뚜르기아]의 의미를 이해하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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